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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성명·논평

[가족 내 차별과 폭력에 대한 기획 기사] 딸은 ‘인형’이 아니에요.

by kwhotline 2019. 6. 7.

[가족 내 차별과 폭력에 대한 기획 기사]


딸은 인형이 아니에요.

보라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몇 해 전, 어린 딸아이에게 나는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서를 시키며 장난을 치는 아빠의 영상이 유튜브 상에서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저런 딸이라면 어쩔 수 없어”. 사람들은 귀여운 딸의 모습에 감탄하며 아빠의 심정을 이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사랑스러운 딸의 모습을 담기 위한 아빠의 가벼운 장난일 뿐이지만, 그것이 딸 가진 부모라면 당연한것으로 여겨진다는 사람들에게서 우려 아닌 우려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딸을 대하는 가정의 일반적인 모습

지난 1월 종영한 E채널의 방송 내 딸의 남자들은 딸의 데이트를 아빠가 관찰하는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딸과 이성친구와의 스킨십 장면에 아빠는 한숨을 쉬거나 목덜미를 잡고, 다른 출연진들이 이를 보며 놀리는 것은 방송의 묘미로 작용한다. 아빠가 딸의 사생활을 관찰하는 포맷이 정규 TV 방송으로 만들어지고, 딸의 이성 교제에 대한 아빠의 우려와 당혹감을 당연하다는 듯이 보여주는 것은 사회 내에서 이라는 존재가 가정에 어떻게 종속되는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흔히 딸에게는 가정 내에서 통용되는 몇 가지 규칙이 존재한다. 밤늦게 밖에 다닐 수 없고, 외박은 부모의 허락이 앞서야 한다. 몸이 많이 노출되는 옷은 허용되지 않을뿐더러 때때로 이성 교제는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많은 여성들은 다소 일반적으로 이를 당연하게 경험하는데, 이러한 구속이 대개 보호라는 말로 정당화되어왔기 때문이다. 지난 429KBS 2TV에서 방영한 고민 상담 프로그램 안녕하세요에서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해가 지는 때를 통금 시간으로 정하고, 친구들과의 여행도 금지하는 엄마가 답답하다는 딸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이는 다소 극단적인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지만, “남자친구와 여행 간 사실을 들킨 이후로 외박을 할 때마다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해야 했다”, “통금 시간을 넘겨 집에 갔더니 현관문 비밀번호가 바뀌어 버렸다”, “밤이 되면 빨리 집에 들어오라는 독촉 전화가 온다”, “달라붙는 옷을 입고 나가려다 부모님과 한바탕 싸웠다는 주변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을 보면 많은 여성들에게 그저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 딸은 딸다움이라는 태도를 강요받기도 한다. 이를테면 가정은 딸에게 정서적 친밀함과 순응적 태도를 강요하고 가사 노동을 전가한다. 흔히 넌 딸이 돼서 왜 아빠한테 애교가 없어”, “딸은 엄마의 친구래”, “딸은 얌전하고 착해서 키우기 편해”, “나중에 시집가려면 집안일을 잘해야지등의 말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딸에게 사회가 정한 여성성을 강요한다. 부모를 위한 감정 노동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아사쿠라 마유미, 노부타 사요코의 책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가 출판 이후 독자로부터 큰 공감을 얻은 것은 착한 딸 콤플렉스가 보통의 고민임을 잘 드러낸다.

 

딸에 대한 억압이 갖는 두 가지 문제

① – 억압이 갖는 여성 혐오

부모가 딸에게 행하는 억압은 여성 혐오의 일종이자 연장선이다. 부모는 딸의 행동과 태도를 통제하고 강요하며 결정권을 빼앗고 딸은 이로 인해 주체적 권리와 자유를 빼앗긴다. 이는 훈육이라는 이유로 합리화되지만 결국 딸을 주체성을 지닌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정의 소유물로 여기는 가부장제의 문제를 드러낸다. 이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한 여성 혐오가 나타난다. ‘성적 순수함수동성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이 고착화되는 것이다.

세상의 각종 위험을 언급하며 통금과 외박을 통제하고 이성 교제에 간섭한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 위험은 바로 딸의 순결이 빼앗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억압 속에는 딸의 성적 순수함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속내가 은밀하게 존재한다. 흔히 아들에게는 딸보다 자유의 범위가 훨씬 크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가정은 아들에게 조심할 것이 아니라 딸에게 조심할 것을 이르며 제약을 건다. 결국 딸의 성적 순결을 보호한다는 여성 혐오적 논리 아래 가정이 딸의 결정권과 지배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딸의 행동에 부모의 허락을 전제하며 수동성을 가르친다. 이는 자연스럽게 딸이 가정에 종속되게 만들며 동시에 가사 노동을 돕고 가족의 정서적 친구가 되어주는 여성적인 행동을 수행하도록 한다. 사회가 만들어낸 여성성이 딸에게 강요되면서 사회가 기대하는 가정에서의 아내’, ‘며느리’, ‘엄마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결국 딸에게 행한 억압은 여성 혐오의 산물이며 여성 혐오의 연장일 뿐이다.

 

- 억압이 행하는 폭력

이러한 억압이 심화되면 벗어나기 어려운 폭력이 된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명분과 부모 자식 간 위계질서로 인해 딸은 쉽사리 자신이 경험하는 억압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딸이 잘 순응하지 않았을 경우 물리적 제재가 돌아오는 경우도 많이 존재한다. 국내 넷플릭스 영화 <페르소나>에서는 딸의 몸에 키스마크가 새겨진 것을 본 아빠가 딸을 방에 감금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외에도 흔히 딸의 머리를 강제로 자르거나, 폰을 빼앗고 외출을 금지하며 협박을 하는 등의 제재 또한 결국 가정폭력의 일종이다.

이러한 물리적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복적인 억압과 강요는 딸의 행동과 태도의 위축을 경험하게 하며 나아가 트라우마로 심화되는 정서적 폭력이 되기도 한다. 이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모의 빗발친 전화와 쏟아지는 수십 개의 문자, 감시의 눈초리, 강한 실망감 등 기대를 충족하지 못해 돌아올 것들에 대해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적으로 행해지면 가정으로부터 독립을 한 후에도 스스로의 행동에 제약을 거는 학습된 행동을 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기도 한다.

뉴스에 등장하는 것만이 가정폭력의 전부가 아니다. 딸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예쁘고 착한 인형, 소유물로 보며 행동을 강제하는 것 또한 폭력이다. 여성 인권이 사회의 주요 논제가 된 이 시점에서도 가정 내 딸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아직 드물다. 그만큼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폭력이 너무나 일상화된 것은 아닐까.

 

유교적인 한국 사회에서 유독 딸이라는 존재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부모의 아낌과 애정이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사랑을 의미하는 그 두 단어를 해체해 볼 필요가 있다. 자꾸만 넌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가정 속에서 딸은 얼마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올바른 사랑의 방법일까? 딸을 키우는 부모라면, 혹은 부모와 함께 사는 딸이라면, 가정의 달을 맞이해 서로의 관계를 재조명할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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