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성인권 이슈/성명·논평

[가족 내 차별과 폭력에 대한 기획 기사] 미디어는 가정폭력을 어떻게 축소하는가

by kwhotline 2019. 6. 4.

[가족 내 차별과 폭력에 대한 기획 기사]


미디어는 가정폭력을 어떻게 축소하는가

민정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가정폭력은 자칫 사소해 보이는 행동부터 시작되어 점차 확대된다. 신체적 폭력뿐 아니라 정신적 폭력의 피해자 또한 상당하다. 하지만 가정폭력은 외부의 폭력에 비해 가해자나 사회, 심지어 피해자가 범죄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사망에 이르는 심각한 폭력이 아니면 그저 가정 내 사소한 갈등일 뿐이며, 한쪽이 참고 넘어가면 언젠가는 해결될 일로 치부하는 사회적 통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사회적 통념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미디어가 통념을 만들고,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조금씩 변화를 보이긴 했으나 2018~2019년에 방영된 인기 방송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한 결과 여전히 미디어는 가부장제를 조장하고 있다. 특히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비해 예능과 드라마는 가부장제로 인한 가정폭력에 예민하지 않고, 웃음이나 감동 등으로 심각성을 가리며 그 범위를 축소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 또한폭력이다

미디어는 가정폭력의 정도를 축소한다. 예전과 비교해서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다루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드라마 작품 수는 증가했다. 하지만 그 속의 폭력은 대다수가 뉴스에 나올 법한정도의 심각한 수준의 육체적 폭력이다. 술을 마시면 돌변해 깨진 소주병으로 폭행을 일삼거나, 욱하는 성격을 참지 못하고 뺨을 때리는 등, 가해자의 모습은 꽤나 전형적이다. 이런 모습은 다수의 시청자를 쉽게 분노하게 만든다. 그러나 단순히 물리적, 육체적 폭력만 가정폭력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취급하고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억압하는 것 자체가 정신적 폭력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신체적 폭력으로 이어지기 쉽다.

예능·드라마는 남성의 권위적인 태도를 하나의 캐릭터로 그린다. KBS 예능 프로그램 <살림하는 남자들2>의 고정 출연 부부 중 한 남편은 가부장적인 태도로 일관하지만, 이는 곧 프로그램의 대표 캐릭터가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는 아내에게 남편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딜이라며 화를 내거나 툭하면 밥 차려”, “물 좀 떠와등 명령조로 말하기 일쑤다. 자연스럽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아내와 이를 평가하는 남편의 모습은 곧 여성과 남성이 가정 내에서 동등한 관계가 아닌 위계적 서열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남편의 버럭을 단순히 예능 속의 재미 요소로 만들어 심각성을 가린다.

종편·케이블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JTBC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는 다양한 아내와 남편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중 로스쿨 교수로 나오는 차민혁은 아내와 아이들이 자신만의 교육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큰 소리를 내 집안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차민혁이 직접 만들어놓은 스터디룸이 아이들에게 공포의 공간이 되자 아내는 스터디룸을 개조한다. 이를 알게 된 차민혁은 가장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며 생활비 카드를 잘라버린다. 하버드에 간 줄 알았던 딸이 사실은 가족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딸의 뺨을 때리기까지 한다. 이렇게 차민혁은 가장의 말이 곧 법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대체적으로 코믹한 캐릭터로 표현되어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직접적으로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해 악인으로 그려졌던 극 중 다른 인물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두 프로그램 외에도 여전히 수많은 방송에서 가부장적인 남성의 모습을 당연시한다. 가정 내에서 가장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 주어진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미디어는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언어적 폭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도록 한다. 또한 시청자로 하여금 심각한 폭력의 원인이 되거나 가정폭력에 이미 해당하는 행위를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사소한 갈등 정도로 받아들이게 한다.

 

KBS 예능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살림하는 남자들2> 화면 갈무리.

 

가정폭력은 가족끼리 해결해야 할 사적 영역이 아니다

미디어는 가정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지우고 개인의 문제로 축소한다. 우리 사회는 가정폭력을 사적 영역으로 취급하고, 개인의 행동 변화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로 치부한다. 예능·드라마 속에서 피해자들이 가정폭력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폭력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가 되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10년째 꾸준히 화제가 되며 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KBS 예능 <안녕하세요>가 가정 내 폭력을 다루는 방식은 가정의 유지에 초점이 맞춰진 사회의 대응과 결이 비슷하다. <안녕하세요>에는 매주 고민을 가진 제보자가 출연하고, 당사자와 조언자가 함께 그 고민의 해결 방법에 대해 얘기해 본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다. 하지만 고민의 내용이 예능에서 다룰 법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장난삼아아내를 성희롱하는 남편이나 주사가 심각해 물건을 부수고 아내에게 폭언하는 남편을 고발하는 사연은 명백한 가정폭력이다. <안녕하세요>는 이런 사연을 웃음으로 소비해버리지는 않지만, 폭력을 구조적 문제가 아닌 나쁜 남편과 불쌍한 아내라는 개인적 문제로 바라본다. 패널들이 남편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는 것 이상의 개입은 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남편의 행동을 장난혹은 서투른 사랑의 표현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결국 남편은 반성하고 서로 이해하며 가족이 화목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는 안일하고 무책임한 결론에 다다른다.

시청률 20%가 넘었던 KBS 드라마 <왜그래 풍상씨> 역시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 남편이 행사하던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 캐릭터 이화상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해자인 유흥만에게로 돌아가려고 한다. 가족의 신고로 전 남편과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장면에서는 화상은 직접 흥만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고, ‘우리 둘이 알아서 할 수 있다며 명백한 범죄인 가정폭력을 사적 영역으로 축소한다. 극중 유흥만 캐릭터 설정이 누구보다 화상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고 과거의 상처까지 감싸준 사람이라는 점, 두 사람의 관계가 폭력 때문에 갈등을 빚긴 하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마음은 남아있는 사이로 설정한 것 또한 가정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 가정폭력 해결 방식을 보여준다. 큰 주목을 받았던 공영방송의 드라마가 가정폭력을 왜곡되게 묘사한다면 여성이 참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강화하기 쉽다.

두 프로그램에 대한 기사의 내용이나 시청자의 댓글 반응은 이런 문제를 잘 보여준다. <안녕하세요>의 사연은 기사에서 고구마 사연으로 소비되고, <왜그래 풍상씨>의 여성 캐릭터는 가정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구마 캐릭터라며 욕을 먹는다.

 

웃음과 재미로 뭉개버리기엔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든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웃자고 만든예능과 드라마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비해 많은 사람이 시청하며, 내용 또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우리나라 방송법에 따른 '방송 심의에 관한 규정' 30조는 성 평등에 관련된 규정으로, ‘성차별적인 표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가정폭력 등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는 내용을 방송하여서는 아니 된다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영국 공영방송 BBC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방송국 또한 제작 가이드라인에 성차별적 내용에 주의할 것을 명시한다. 미디어가 사회 전반적인 인식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방송의 주요 역할로 성 평등에 대한 올바른 인식 형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다른 범죄에 비해 가정폭력의 신고율과 기소율이 낮은 이유 중 하나는 피해자가 가정폭력을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수사기관이 가정폭력을 부부간 갈등 정도로 축소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인식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끊임없이 범죄가 반복된 것이다. 미디어는 더는 가정폭력을 방조하거나 그에 일조해서는 안 된다. 웃음으로, 감동으로 뭉개기에는 그 그림자가 너무 짙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