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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성명·논평

[가족 내 차별과 폭력에 대한 기획 기사]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와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 -

by kwhotline 2019. 6. 4.

[가족 내 차별과 폭력에 대한 기획 기사]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와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

이선재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정폭력을 떠올리라고 하면 보통 누군가를 때리고 짓밟는 물리적 폭력 이미지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폭력은 단순히 신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폭력도 포함한다. 가족 구성원이 나에게 지속적으로 퍼붓는 욕설과 심한 말도 폭력에 해당한다.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곤 하는 언어적 폭력도 폭력인 것이다. 폭력에 있어 사소한 것은 없다.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하는 미디어인 드라마와 영화에는 가정폭력이 극의 소재로 종종 등장한다. 이 때 연출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가정폭력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들로만 편집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될 수 있는 소재를 흥미 위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따라서 가정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미디어 속에 적절히 재현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최근 본 드라마와 영화 중 가정폭력을 소재로 하면서 보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는 작품들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보여주는 가정폭력의 공포

첫 번째 작품은 프랑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이다. 영화는 법원에서 판사와 이혼 조정을 하는 부부의 모습으로 시작되는데, 이 둘의 자녀들은 아버지 앙투안에게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판사가 말한 증거에 대해서 앙투안은 다 거짓말이라며 강하게 부정한다. 하지만 그 뒤의 장면들에서 드러나는 앙투안의 폭력적 행동을 통해 오히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내인 미리암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이사를 하고 전화번호도 바꾸지만 앙투안은 그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아들인 줄리앙인데, 판사의 조정 때문에 줄리앙은 격주로 주말에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줄리앙은 자신의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고 부르는 등 아버지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앙투안이 줄리앙한테 하는 짓을 보면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 영화는 가정폭력의 전형들을 단계별로 묘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윽박지르고 큰 소리로 화내기, 당장이라도 때릴 것처럼 협박하기 등 언어적 폭력이 주를 이루다가 마지막에는 물리적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폭력적 장면들 탓에 관객은 과연 이 가정폭력이 대체 어떤 결말을 맞을 것인지 마지막까지 예측할 수 없다.

가정폭력은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사적인 일로 취급되기 일쑤라 정말 누구 한 명 죽거나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해야 비로소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누구를 죽이는 극단적인 행동만이 폭력인 것은 아니다. 남편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내뱉는 폭언과 협박들, 아내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든다고 목을 조르려 하는 행동 등 정신적·물리적 폭력도 폭력이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가정이라는 내밀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층위의 폭력을 묘사함으로써 관객들이 피해자에게 감정 이입할 수 있게 하고, 폭력의 심각성을 깨닫게 한다. 특히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는 언어적 폭력 또한 당사자에게는 매우 공포스러운 경험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공권력의 부재이다. 경찰은 영화 내내 보이지도 않다가 영화의 결말이 파국으로 치닫고 나서야 겨우 등장한다. 그 전까지 발생한 폭력에 대해서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앙투안이 제대로 처벌되어 다시는 가족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될지도 미지수다. 줄리앙을 비롯한 가족들이 겪은 가정폭력은 트라우마로 남아 평생을 괴롭히게 될 수도 있다. 가정폭력이 남긴 기억과 상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 속 여성들의 연대

두 번째 작품은 미국 HBO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부촌을 배경으로,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를 둔 엄마인 매들린’, ‘제인’, ‘셀레스트가 주인공이다. 드라마는 학교 자선 모금 행사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그 이전의 사건들을 진행함으로써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추리하게 한다. 세 주인공은 각자 비밀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매들린은 남편 몰래 불륜을 저지른 적이 있고, 제인은 강간당해서 지금의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셀레스트는 가정폭력 피해자다. 그는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이며 자상한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겉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의처증을 가진 남편의 폭력에 매일같이 시달린다. 남편은 그녀가 자신에게서 달아날까 두렵다며 강압적으로 손목을 꽉 쥐고, 목을 조르고, 그녀의 몸을 내동댕이치며 폭력을 휘두른다. 유능한 변호사였던 그녀의 재능을 후려치는 가스라이팅은 덤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항상 강박적인 성관계로 끝난다.

사실 이 드라마가 폭력 장면을 윤리적으로 재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극적인 묘사 탓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정폭력 피해자가 느끼는 모순적인 심리(그래도 남편은 날 사랑해 vs 기회만 되면 남편을 떠날 거야)와 상처, 고발의 어려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 폭력을 해소하는 방식이 시사점을 던져준다. 셀레스트와 그의 여성 친구들은 연대를 통해 폭력에 대처한다. 사회가 만들어낸 여자의 적은 여자’(일명 여적여’) 프레임을 넘어서 여성들 간의 연대로 남성의 폭력에 맞서는 것이다. 물론 이 드라마가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왜 맞서지 않았냐며 질책하는 드라마는 아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남성 캐릭터들은 계속해서 여성 캐릭터들 간의 갈등 구도를 조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들과 다른 엄마들은 서로 갈등하기도 하지만 갈등을 봉합하고 화해하는 모습도 보여주며, 거기서 더 나아가 서로를 감싸며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간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특별하다.

 

미디어는 가정폭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영화와 드라마 등 미디어 매체가 중요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하고 그 내용이 부지불식 간에 의식 속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사회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복해서 접하는 내용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머릿속의 관념으로 형성된다. 가정폭력을 별 일 아닌 사소한 에피소드로만 그려내면 사람들은 가정폭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혹은 가정폭력을 물리적·신체적 폭력으로만 묘사하고 언어폭력은 사소한 다툼인 것처럼 포장해 언어폭력이 가정폭력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한다. 눈에 보이는 상처만이 상처인 것은 아니다. 가정폭력으로 인한 내면의 상처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폭력은 사랑으로 정당화될 수도 없다. 미디어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미디어 속에서의 가정폭력은 피해자에게 2차 가해하는 잔인한 포르노가 아니라, 별 거 아닌 가족 간 다툼처럼 그려지는 게 아니라, 성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다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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