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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후기·인터뷰

'모든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존중받는 날까지

by kwhotline 2018. 4. 25.


'모든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존중받는 날까지


2018 '성폭력전문상담원교육' 중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동성 간 성폭력상담 및 지원’


한국여성의전화 8기 기자단 소원


지난 3월 30일 오후 2시,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장에서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이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이루어졌다. 3월 15일부터 5월 4일까지 이루어지는 전체 교육 중 이번 순서는 '성소수자의 이해와 동성 간 성폭력 상담 요령'이라는 제목으로, '비온뒤무지개재단' 의 한채윤 상임이사가 진행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은 강연 한마디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도 하며 열심히 강연을 들었다. 나른한 봄날의 오후가 어느 때보다도 활기찬 배움의 장이 된 모습이었다. 





섹슈얼리티, 섹스, 젠더-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채윤 이사는 성소수자를 이해하기 위한 여러 가지 단어를 알려 주었다. 


먼저 '섹슈얼리티(Sexuality)'는 인간 성(性)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그중 타인에게 느끼는 정서적, 애정적, 육체적, 낭만적 끌림을 의미하는 '성적지향(Sexual orientation)'에 따라 섹슈얼리티를 분류해 본다면 ‘호모 섹슈얼리티(동성애)’, '헤테로 섹슈얼리티(이성애)', '바이 섹슈얼리티(양성애)', '에이섹슈얼리티(무성애)'등으로 나뉜다. 자신의 성적지향을 스스로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면 '성 정체성(Sexual Identity)'을 가질 수 있다. 


다음으로, ‘섹스(Sex)’는 널리 알려져 있듯 XX와 XY로 이루어진 생물학적 성을 일컫는 단어다. 그러나 한채윤 이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섹스도 사실은 젠더이며 인간에는 XX와 XY 외에 다른 염색체, 즉 '인터섹스'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단지 태어나자마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술을 받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젠더(Gender)'는 이미 사회적으로 정해진 성을 의미한다. 태어난 순간부터 주민등록번호 상으로 부여되는 성별을 '지정성별'이라 한다. 사람은 성장하며 자신의 성별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는 '성별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때 지정성별과 성별정체성이 일치하는 쪽을 '시스젠더', 일치하지 않는 쪽을 '트랜스젠더'라고 한다. 


성소수자를 이야기할 때, 관련 학문이 일찍부터 순차적으로 발달한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비교적 최근에 관련된 개념이 한꺼번에 들어왔기 때문에 용어나 범위의 혼란을 겪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보다도 인간을 남성과 여성 두 가지로 분류한 후 그 둘 사이의 성적 끌림과 종족 번식만을 긍정하는 '이성애주의'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현실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형태를 벗어난 사람들은 쉽게 배제되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누가 포함되느냐'가 아니라, '누구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가' 이며 그 과정에서 '누가 소외되느냐'이다.



말하지 못하는 피해자


앞에서 살펴봤다시피 우리나라는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회이다. 더불어 성폭력은 이성애자 남성이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여성에게 저지르는 범죄로 잘못 알려져 있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동성 간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는 이중으로 고통받는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동성 간 성폭력은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일 또는 일어나지 않는 일로 치부된다. 특히 남성 간 일어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더 입을 열기 힘들다. 동성 간 벌어진 일이므로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피해자가 스스로 남성성이 훼손되었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 간 성폭력은 페니스의 질 내 삽입이 없었으므로 성폭력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동성애와 에이즈에 대한 오해 역시 고통을 가중하는 원인이다. 한채윤 이사는 실제로 이성애자 남성이 피해자일 경우 피해 사실을 말하기에 앞서 에이즈의 감염 여부를 확인하려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 피해자가 힘들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다 해도 사람들은 쉽게 피해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자의 변명을 더 쉽게 믿는다. 이성애주의를 바탕으로 본다면 동성에게 성폭력을 휘두르는 것보다 ‘친해지려고, 장난으로 그랬다’라는 가해자의 말이 더 정상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학교나 군대와 같이 좁고 폐쇄적인 집단일수록 가해자의 변명은 사람들에게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피해자가 동성애자 또는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소수자일 경우 성 정체성과 성별 정체성이 약점이 된다. 실제 동성 간 성폭력의 가해자는 이성애자 남성인 경우가 많음에도 동성애를 변태적이고 비정상적인 성행위로 여겨 동성애와 동성 간 성폭력을 동일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피해자는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해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런 이유로 피해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채윤 이사는 이에 대해 “실제로 피해자가 커밍아웃한 상대가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라며 구체적인 사례를 예로 들었다. 



모든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존중받아야 한다


어떤 행위가 법률상 범죄로 인정되는 까닭은 그 행위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과거 법에 따르면 성폭력은 정조권을 침해하는 범죄였다. 이 때문에 피해자가 '부녀자'에 한정되어 있었고 이를 벗어난 형태는 성폭력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법이 성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에 일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2013년에 성폭력방지법이 개정되면서 성폭력은 정조에 관한 죄가 아닌 강간과 추행에 관한 죄로 바뀌었다. 부녀자로 한정되던 피해자 역시 '사람'으로 수정되었다. 이는 성폭력이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라고 최소한 법적으로는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법률이 바뀌었다고 사람들의 인식이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느리게 변하므로 아직 갈 길이 멀다. 한채윤 이사는 “성폭력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확보할 수 있을 때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개선되어야 하는 인식 몇 가지를 소개했다. 


가장 먼저 성범죄는 성욕의 문제가 아니라 ‘성을 이용한 범죄’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성’이 아니라 ‘폭력’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성범죄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이성애자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르는 범죄’가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지르는 범죄’이므로 성 정체성과 관련 없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동성 간 성폭력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는 게 우선이다. 동성애와 동성 간 성폭력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며 개인의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은 존중받아야 한다. 더불어 현재는 가해자의 핑곗거리로 이용되는 '합의'에 대한 감수성과 범위를 넓히는 등 성문화 전반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이 개선될 때 비로소 더 많은 피해자들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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