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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후기·인터뷰

법은 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할 수 있을까?

by kwhotline 2018. 4. 25.


법은 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할 수 있을까?

-성폭력 수사에 대한 경찰 수사절차의 이해-



한국여성의전화 8기 기자단 리사



지난 3월 30일 한국여성의전화에서 2018 성폭력전문상담원교육 수강생 40여명을 대상으로 한 박미혜 서울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과 경감의 ‘성폭력 수사에 대한 경찰 수사 절차의 이해’ 강연이 열렸다. 박미혜 경감은 활동가들과 수사관이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설명하면서 범죄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많은 질문이 불가피하지만 수사의 전 과정에 걸쳐 피해자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강조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질문들


“피해자의 진술은 성폭력 사건의 70퍼센트를 차지합니다.” 박미혜 경감의 말처럼 확실한 물적 증거가 발견되기 어려운 성범죄의 특성상, 범죄 혐의를 밝혀내는 모든 수사 과정은 합의한 관계였다고 말하는 가해자와 강압이 있었다고 말하는 피해자의 서사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구의 서사가 더 신빙성이 있는지 겨루는 이 전쟁에서 안타깝게도 법은 여성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확률이 높다. 우리는 흔히 “법대로 해!”를 외치고 법원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것이라 믿지만, 법원이 말하는 ‘객관’이란 ‘비장애인 이성애자 성인 남성의 주관’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남성의 언어로 쓰인 법은 강간이 성립되기 매우 어렵도록 고안되었다. 그래서 법적 싸움을 하기로 결심한 피해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답해야만 한다.


왜 거부하지 못했어?

왜 도망가지 않았어?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어?

왜 가해자에게 다시 연락 했어?

왜 이렇게 늦게 신고했어?


 수사관은 사건의 모든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듯 보인다. 이 일은 네가 거부하지 않아서, 도망가지 않아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서, 가해자에게 다시 연락해서, 늦게 신고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명백한 2차 가해에 해당하는 이 질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박미혜 경감이 설명한 것처럼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꼭 입증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강간’과 법이 말하는 ‘강간죄’ 사이의 거리


 현재 대한민국 법원은 피해자가 ‘현저히 항거 불능한 상태’에서 최협의에 해당하는 ‘폭행과 협박’이 수반된 성관계가 있었을 때에 강간죄를 인정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와 법률의 시각 차이는 여기서 가장 크게 두드러진다. 사회적으로 성폭력의 범주가 점차 확장되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 「형법」 297조에 규정되어 있는 강간죄의 경우 2012년에 죄의 객체가 ‘부녀’에서 ‘사람’으로 변경된 것을 제외하곤 1953년 제정 이래로 개정된 바가 거의 없다. 또한 피해자가 ‘현저히 항거 불능한 상태’에서 ‘최협의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대법원의 태도도 1970년대 이후 명시적인 변화가 없는 실태이다. 그래서 법은 끊임없이 피해자에게 ‘왜?’냐는 질문을 쏟아 붓고 피해자는 피해자답게 흠 없는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이러한 법체계는 성범죄 신고율을 매우 낮게 유지시킴으로서 사회의 ‘강간 문화(Rape Culture)’[각주:1]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2차 피해 방지하는 “강간 피해자 보호 법(Rape Shield Law)”


 미국의 경우, 페미니스트들의 입법운동 결과로 1980년에 이르러 48개 주 모두에서 통과되었던 “강간 피해자 보호법 (Rape Shield Law)”에 의하여 피해자의 성적 평판, 성관계 경험, 당시 입었던 복장 등을 증거로 사용되는 것이 엄격하게 제한된다. 만약 위와 같은 증거를 제시하려면 성관계의 동의 여부를 입증하는 데에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법원이 판단하고 허가를 해야 가능하다. 흔히 가해자들이 펼치는 “그녀도 그걸 원했다(She was asking for it)”는 주장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한 종류인 “강간 피해자 보호법(Rape Shield Law)”은 페미니즘 제 2 물결 이후, 미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시행 되고 있다.


“No means No”에서 “Yes means Yes”로


 이렇게 남성의 언어로 쓰인 법률을 여성의 언어로 가져오는 작업은 현재에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캐나다는 합의 하에 성관계를 했다는 입증 책임이 피고인에게 있다. 온타리오주 법원은 (R. v. Ururyar, 2016 ONCJ 448) 피해여성이 성적으로 개방된 사람이었고, 스스로 피고인의 집에 따라 들어갔으며, 피고와 데이트 관계에 있었으며, 술을 마셔 기억이 불완전함과 상관없이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의 행동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적극적인 합의’가 부재한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로 강간죄 성립을 긍정한 것이다. 이 판결과 비슷한 맥락으로 만들어진 캘리포니아 주의 “Yes means Yes” 법안은 주지사 제리 브라운이 서명했으며 시행을 앞두고 있다. No를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Yes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이 법안의 요지이다.


몰아치는 #MeToo 해일, 아직도 꼬막 줍고 있는 한국


 이렇게 최근 급변하는 각 국의 법 동향에도 한국은 ‘흠 없는 피해자 프레임’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장치가 전무하다. 경찰 내부에서 성폭력 피해자 인권보호를 위한 지침이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지침에 그칠 뿐, 강제규정으로서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전담조사관 제도, 국선변호사, 진술조력인 제도가 신설된 것은 고무적이나, 법적 다툼에서 발생하는 2차 가해를 차단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심지어 법원이 ‘폭행+협박+사력을 다한 저항’을 요구하는 현 상황에서 성인지적 관점을 지닌 수사관이라도 피해자의 책임 여부를 물을 수밖에 없다. #Metoo로 모아진 성폭력 생존자들의 거대한 용기와 연대를 지지할 법적 기반은 매우 열악하다. 박미혜 경감은 피해자에 대한 지지를 거듭 강조했으나, 사실상 구조가 엉망인 상황에서 단지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지지하는 경찰 개인, 검사 개인, 판사 개인이 나타나주길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요원할 뿐이다.



성폭력 피해자는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물론 강간 문화 깨기는 하루아침에 일궈지지 않으며 여성들의 지난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1998년 7월 3일은 제인 도(Jane Doe 가명)가 토론토 경찰 당국을 제소하여 손해배상액 50만 달러의 지급 명령 결정을 받은 날이다. 이 사건은 강간 신화에 입각한 경찰 수사에 경종을 울렸다. 1986년 자신의 거주지 안에서 강간 피해자가 된 제인 도는 같은 범인이 이웃의 여성 4명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범행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경찰은 5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제인을 조롱하기 까지 한다. 그래서 “캐나다 인권 헌장(Canadian Charter of Rights and Freedom)”에 근거하여 경찰 당국이 ‘개인의 안전을 보장 받을 권리(Rights to security of the person)’ 침해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법원은 토론토 경찰이 그녀 이전에 4명의 피해 여성의 사건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강한 선입견 때문에 피해자를 의심하느라 범인 검거를 지연시킨 사실을 인정했고 경찰은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제는 신고를 늦게 한 이유를 피해자에게 질문할 것이 아니라, 그 이유가 수사 과정에 있음을 인식하고 다시 되물어야 할 때이다. ‘강간 신화(Rape Myth)’[각주:2]에 근거한 법의 태도는 경찰 내사부터 공판에 이르는 모든 법적 절차를 2차 피해가 되게끔 만들고 있다. 별안간 낯선 사람에게 납치되어 흉기로 위협받고 강간당하는 포르노적 강간만이 진짜 강간이라는 그릇된 신화에서, 착하고 가장 믿을 만한 강간 피해자는 이미 사망한 피해자가 된다. 우리는 피해자다운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지지받을 수 있는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참고문헌>


논문

Catharine A. Mackinnon(1989), 「Rape: On Coercion And Consent」, Toward a Feminst Theory of the State, Havard University Press

Joan L. Brown(1988), 「Blaming the Victims: The admissibility of Sexual History In Homicides」, Fordham Urban Law Journal


판결문

Doe v. Metropolitan Toronto (Municipality) Commissioners of Police, 1998 CanLII 14826 (ON SC)

R. v. Ururyar, 2016 ONCJ 448 (CanLII)


기타

Marshall University Women’s Center, “Rape Culture”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Relationship & Sexual Violence Prevention Center, “Rape Myth and Facts”




  1.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정당화하고 용인하는 문화를 일컫는다. 강간문화는 여성혐오적 표현, 성적 대상화, 성폭력의 미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Marshall University Women’s Center, “Rape Culture” [본문으로]
  2. ‘강간 신화(Rape Myth)’는 다음과 같다.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다면 진짜 강간이 아니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피해자가 모르는 낯선 사람이다. 강간은 범죄자의 통제불가능한 성욕 때문에 일어난다. 범죄자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거나 정신 이상자이다. 피해자가 먼저 유혹했거나 술에 취해서, 혹은 술에 취한 듯한 행동을 해서 성관계를 요구했을 것이다.("She was asking for it") Relationship & Sexual Violence Prevention Center, “Rape Myth and Facts”, Washington University in St.Loui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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