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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후기·인터뷰

사소하지 않은 제보

by kwhotline 2016. 11. 1.

사소하지 않은 제보

 

Rebecca 제주중앙여자고등학교



 어느 날, 중년 남자 영어선생님이 수업을 하다 “기가 세고 생활력이 강한 여성들 때문에 이혼율이 올라간다. 여러분이 반성해야 하지 않겠냐.” 라는 말을 툭 던졌다. 맨 앞자리에서 약간은 졸면서 수업을 듣고 있던 나는 잠이 확 달아났고 남은 수업을 내낸 답답한 기분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3년째 여자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쏟아지는 온갖 차별을 견뎌내야 했던 일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우리는 바지와 스커트 중 교복을 선택할 수 있지만 바지를 입기 위해서는 의사의 소견서를 가져와야 하고 ‘가사 일을 많이 하는 아내가 좋은 아내이다. 여러분도 좋은 아내가 되어야 한다.’ 라는 말을 수업 시간에 여담으로 듣는다. ‘여자가 못생기면 답이 없다.’ 라는 말을 듣고, ‘오빠 차 뭐예요?’ 라는 말로 여성을 희화화하더라도 참아야 한다. ‘여자애들은~’ 으로 시작하는 말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서 이미 그 내용이 예측 가능하다. 여자가 남자보다 정신력이 약하다, 잘 운다, 주변 환경에 너무 휘둘린다, 와 같은 내용이다. 그러고 보면, 초등학생 시절 찬반토론 수업의 주제는 ‘여학생이 짧은 바지를 입고 다녀도 되는가.’ 였다.


 그러고 보면 그 모든 일들은 ‘사소함’ 이라는 이름하에 허락되고 있었다. 피해자의 항의는 예민함 정도로 치부되었고 모든 가해는 언제나 별 생각 없이 뱉은 말들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에 누군가는 언제나 상처받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nothing’을 ‘어떤 일something’ 로 바꿔보자고. 그렇게 나는 친구 몇 명과 함께 한국여성의전화의 도움을 받아 학교에서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캠페인을 시작했다.


우리는 <사소하지 않은 제보> 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이 학교에서 겪은 여성차별 사례를 익명으로 제보하면 학교 측에 이를 전달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그러나 제보함을 설치한 지 하루 만에 제보함은 학교 측으로부터 철거되었고, 나는 그대로 교무부장 선생님에게 불려가 긴 면담을 나누었다. 학교 측에서는 이 캠페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학생들이 실제로 여성 차별적 발언을 들었을 때 직접 항의할 수도 있고 학생회를 통해 건의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그런 제보함이 필요하겠냐는 입장과, 그런 제보함이 있으면 선생님들이 평소 자신의 발언에 있어 위축될 수 있지 않겠냐는 입장이 학교 측의 주장이었다. 여러 이유를 들어 캠페인의 정당성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학교의 허가를 받지 않은 무단게시물이라는 명목으로 제보함은 철거되었다.



 우리가 진행하는 캠페인이 학교 입장에서는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느껴졌던 걸까. 사실 우리가 바란 것은 어떤 반항도 혁명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견뎌야만 했던 각종 차별들을 이제는 견디고 싶지 않았고,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영어선생님에게 사과를 요구한 지 한 달 만에 내게 돌아온 사과가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으로 시작해서 ‘예민한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로 끝나는 게 싫었고, 남자고등학교와 함께 퀴즈쇼 촬영이라도 하면 사회자가 남학교 학생에게 ‘이렇게 꽃밭에서 촬영을 진행하니 기분이 어떤가요?’ 라고 묻는 게 인터뷰의 당연한 수순이라는 사실이 싫었고, 성희롱 예방교육에서 데이트강간 예방법으로 더치페이를 가르친다는 게 싫었다. 그리고 생활기록부라는 -당장 대입 문제가 달린-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는 선생님들 앞에서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싫었을 뿐이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나의 소망은 그렇게 너무도 쉽게 무시되었고 우리의 첫 번째 캠페인은 그렇게 끝났다. 


 비록 캠페인은 그렇게 끝났지만, 참 다행스럽게도 많은 것이 변했다. 캠페인에 관련해 개인 sns에 올렸던 글은 칼럼화되어 언론매체에 실릴 기회를 얻었고, 많은 사람들이 캠페인에 응원을 보내주었다. 선생님들은 여성차별적 발언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조심했다. 학생들의 인식도 많이 변화했다. ‘왜 그게 잘못이야?’ 라는 친구에게 왜 그것이 잘못인지 설명했을 때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많아졌고, 무엇보다도 ‘왜 그게 잘못인지’ 묻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그것만으로도 참 많은 것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캠페인은, 폭력의 순간들을 이제는 당당히 말해도 괜찮다는 인식을 가지게 하는 일종의 도화선이었다. 당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해도 된다고, 당신의 불편함은 결코 예민함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런 언어가 바로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였다. 그렇지 않았던 날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내게 ‘예민하게 왜 그러냐’, ‘너 때문에 수업 분위기 나빠지면 책임질거냐’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함께 선생님의 사과를 기다려 주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연대의 감정이었고 더 나은 학교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나의 문제를 예민함 정도로 치부해 버리지 않는 환경에서, 비로소 나는 나의 권리를 끝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그 믿음 덕분에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여전히 교육현장에서 여학생들의 인권은 쉽게 무시된다. ‘남학교에서 몇 년간 열심히 일한 뒤 여학교로 옮겨 와 쉬어가며 일한다.’ 라는 의식은 아직도 선생님들 사이에서 팽배하고 페미니즘은 사교성 없고 정 없는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선생님도 계신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벽장 속에 숨어있지 않아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권리이기 때문에, 또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나와 당신은 사소했던 그 순간들을 이야기해나갈 것이다. 더 이상 누구도 여자라는 이유로 상처받지 않도록, 당신이 겪은 그 일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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