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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후기·인터뷰

2년 8개월, 정의를 위해 모두가 함께한 시간

by kwhotline 2016. 11. 1.


2년 8개월, 정의를 위해 모두가 함께한 시간


차진숙 한국여성의전화 회원




사람은 안 좋은 기억을 잊어버리려 하는 습성이 있다. 신이 준 선물 중에 망각이라는 것을 인간에게 준 이유가 어떻게든 잊고 살아가라는 뜻인가 보다. 잊고 싶었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 생각했다가는 머리가 돌아버리는가,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 2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를 옭매어 왔다.


2013년 6월 청천벽력 같은 전화를 받으며 내 인생의 덫이 시작되었다. "내일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오십시오." 라는 싸늘한 목소리의 검찰청 수사관의 연락을 받았다.


"영장실질심사라니……." 그동안 심심찮게 뉴스나 텔레비전에서만 듣던 그 일이 내게도 터진 것이다. 살아오는 동안 검찰청 근처에도 가본 적도 없고, 더군다나 법원은 구경도 못 해왔던 나였다. 익히 들어는 왔던 터라 인생에서 엄청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온몸이 느꼈는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눈물만 하염없이 나오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도저히 암담하기만 했다.


"그저 진실만을 그대로 말하면 되겠지."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여태껏 경찰서와 검찰청에서 그렇게 진실을 말했건만. 어떻게 더 진실을 말해야만 하는가? 내 속을 뒤집어 까내어 보여줘야 하는 건가? 까내어 보여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가족들은 이 엄청난 일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자칫 억울하게 만의 한에 구속이라도 된다면. 내가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법원 옥상에 올라가서 투신자살하고 내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진실은 밝히고 죽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크게 호흡을 했다. 이 전쟁. 내가 겪고 헤쳐 나가고, 꼭 이겨야겠다는 마음으로 나를 달랬다.


강해져야 한다. 질 수 없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 죽을 수는 없다. 죽는다고 누가 내 진실을 알아주고 불쌍하다고 여길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싸워야 하는 싸움이라는 생각이 나를 세웠다. 그래도. 너무나 무섭고 힘이 들었다.


그렇게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유치장에서 10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온 나를 본 가족들은 나를 끌어안고 눈이 뻘게진 것도 잊은 채 펑펑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너무나 서럽고 너무나 억울했다. 그때만 해도 이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지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2013년 7월부터 더 지옥 같은 전쟁이 시작되었다. 법정에 공판검사뿐 아니라 수사검사까지 나와 재판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살인사건도 아니고 국가 사범도 아니고 검사가 2명이나 나와 재판을 하다니. 가해자와 그 지인들은 앞다투어 나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일면식도 없는 가해자의 아내 되는 여자는 재판정에 나와 아주 당당하고 거센 목소리로 "저는 저 여자가 접대부인 줄 알았다니까요. 술 먹으면 아주 개가 된다고 하더라고요."라면서 나를 흘깃 보면서, 목청을 높였고. 가해자는 "저 여자가 아주 잘 짜인 시나리오로 사기를 친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화려한 옷차림에 진한 화장을 하고 마치 꽃놀이라도 나온 마냥 웃으면서 법정을 들어왔다. 그런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나는 이리도 초라하게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힘들게 재판정에서 죄인처럼 앉아 있어야 하는데 잘못한 가해자는 저리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큰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가 이런 꼴을 대체, 이 모욕감을 대체 언제까지 보고 느끼고 있어야 하는 건가?


재판을 받으면서 증인으로 나온 그들을 보면서 내 마음은 더 병들어갔다. 사람을 믿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착한 마음은 양심 없는 사람들의 배신으로 치를 떨어야만 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마치 전쟁터에 나온 아무 무기도 갖고 있지 않은 외로운 전사 같았다. 


1심의 무죄가 선고되기까지는 거의 폐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살은 빠지기 시작했고. 머리카락은 매일 한 줌씩 빠졌다. 밥을 먹을 수도 없었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고, 아니 죽고 싶은 생각이 매일 머리를 스쳤다. 그래도 내가 살아가야 할 희망을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이런 글들을 적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억울하고 비참했던 이 시기에 여성의전화를 만났다는 것이다. 여성의전화의 활동가 선생님들은 매번 내 재판에 나와서 나를 지원해주시고 응원해 주었다. 그때마다 순간순간 죽고 싶었던 내 마음은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다. 


죽는 게 아니라. 죽을 정도로 싸우자. 꼭 진실을 밝히자! 내 운명이라고 받아들이자!!



"세상에 나보다 더 억울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하늘을 원망했던 내가. 차라리 내가 이런 일을 겪게 되고. 이걸 이길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 하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용기가 생겼다. 무기 없는 힘없는 전사에서 칼도 생기고 총도 생기고 대포도 생겼다. 내 든든한 지원병들이 생긴 것이다. 결코, 혼자 싸우는 싸움이 아닌 정의를 위한 모두의 뭉침이었다.


2016년 8월 31일. 드디어 대법원 무죄확정판결이 결정되었다. 1심 무죄. 2심 무죄. 3심 검사의 상고 기각으로 역시 무죄가 되었다. 기쁜 것도 잠시. 허탈했다. 내가 이긴 것이 아니라, 고작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빙빙 돌아서 2년 8개월이나 걸렸다.


그동안 흘린 눈물이 내 평생 흘린 눈물보다 더 많았다. 지금도 이 글을 쓰는데도 눈물이 하염없이 나온다. 그놈의 눈물은 아무리 닦고 울지 않으려 노력해도. 마르지도 않고 나오고 또 나온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하고, 가해자는 불기소 처분, 그리고 그 피해자는 무고죄로 기소가 되어 2년이 넘는 시간을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 그 시간 동안 피해자는 피의자로, 또 피고인이 되어야만 했다. 다행히 내 진실을 알아준 판사님 덕에 나는 피고인에서 일반인으로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 사람의 죄를 물어 가두거나 벌하여주기로 한다면 엄격한 조사와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저 실수나 잘못된 판단이라고 여기기에는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이 너무나 큰 피해와 고통을 겪는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한사람이 억울하게 인생을 버릴 수도 있었다.


"칼을 휘두른 자는 망나니가 아닌 진정한 무사가 되어야 한다,"


칼을 가진 자가 너무나 쉽게 칼집에서 칼을 빼 마구 휘저어서 되겠는가 말이다. 그 칼은 사람을 마구잡이로 내리치는 망나니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위한 무사가 되라고 쥐여준 것이 아니던가.


이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한다. 잊으려고 너무 애쓰지도 않을 것이고. 너무 힘들어도 하지 않으려 한다. 앞으로 남은 삶을 멋지게 살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강해지려고 한다. 그렇게 나를 다시 세워준 한국여성의전화에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함께 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보답을 하는 것은 내가 더 강인하게 잘사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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