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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여성과 전쟁, 반복되는 역사②] 애국주의와 기지촌

by kwhotline 2016. 8. 29.




  역사에는 전쟁이 있었고, 전쟁에는 여성이 있었다. 여성의 몸은 강력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가부장제와 결합하며 ‘전리품’ 또는 ‘성노예’의 형태로 활용되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성노예’나 베트남전쟁의 ‘성노예’, 한국전쟁 이후의 ‘양공주’, 그리고 기지촌의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섹슈얼리티의 결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민족주의적 질서 속에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들이 강제든 아니든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민족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에서, 여성의 고결함과 정숙은 민족주의적 자부심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여성과 전쟁, 반복되는 역사②

애국주의와 기지촌


김채영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1992년 10월 28일 동두천에서 윤금이라 불린 미군 상대 성 판매 여성이 미국인 케네스 마클에 의해 살해되었다. 전국의 사회운동단체들은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정부의 철저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1994년 마클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 사건은 ‘민족적 수치’로 여겨졌던 기지촌 성 판매 여성의 죽음에 온 국민이 분노했다는 점에서 인권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라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비판의 초점이 한미관계에 맞추어져 정작 기지촌 성 판매 여성의 현실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2014년 6월 25일 살아있는 전직 기지촌 위안부 122명이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국가가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했음에도 기지촌을 특정 지역으로 지정하여 성매매를 조장하였고, 성병 검진과 치료를 강요하였으며 ‘애국교육’까지 실시하였다고 밝혔다. 여과 없이 증언되고 있는 당시 정부의 기지촌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은 전쟁 속에서 여성의 몸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국가가 이를 어떻게 활용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안보와 달러를 가져온 애국자들


한국 전쟁 이후, 휴전 상태에 들어섰지만 사실상 전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는 주한미군의 군사력에 의지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이들을 위해 군산 아메리카 타운을 건설하고 매매춘을 만드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거기에 닉슨독트린으로 일부 주한미군이 철수를 단행하자, 박정희 정부는 추가 철수를 막기 위해 대대적인 기지촌 정비를 공식적으로 실시하였다. 전장의 병사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되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기 위해 안전한 성을 공급한다는 기지촌 정화운동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깨끗한 성’을 보급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매주 강제로 성병 검진을 하였다.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면 견디기 고통스러운 페니실린 주사를 맞고 3.4일간 ‘몽키하우스’라고 불린 보건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의정부 기지촌 성매매에 종사했던 여성은 ‘페니실린을 맞으면 한쪽 다리가 찢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고 거의 걸을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검사결과가 어떻게든 음성으로 나오길 바라면서 약국에서 항생제 주사약을 구입하여 스스로 주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페니실린 과다투여로 쇼크사하는 여성들이 속출했지만, 정작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보건사회부의 기록에 따르면 1956년부터 1957년 총 성병 검진횟수 43만~49만 중 경기도가 반에 해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경기도의 기지촌을 제외하면 대부분 내국인 상대 성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었다. 미군의 수는 한국 남성 인구의 1%에 불과했음에도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에 대한 성병 검진이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기지촌 여성들은 또한 마지막 검진일이 표기된 검진 카드를 소지하고 다녀야 했는데, 단속되었을 때 카드가 없으면 보건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공무원들은 그녀들에게 “애국하는 것이니 자랑스러워하라”라고 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기지촌을 미군 주둔을 위한 수단으로뿐 아니라 외화를 벌어올 기회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지촌의 경제 위력은 대단했는데, 1964년 외화수입 1억 달러 중 미군 전용 홀에서 벌어들인 돈은 970만 달러에 달했다. 그들은 ‘원자재 없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전사’였지만, 포주의 빚에 시달리고, 마약에 빠지고, 폭력에 시달렸다.


섹스동맹과 국가포주제


군대가 있는 곳에는 매매춘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지촌은 부도덕한 여성과 미군 병사 사이의 사적인 거래가 아닌, 한미 양국의 긴밀한 협력의 산물이었다. 병사들의 안전한 섹스와 스트레스 해소를 원한 미국과 주한미군의 주둔과 외화벌이를 원했던 한국 정부가 기지촌 정화 운동을 펼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의 본질에는 섹스동맹이 있었으며, 이는 국가 포주제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미군기지의 기지촌은 평택과 군산에만 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기지촌 여성들이 담보하는 국가안보에 의지하고 그들이 번 돈에 기생하였기에, 나라 전체가 기지촌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었다. 여성들은 단순히 성욕 해소의 수단을 넘어, 국가 간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자본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흔히 전시체제에서 여성은 소녀, 어머니, 창녀라는 이미지로 묘사되지만, 이 ‘창녀’는 타락한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적으로 생산된 여성이었다. 기지촌은 전시체제에서 여성이 국가와 민족에 의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후 한국문학에서 기지촌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성 서술자들에 의해 ‘우리와 이질적인 미군들만을 상대하는, 성적으로 문란한 노동 계급’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을 기지촌으로 이끈 것은 전쟁으로 인한 빈곤과 더 나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 남동생과 달러와 안보를 확보해야 하는 국가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기지촌의 여성들은 오늘날까지 페니실린과 마약으로 인한 부작용에 시달리면서, 부도덕하고 문란한 ‘양공주’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재작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122명 중 한 명인 만수화(가명) 씨는 코리아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도 가끔 잘 모르겠어요. 무엇을 위해서 왜 살았는가, 이런 거요. 그냥 참으면서 세월이 흘러간 거죠. 꿈이나 목적, 이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 가장 크게 잃은 건 시간 같아요. 그 시간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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