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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출발의 선언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by kwhotline 2016. 2. 25.

출발의 선언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박수진| <한겨레21> 취재팀 기자 jin21@hani.co.kr

 




사진출처: 대구대신문



출발의 선언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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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한 심각한 오독이 불러온 분노에서 시작해 

자기성찰과 고백으로 이어지며 끊이지 않고 있는

해시태그 페미니스트 운동





트위터 상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문장 앞에 샤프(#) 기호를 달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선언하는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된 건 지난 210일이었다.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벌어진 뒤 트위터상에서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 억압을 둘러싼 날선 싸움이 있은 뒤였다.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씨가 한 패션지에 쓴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칼럼도 선언의 계기가 됐다.

 

특이한 점은, 이 온라인상의 선언이 한 달이 지나도록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논쟁의 시작 무렵에는 선언 당사자들의 자기고백이 이어졌다.



우리 엄마, 엄마의 엄마가 반복했던 아들 타령의 못난 마음을 나 역시 극복하지 못하고 여덟 달 동안 가져야 했던 것을 반성한다. 나는 장손 며느리다. 그리고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_rev), 재작년 여성학 수업 때 교수님께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셨을 때 침묵했던 것이 부끄럽고 죄송해서, 지금이라도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hatter) 같은 반성은 물론, 어머니는 여아를 임신했다고 강제로 낙태당한 적이 있었다. 나는 성별 때문에 친가에서 완전히 배제당하며 자랐고 지금껏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깔아뭉개려는 별별 헛소리를 다 들어왔지만 여전히 여성임이 자랑스럽고 긍지를 꺾지 않을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s) 같은 젠더사이드’(성별에 따른 낙태)에 대한 고백이 타임라인을 뒤덮었다.

 

해시태그 페미니스트 선언이 처음 있은 때부터 적극적으로 해시태그를 달아온 요리작가 차유진씨는 이런 자기고백들을 보고 집단 심리상담 현장에 앉아있는 것 같은 뭉클함, 치유의 효과를 느꼈다고 말했다. 고백은 내가 사랑하고 교유하는 남자들에게 무의식적 의존이나 피해의식 없이 자유롭고 따스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여성임을 자각하여 부당함은 거부하도록 노력하고 억지로 남성성을 익히지도 말자고 생각한 순간이었습니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lakim) 같은 깊은 성찰로도 이어졌다.

 

기본소득청년네트워크(기청넷) 운영위원이자 대학원생인 희원(28)씨는 트위터에서 자주 봐왔던 공격적 논쟁들은 보통 소모적으로 서로 상처받으며 끝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페미니스트 운동이라는 생산적 움직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선언이 큰 운동은 아니지만 개개인에게 시작점이 될 수 있어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작점이 될 수 있어 뜻깊은


이런 온라인상의 선언들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졌다. 기청넷은 희원씨 등 회원들의 제안으로 38일 여성의 날에 기본소득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해시태그를 결합한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버지니아 울프가 쓴 <자기만의 방> 문구도 책갈피로 만들었다. 기본소득과 여성주의가 만난 셈이다. 이를 전후해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민우회, 여성주의 저널 <일다> 등에 대한 후원이 늘었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 <페미니스트에게 듣다> 상영회를 열었고, 차유진씨는 자신이 일하는 요리공간 네타스키친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열고 영화상영회, 누구나 쉽게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는 자율학습 키트 제작 등을 기획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것은 선언만이 아니다. 선언을 둘러싼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시선과 말들도 계속되고 있다. “해시태그를 단다고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라며 선언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해시태그 페미니스트들이 해시태그를 달지 않는 트위터 이용자들에게 왜 달지 않냐고 질문하는 방식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다. “해시태그를 패션처럼 유행으로 소비한다는 비판도 있다.

 

트위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해시태그를 단 사람들은 다양한 결의 개인이다. 이들을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왜 지금 이 선언을 했을까. 이들의 선언에는 이슬람국가(IS)가 촉발한 논란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 성찰과 고백이 있었다. 선언 뒤에는 적어도 온라인상에서 마주치는 삐딱하고 불편한 시선들을 견뎌야 했다. 이들이 그럼에도 불편을 감내하고 적극성을 띤 이유는 뭘까.

 

병역거부자 전박길수(32)씨는 2006년 여성주의 학회에 들어가서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남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육아, 명절 가사노동 등의 관습적으로 짐 지워진 여성의 억압을 내 것처럼 느낀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감히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선언이 이루어진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해시태그를 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해시태그 선언 운동의 맥락은 내가 페미니스트야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페미니스트가 낙인처럼 여겨지고 김태훈씨의 칼럼에서 나타나듯 페미니즘에 대한 오독이 심각한 상황에서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즘을 긍정하는 차원이다라고 선언의 이유를 말했다.

 


생산적인 공격이 가능할 것이다


38일 세계 여성의 날에 여성은 노동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사적 영역이라고 딱지를 붙여서 부불(不拂)노동으로 만들어온 가사노동, 감정노동, 성노동에 종사하고 있을 때에도, 당연히 우리는 노동자입니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트윗을 통해 선언에 동참한 손희정 </성이론> 편집위원은 지난 10년 동안 페미니즘 운동이 점차 그 에너지를 잃어왔는데, ‘페미니즘 운동을 되살려야 한다는 에너지가 트위터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것으로 보이고 그에 동참함으로써 페미니즘에 대한 토론의 장을 넓히고 싶었다고 말했다.

 

손 편집위원이 트위터 공간을 통해서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은 에코페미니즘이다. 에코페미니즘은 현실세계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협력 하에 여성적인 것을 평가절하, 착취하며 지속된다고 보고 양쪽 모두에 저항하며 대안을 찾아나가는 주의,주장이다.

 

손 편집위원은 한국 사회에는 지난 10년간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지금 더 많은 페미니즘, 더 많은 페미니스트의 목소리가 필요하고 더 많은 토론과 논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간혹 보이는 같은 편끼리의 소속감을 확인하고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방식140자 안에서 강력한 메시지를 통해 리트윗을 유발해야 이슈가 널리 퍼지는 트위터라는 공간의 속성으로 보인다. ‘페미니스트라고 발화하는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고 고민을 나누다보면 파괴적인 공격성이 아니라 부조리한 것과 싸우는 생산적인 공격이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시태그 페미니스트 선언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어야 한다. 선언한 사람들의 바람이다.

 


본 원고는 2015.3.18. 한겨레21 1053호에 실린 내용을 일부 수정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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