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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성명·논평

일본 대재앙의 희생자들과 故장자연을 추모하며

by kwhotline 2011. 4. 12.


 

일본 대재앙의 희생자들과 故장자연을 추모하며


 

. 신하영옥_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

 


 
그 날은 지역에 교육이 있어 출장을 갔었다. 교육을 마치고 해당 기관의 관계자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 한 명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하여 일본으로 여행 간 가족의 행방을 추적하였다. 그런 과정에 일본에 대지진이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그 가족은 지진발생지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확인되어 안심했지만, 실시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본 일본지진의 참사는 상상을 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러한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현재까지 연일 방송과 언론은 일본의 재앙을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고, 방송을 통해 보여 지는 광경들은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형성하고 있다. 지인들과는 ‘앞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므로 ‘계획된 삶, 준비된 삶의 소용성’에 대해,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였으나 결론은 ‘하루하루를 즐겁고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최선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렇다. 결국 하루하루,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즐겁고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아내는 것 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하루하루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매달려 보내고 있다는 것이고 그 불안함은 인간들 스스로 부추기고 있기도 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질적 풍요와 편안함에 대한 경쟁적인 추구는 일본이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자연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인간문명의 결과인 원전폭발이라는 위험이 더해진 것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일본의 참사로 인한 피해자들과 생존자들, 원전폭발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분들에 대해 애도와 위로, 존경심과 안타까움을 보내드리며 한편, 이로 인해 원전에 대한 세계적인 경각심과 환경, 자연에 경외감과 존중감, 상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길 바래본다. 그럼으로 매일매일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고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매일 충만함이 가득하고 덜 풍요하더라도 현실과 미래의 생존에 대해 불안함이 없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게 되길 기대한다. 일상이 불안으로 흔들리는 것은 고통이다. 일본 피해지원금 모금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생존자들이 일상의 불안함에서 빨리 극복되길 바라는 마음들의 표현이라고 본다. 이심전심 때문이다.


 

  일본의 지진피해가 발생한 지 일주일 남짓 후, ‘故장자연씨 추모’를 위한 여성단체의 행사가 있었다. 경찰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대뜸 막아서고, 광화문 일대에서 합법적인 일인시위로 진행되려던 추모제는 경찰들의 저지로 인해 졸지에 ‘불법적인 집회’가 되어버렸다. 흩어지기 전에 경찰이 우리들의 행위를 저지한 탓이다.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강행하면서 일본대지진으로 희생된 분들에 대한 애도와 추모, 모금활동들이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故장자연씨의 죽음에 대한 반응과 교차했다. 그 규모나 과정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목숨은 똑같이 소중한 것인데, 그 결과는 사뭇 다른 것에 답답해졌다. 장자연씨가 지인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내용과 댓글들을 검색해보았다. 얼마 전 국과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 탓인지 국과수의 필적감정결과에 대한 불신의 글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무엇보다도 편지의 내용은 고인의 일상이 얼마나 두려움과 공포, 수치심과 분노 속에서 절망으로 얼룩져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고인이 느꼈을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반복되어 발생하는 성적 폭력과 유린으로 인한 공포와 좌절의 일상화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예측가능하고 대처할 수 있는 불행은 인간의 의지와 행위가 주체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좌절감과 무기력에 덜 노출된다. 그러나 일상에서 언제 끝날지 예측 불가능한 불행은 그 대상을 불행의 노예로 만든다. 불행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음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무기력과 좌절감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무력함과 좌절감은 때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세상에 대해 분노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연결되곤 한다. 스스로 불행을 종식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의 그 심정은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의 심정과 어떻게 다를까 생각해본다. 아니 무엇이 다를까를.

 

  자신을 성적으로 유린한 가해자를 일상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 성폭력범죄자와 함께 일상을 보내는 것, 자신에게 모멸감과 분노, 수치심을 야기한 인간들을 수시로 접해야 한다는 것은 그 일상이 곧 지옥이고 고통이며 공포임에 다름 아님을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장자연씨 사건에는 이 사회의 많은 얼룩들이 묻어있다. 구조화된 연예계 비리, 여성연예인들에 대한 성적 착취, 남성들 간 권력교환에서 도구화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문제가 함께 결합되어 발생되는 추악함이다. 남성들 간의 권력의 거래에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제물처럼 제공되고 있다. 한 때 스폰서 검사들로 떠들썩했을 때도 여성의 성은 제물이었고 모든 검은 거래에는 여성의 몸과 성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래의 대상이자 도구였던 여성의 몸과 성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누구도 권력의 교환과 거래의 대상으로 물화되기를 원하는 이는 없다. 다만 가난과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그 길에, 돈도 빽도 없다는 이유로 권력에 함부로 휘둘려지고 말게 되는 것뿐이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몸과 재능만을 가지고 신분상승을 하기엔 자본과 권력의 벽이 너무 강한 것이 우리사회가 아니던가?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혹은 덜 가진 자 사이의 위계는 낮은 권력의 남성들이 권력의 폭력성, 통제를 자의든 타의든 순응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다만 그 방식이 여성들과 다른 점은 몸과 성을 통해 작동하기보다는 자본과 노동통제, 언어적 신체적 모욕이나 폭력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권력의 폭력성과 통제성은 남성들에게도 불안과 억압적인 일상을 겪도록 만들며 일상적인 불안과 공포는 다시 권력에 순응하도록 하는 기재가 된다. 권력의 지배를 받는 남성들은 가장 만만한 상대를 통해 자신의 지배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지고 이는 결국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아내폭력, 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신체적 폭력 및 학대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통제와 지배, 억압과 복종이라는 폭력성을 내재한 권력이 갖는 악순환이다. 

 

  어느 죽음은 귀하고 어느 죽음은 천할 수 없다. 생에 귀천이 없다면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일본의 재앙으로 희생당한 분들과 故장자연씨의 죽음에는 분명 차이, 즉 애도해야하는 죽음과 그렇지 않은 죽음이라는 차이가 있다. 누군가 그것을 결정하고 있다. 죽음으로 진실을 알리고 싶어 했던 故장자연씨 이지만 진실을 밝혀야 할 집단에 의해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장자연씨의 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에는 방송, 언론, 기업체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데 그들은 현재 일본대재앙 모금운동을 경쟁적으로 펼치는 주역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故장자연씨의 죽음에는 싸늘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너무도 견고한 권력을 방패막이로 하여. 그리하여 경찰은 모 방송사의 필적감정이 동일인으로 나왔음에도 수사를 미루다 얼렁뚱땅 국과수의 등에 숨어버렸다. 이러한 경찰의 태도는 경찰 자신들을 포함해 얼마나 많은 권력의 핵심들이 연예인 성 상납과 연루되어 있는지 상상력을 증폭시킬 뿐이다. 


 

  전 세계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재앙은 당장은 두려움이지만 종국에는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복과 통제, 지배의 욕심을 벗어나 자연과 문명,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정복과 통제, 지배와 억압이 곧 권력의 특징이라면 권력을 버리거나, 재 정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어른이 아이를, 고용주가 고용인을, 선생이 학생을, 상사가 하급직원을, 부자가 가난한 자를,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다수가 소수를 억압, 통제, 지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가진 힘과 지혜를 좀 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데 사용하라는 메시지이다. 그리하여 故장자연씨의 비통한 죽음을 권력의 이름으로 덮을 것이 아니라 진실을 규명하는데 권력을 적극 사용하라는 요구이다. 장자연씨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대자연 앞에 무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포자기가 아니라 한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아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라는 것이다. 일본 대재앙의 희생자들과 故장자연씨를 추모하면서 故장자연씨 죽음의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 나아가 더 이상의 장자연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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