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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우리가 모이면 세상이 변한다

by kwhotline 2016. 7. 21.

2009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보도를 집계·분석한 ‘분노의 게이지’에 의하면, 친밀한 관계에 있거나 있었던 남성에 의해 총 1,051명의 여성이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뻔 했다. 그 중 살해당한 여성은 657명이다. 이는 물론 최소치이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에 의한 피해까지 합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657명. 


그리고 2016년 5월 17일, 또 한 명의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이제 ‘여성’들이 그 “살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고통스러운 고백으로 시작된 이 목소리는 인터넷망에서 망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이어지고 있다. 


분명, 2016년 한국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 혐오와 멸시에 뜻 깊은 발걸음을 새겨가는 중임에 틀림없다.  



5월 17일 이후, 현재까지 진행 중인,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여성들의 목소리를 『베틀Ⅲ』 7호에서 함께 기록한다.  




우리가 모이면 세상이 변한다


오리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 출구’ 관리자 


이따금 누워 생각한다. 우리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우리는 무엇에 끌려 이번 일에 뛰어들었을까. 그냥 일상을 스쳐지나갈 수 있을 사건이었을 텐데도 우리는 왜 거리로 나와서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그렇게 ‘부르짖었을까’ 하고.  


어느덧 <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지의 좋아요 수는 6,000개를 앞두고 있다. 사건 이후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좋아요 클릭 수는 계속 늘고 있다. 심지어 여성주의를 얘기하는 페이지가 우리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엄청나게 놀랍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엄청난 일인 만큼, 한편으로는 어깨가 많이 무거워졌다.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커질 거라고 예상하고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17일 새벽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발생 후 관련 기사가 나기 시작한 것은 18일 오전, 이 사건의 여성혐오맥락을 가시화한 포스트잇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기 시작한 것은 18일 오후부터다. 그때 <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지 초기 멤버들은 토론 중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우리가 과연 ‘어떻게 떠들어야 제대로 떠들 수 있을지’에 대해 말이다. 일단 우리는 현장에 공론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노란 포스트잇에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라는 문장을 적어 붙이기 위해 나온 사람들, 그 ‘말’을 하고 싶어서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포스트잇을 붙이고 눈물을 훔친 채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떨리는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공간, 이 사회에 여성혐오가 없다는 이들에게 내 삶의 경험으로써 망할 여성혐오를 증언해내겠다고 선언할 공간, 나를 넘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 당시에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것이었다. 


그렇게 18일부터 27일까지, 서울시청에서 있었던 ‘젠더폭력의 현 주소 긴급집담회’에 참석했던 하루를 제외하고 8일 동안 이어졌던 ‘반-여성혐오 자유발언대’가 시작되었다. 한 날은 SNS 상에서 “이제까지 조용했던 여성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하는 반응을 본 적이 있는데, 내가 본 바로는 여성들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 할 공간이 없어서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자유발언대의 발언 신청이 끊이지 않아 예정시간을 한참이나 넘겨, 아쉽게 자리를 파하는 일이 매일같이 반복됐다.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연대해야 한다고 외쳐주셨다.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몰래카메라와 신상 털기의 대상이 되는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었던 그 때 그 분들에겐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엄청나게 용기를 낸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일 같이 강남역에서, 홍대에서, 신촌역에서 자유발언대를 세웠던 페이지 관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이도, 사는 곳도, 관심사도, 성별도 다른 ‘너와 나’에서 혐오를 멈추기 위한 ‘우리’로. 그 때 우리가 그렇게 모여서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한다면, 그 공간이 ‘여성주의를 말하고자 하는 우리’를 만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6월 6일의 공동행동을 구상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폭력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발화하기 위해서는 추모 프레임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는 고민과, 온라인상에 끓어 넘치고 있는 여성주의에 대한 열망과 에너지를 폭발시킬 공간이 필요하다는 고민, 자유발언대에서 확인했던 여성들 간의 연대를 확인하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고민들이 교차되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연대할 수 있을지 한번 자리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다. 여러 번의 후속논의를 통해 공동주최단위에 여성단체 뿐 아니라 장애인 단체와 성소수자 단체까지 제안의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범죄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기는커녕 정신장애인 낙인찍기에 착수한 공권력에 대항해 장애인과 연대하고, 가부장적 이성애질서 속에서 함께 젠더권력의 약자였던 성소수자와 연대하기 위함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단체가 우리와 선뜻 연대해주었고, 생각보다 많은 돈이 모금되었다. 기껏해야 100명 정도만 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주최 측 추산 300명이 넘는 시민들이 함께 해주셨고, 행렬에 참가한 사람은 중간에 진입한 사람들이 생겨서 그것보다 더 많았다. 젊음의 거리 홍대 한복판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소수자 그룹과 연대하여 혐오에 맞서고, 구호를 외치며 홍대에서 상수까지의 긴 길을 휩쓸면서 그날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보았다고 확신했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숨죽이며 눈물을 훔치고, 추모를 하는 한계를 넘어서 거리에 나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윽고 각각의 행동이 모여 ‘우리가 모이면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주변뿐 아니라 행사에 참가한 우리 스스로에게도 증명시켜 준 것이다. 정책적인 대안이나 어떤 아젠다들이 논의된 것은 아니었지만, 연대의 가능성을 목격한 우리는 비로소 페이스북의 페이지를 넘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이제 <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지는 지난 6월 초 헤럴드 경제의 기사 시정 및 사과요구를 위한 1인 시위를 진행했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언론 생태에 대한 대안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자체 미디어를 준비 중이다. 성폭력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선정적이거나, 가해자에 이입하고 피해자를 부각시키거나, 때로는 여성혐오라고 할 수 있는 카테고리에 전부 다 해당되는 기사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문제점을 지적하고 sns에 공론화 시키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우리가 써도 저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우리만의 미디어를 만들자는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 소수자 혐오에 저항하는 내용의 해시태그 판넬(#강남역_10번_출구 #혐오와는_타협할_수_없습니다 #여성혐오_세상을_뒤엎자 #성소수자혐오_세상을_뒤엎자)을 들고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했던 것과 같이 여성을 중심으로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청소년 등 우리 사회 배제되고 소외된 소수자인권 · 생존권 · 안전권 등을 광범하게, 또 접근성 좋게 다루는 매체가 되기 위한 이런 저런 준비들에 있다.


  7월에는 7일부터 9일까지 서강대학교에서 개최되는 제16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에 참석해 강남역 10번 출구로서 발제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성애질서 안에서 여성들이 재생산노동의 역할을 강요당한다는 점이 문제이며, 이를 거부하는 여성-비혼 또는 성소수자 여성 등-은 여성혐오의 프레임 안에서 공격받을 뿐더러 남성과의 제도적 결합 없이는 생존에 어려움을 겪기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여성이 독립된 존재로서 온전한 시민권을 행사하기 위한 최소의 전제조건은 경제적 주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이번 대회에서 경제적 주체성 획득을 위한 방안 중 하나로 기본소득을 논의할 예정이다. 7일 16번 세션에서 진행할 예정이니 많이 와주시길 바란다. 8월 즈음에는 여성주의 캠프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 캠프는 여성들이 같은 여성의 죽음에 그토록 분노하고 그 죽음을 나의 문제로 느꼈던 것, 여성이 안전하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한 것은 결국 권력의 문제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6월 6일에 홍대에서 개최했던 ‘여성혐오세상을 뒤엎자’ 공동행동의 연장선에 있는 캠프라고 본다. 이제 우리 서로가 여기 한국 사회에서 끈질기게 생존해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슴 벅찼으니, 우리 스스로를 정치세력으로 선언하고 다음 스텝을 준비하자는 것이 이 캠프의 목표다.


  원래 우리 사회가 여성주의에 대해 이정도로 관심들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선 풍경이 이어지는 요즘이다. 페미니즘 성향의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에서 진행한 텀블벅은 목표액을 훨씬 초과하여 1억이 넘는 금액이 모였고, 페미디아의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도 초과금액을 달성하였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페미니즘 관련 도서 이벤트 섹션을 따로 열 정도다. 그런 반면, 혐오세력의 목소리도 더욱 커져서 이제는 그럴싸한 포장도 없이 그냥 대놓고 혐오발언이나 욕설을 일삼거나 심하게는 폭행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에게 ‘헬조선’이다. 변화를 향한 우리의 항해도 마찬가지로 마냥 순풍에 돛단 듯이 나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도 더디고 가끔은 키를 놓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미약하게나마, 꾸준히 이 바람은 불어오고 있다. 아주 무풍이 아닌 이상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사례처럼, 몇몇 사람들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만 있다면 바람은 분명 순풍이 될 것이다.


   6월 6일 공동행동의 슬로건은 ‘우리가 모이면 세상이 변한다.’였다. 거시적인 계획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우왕좌왕 시작한 페이지였지만, 한 달이 조금 더 지난 기간 동안 해낸 일이 결코 적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가 미처 만나지 못한 수많은 여성주의자 분들의 격려와 지지, 응원이 있었다. 18일 이후 이 세상이 아주 조금이라도 변했다면, 그 변화는 여성주의를 표방한 어떤 한 그룹의 성과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거리에서 함께 목소리 냈던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가 모이면 세상이 변한다’ 이 구호가 확신을 넘어 현실이 되는 날까지, ‘우리’는 계속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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