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보도를 집계·분석한 ‘분노의 게이지’에 의하면, 친밀한 관계에 있거나 있었던 남성에 의해 총 1,051명의 여성이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뻔 했다. 그 중 살해당한 여성은 657명이다. 이는 물론 최소치이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에 의한 피해까지 합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657명.
그리고 2016년 5월 17일, 또 한 명의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이제 ‘여성’들이 그 “살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고통스러운 고백으로 시작된 이 목소리는 인터넷망에서 망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이어지고 있다.
분명, 2016년 한국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 혐오와 멸시에 뜻 깊은 발걸음을 새겨가는 중임에 틀림없다.
5월 17일 이후, 현재까지 진행 중인,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여성들의 목소리를 『베틀Ⅲ』 7호에서 함께 기록한다.
여성폭력범죄 정부종합대책 비판과 대안
여성대상 강력범죄 종합대책-
왜, 유독, 여성만을 대상으로 발생하는지 묻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본 글은 6월 9일, 국회에서 열린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원인과 대책 후속토론회 - 여성대상 강력범죄 종합대책,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본회 송란희 사무처장이 발표한 토론문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동기 없는 범죄’는 왜 강조되는가
정부는 지난 6월 1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여성대상 강력범죄 및 동기 없는 범죄 종합대책(이하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은 이미 그것이 소위 ‘묻지마 범죄’라 할지라도 여성만을 대상으로 했기에, ‘묻지마 범죄’, 혹은 ‘정신질환자’의 문제만으로 볼 수 없다는 사회적 인식이 사건 이후, 널리 공감을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종합대책을 수립하면서 여성대상 강력범죄와 동기 없는 범죄를 등치시켰다. 정부종합대책 또한 추진배경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동기 없는 살인·상해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 것을 들고 있으면서, ‘동기 없는 범죄’를 ‘여성대상 강력범죄’와 같은 무게로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책의 초점은 소위 ‘동기 없는’ 범죄가 왜 유독 여성을 대상으로 빈번히 발생하는지에 맞춰져야 하는 것 아닌가.
‘같잖은’ ‘동기 있는’ 여성대상 범죄
여성대상 범죄는 동기가 없지 않다. 다만, 그 ‘동기’라는 것이 어떻게 해석되는가가 문제이다. 특히, 언론이나 수사기관에서 밝히는 범죄의 동기라는 것은 가해자의 변명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언론에 보도된 가해자의 여성살인 동기(변명)는 다음과 같다. “헤어지자고 해서”, “다른 남자를 만나서/의심해서”, “싸우다가 우발적으로”, “생활고 때문에”, “식사 차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술 취한 모습에 화가 나서”, “강낭콩 껍질을 벗겨서”, “양말과 운동화를 세탁하지 않아서”, “전화 받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홧김에”, “술에 취해” 등. 이는 가해자와의 관계가 남편, 전남편, 애인, 전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었을 경우이며, 가해자와 일면식도 없던 경우, 가해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나서” 등을 그 ‘동기’로 밝히고 있다.
우리 사회가 여성대상 범죄를 다루는 방식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여성대상 범죄와 동기 없는 범죄를 등치시켜 종합대책을 발표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이해’하거나 이해시키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피해자가 남편 혹은 애인에게 ‘헤어지자’고 했거나,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했거나, ‘그 곳에 갔기’ 때문으로, 피해자에게서 이유를 찾을 수 없으면 가해자가 ‘술’에 취해거나, ‘정신질환’이 있기 때문인 식으로 말이다.
이 같은 여성대상 범죄 실태 파악의 실패 혹은 의지 없음, 범죄자의 범행동기(변명)에 근거한 대책은 피해자의 범죄 유발 원인을 제거하거나(밤늦게 혼자 다니지 말 것 등) 범죄자의 특성에 따른 (또 다른 인권침해인) ‘잠재적 범죄자’ 제재로 국한될 수밖에 없다.
정부종합대책, 전면 재검토해야
정부 종합대책은 범죄안전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환경 개선, 정신질환 및 알코올 중독에 대한 치료지원 강화, 재범방지를 위한 치료 및 관리 강화, 강력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 피해자에 대한 다각적인 지원, 양성평등문화 조성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책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여성대상 범죄,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에 대한 차별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여성의 생명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심각한 인권 침해이며, 명백한 범죄행위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불평등한 성별 권력관계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에서 기인한다. 이는 곧, 가부장적 권력관계, 차별적인 문화규범,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이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고 폭력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합대책의 1순위로 환경개선을 배치한 것은 매우 적절하지 않다. 골목길 순찰, 안심귀가 서비스, 비상벨 설치, 범죄안전지도 작성·배포, CCTV 추가설치, 남녀화장실 분리설치 의무 대상범위 확대 등은 ‘늦게 귀가하는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된다’, ‘여성범죄는 어둡고 후미진 곳에서 발생한다’, ‘여성이 조심하면 범죄를 피할 수 있다’ 등의 여성폭력에 대한 통념을 강화한다. 또한, CCTV 확대, 비상벨 설치 등은 범죄 예방보다는 신고와 범인 검거 등 사후적 대응에 효과적인 조치들이다. 여성 대상 범죄예방에 있어 CCTV 설치 등 치안인프라 구축은 일정 정도 필요하지만, 문제는 여성에 대한 범죄 예방정책이 물리적 환경 개선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며, 여성들이 주로 폭력 범죄를 당하는 가정은 애초에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밤낮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나 발생함. 가해자 또한 낯선 사람, 전과가 있거나 정신질환이 있는 특정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전체 여성폭력, 여성대상범죄에 있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정신장애 범죄자 비율 0.4%, 정신이상, 정신박약, 기타 정신장애 포함, 2014 범죄분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대책은 정신질환 및 알코올 중독에 대한 조기 발견, 행정입원, 치료명령·치료감호 적극 시행, 보호수용제도 도입 추진 등을 종합대책의 핵심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문제의 본질을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약자를 방패삼아 호도하는 것인 동시에,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한편, 여성대상 강력범죄에 대한 형사처벌 기준 강화는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대책이다. 많은 여성피해자들은 사건이 발생해도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폭력, 가정폭력 사건의 저조한 신고율만 보아도 명확하다. 결론적으로 이번 종합대책은 기존에 비판받아왔던 ‘여성안전정책’들을 짜깁기하고, 실효성 없는 처벌강화를 내세우며, ‘양성평등문화 조성’을 끼워 넣어 구색을 맞춘 수준에 불과하다. 심각한 것은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인권침해 소지가 다분한 정책들을 핵심으로 배치했다는 것이다. 진단이 틀렸기에 대책도 틀린 것인데, 결과적으로 정신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낙인만 강화하는 꼴이 되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의 대부분은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또 일상적인 공간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여성 대상 범죄의 발생 장소와 상황을 특정하고, 특정한 사람을 잠재적 가해자로 선별하는 것은 여성폭력의 현실과 맞지 않으며, 여성이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지켜야 할 또 다른 성차별적이고 여성 억압적인 행동규범을 강화하기 쉽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효과적으로 근절하기 위해서는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호, 범죄 예방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맞춰 집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가해자에 대한 적극적 체포와 기소 정책, 사각지대 없는 피해자 지원(이를 위한 법률적 정비), 성평등과 인권교육의 공교육화 등의 정책이 필요하다. 정확한 실태 파악을 위한 여성대상 범죄 통계구축은 전제사항이다.
한편, 성차별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원인이자 그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방법으로 한 번도 강력한 성평등 정책을 추진한 적이 없다. 이제, 여성대상 강력범죄의 대책은 성평등정책에서 출발해야 한다. 여성가족부가 성평등정책 조정 기능을 상실한 현재 상태를 감안했을 때, 국가의 성평등정책을 실질적으로 총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하고도 새로운 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에 불과하다. 소위 여성혐오가 공기처럼 포진해있는 세상에서 성평등이 공기처럼 흐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변화, 우리 개개인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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