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요?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①] 박제된 가족을 넘어
김홍미리 여성주의연구활동가, 한국여성의전화 회원
사랑과 희생, 화목함의 상징인 가족. 그러나 한국 가정의 53.8%는 ‘폭력’ 가정. 그만큼 경험으로 익숙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일’, ‘감히 참견해서는 안 될 가정사’라고 생각하며,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인식. 이처럼 가족과 가정폭력을 둘러싼 이중적인 잣대, 인식의 괴리는 폭력의 본질적인 해결을 어렵게 합니다.
올해로 33년 동안 아내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온 한국여성의전화가 다양한 사례와 함께, 가정폭력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보수적인 가족상과 폭력의 연관성, 현 가정폭력 관련 제도의 문제, 가정폭력과 얽혀있는 또 다른 폭력의 실상을 파헤쳐봅니다.
* 본 기사들은 한국여성의전화 ‘5월 가정폭력 없는 평화의 달’ 캠페인의 일환으로 연속 연재되었습니다.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올해에도 어김없이 가정의 달이 찾아왔다. 내내 소홀하더라도 일 년에 한 달 만큼은, 그 한 달 중에 하루만큼은 서로의 ‘소중함’을 기억해보자는 취지로 풀이된다. 어린이날(5/5), 어버이날(5/8), 세계가정의날(5/15)에 이어 부부의날(5/21)까지 5월 한 달은 그야말로 곁에 있는 가족구성원들을 차근차근 호명하면서 ‘가족이란 나에게 무엇인지’ 물어온다. 낯설게 보지 않는다면 이 질문은 종종 ‘가족의 소중함을 알자’는 식의 식상한 답으로 돌아오기 쉽다. ‘인사를 잘하자’라거나 ‘서로 배려하자’는 캠페인 문구처럼 누구나 듣기에 틀린 것 없어 보이는 말로 정리하면서 답하기 난해하고 복잡한 질문을 어물쩍 넘긴다.
가족은 소중하다. 그런데 이 문장의 포인트는 ‘소중하다’가 아니다. 소중해야 할 그 ‘가족’이 과연 무엇인지, 왜 소중하다는 말이 반드시 소중해야 할 것처럼 재차 강조되는지가 포인트다. 가족이 무엇인지 되짚지 않고 중요하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외칠 때 우리는 ‘가족’을 박제화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소외시키기 시작한다. 어린이날 인기 선물을 한 달 전에 미리 확보해둔다거나 TV에 나온 맛집을 어버이날 전에 예약해 둔다거나 하는 식으로 가족행사를 잘 치르기 위해 노력하면서, 우리는 가족의 소중함만이 아니라 가족의 무거움도 감지한다. 가족의 지겨움과 고단함, 가족 구조의 서열과 경직성, 가족에 대한 내 감정의 난해함과 난감함을 함께 경험한다. 복잡한 감정의 회로를 ‘가족’이라는 단어에 새기며 살아가며, 이건 인사하기나 배려하기라는 규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은 소중하다’는 말 아래에 숨고, 그 말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방식으로 복잡한 마음을 꾸역꾸역 눌러 담는다. 이런 억지스러움을 포장지에 싸는 다급함으로 5월 가정의달에 ‘정상가족’ 코스프레는 정점을 찍는다.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진정 인사 잘하기 정도로 가볍게 ‘가족에게 잘하기’ 코스프레나 하고 살면 되는 걸까?
그 사람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가족이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에 종종 주어를 생략한다. 가족은 누구에게나 똑같을 것을 가정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가족은 권력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공간이며, 이때 가족의 의미는 주체의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가족 말하기에서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묻는 일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우리는 신문에 오르내리는 기사를 통해 그 사람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할 기회를 얻지만, 그것을 특수한 가정의 보편적이지 않은 문제로 치부할 때 종종 그 기회는 상실되곤 한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그녀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들 속에서 ‘가족’은 박제가 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2016년 4월 어느 날 나는 열아홉 살 때부터 지속된 형부의 성폭력으로 아이를 출산한 여성이 그 아이를 살해했다는 기사를 접했다(2016년 4월 5일). 아픈 언니와 조카를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에 신고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이모이자, 처제이자, 엄마인 1) 이 여성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별거 중인 아내를 불러내 지하 창고에 감금하고 폭행한 남편이 아내를 불러낸 명분이 ‘면접교섭권’이었다는 기사도 접한다(2015년 3월 28일).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는 ‘자녀’였다. 법은 가정폭력 가해자이기에 앞서 아버지인 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며, ‘가족을 지키려는’ 법의 의지 앞에 가정폭력은 신중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덕분에 이혼과정에서 살해되는 여성들이 꾸준하다. 2015년 12월에도 남편은 면접교섭권을 빌미로 아내와 아이를 불러내 둘 다 살해했다. 죽어가는 이들 앞에서 연거푸 묻는 질문이 있다. 2) 법이 지키려는 ‘가족’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3) 잃을 바에는 같이 죽거나 죽인다는 이 아버지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올 3월에는 아내와 딸을 살해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지난해 10월에는 50대 가장이 말기 암 아내와 특목고생 딸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일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0년 전 LA에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아내와 두 자녀에게 총격을 가하고 자살한 아버지와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딸의 이야기는 2016년 4월 LA타임즈 기사로 우리 앞에 돌아왔다. 살아남은 이를 보며 같은 질문을 떠올린다. 4) 살아남은 딸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누구’라는 주어를 생략하고, 삶의 맥락을 삭제한 채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할수록 가족은 점점 박제가 되어간다. 쉴 곳과 기댈 곳을 찾는 무수한 이들을 보며 누군가는 그게 바로 ‘가족’이라고 당연하듯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빼곡하게(그리고 덕지덕지) 규범으로 채운 세계에서 ‘가족’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안식’이라는 걸 준다. 안식은,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처제를 강간하는 형부에게, 그리고 폭력에 저항하기보다 ‘인내’를 선택한 아내를 지속적으로 구타하는 남편에게 도달할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접고 저항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자녀와 ‘가족’을 책임지려는 ‘처제’와 ‘아내’에게 가족은 안식처일 수 없다.
박제된 ‘가족’의 옳지 않은 활용에 대하여
지난 20대 총선 기독자유당 홍보물에 서정희가 등장했다. 1983년 ‘성폭행 비슷한 것’으로 인해 서세원과 결혼하게 됐다는 서정희는 지난 30년 폭력으로 점철된 생을 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간통죄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동성애와 이슬람으로부터 가정을 지키자’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간통죄 부활이 서세원의 외도, 구타, 강간을 멈추게 할 리 없고, 성소수자와 무슬림에 대한 혐오는 소수자 혐오정서를 확산시킴으로써 결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소수자’인)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화하는 일에 기여할 뿐이다. 결국, 이 세 가지 모두 가족구성원의 목소리가 고루 존중받는 가족문화를 만드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거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기독자유당은, 그리고 서정희는 ‘가정을 지키자’는 박제된 문장 하나로 이 모든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한다. 동성애를 처단하는 것도 ‘가정’ 파괴를 막기 위해서고, 이슬람을 처단하는 것도 ‘가정’을 위해서라고 부르짖으며, 간통죄를 부활해야 하는 것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우긴다. 이것은 뿌리깊은 한국사회의 ‘가족주의’가 정당하지 않는 일에 편의적으로 활용되는 전형적인 예다. 만약 ‘편의적 활용’에 대해 동의가 어렵다면, 기독자유당과 서정희는 간통죄 부활 및 무슬림과 동성애자 혐오를 통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정’이 무엇인지 설명해야만 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정’은 눈 가리고 아웅할 때 사용하는 만능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청년세대의 절망을 결혼 못 해서 슬프겠다고 퉁치는 일(삼포, 오포, 육무), ‘외국 처녀라야 총각딱지 떼는’ 농촌 총각을 불쌍히 여겨 인신매매성 국제결혼을 국가가 나서서 실천하는 일(국제결혼지원조례), 저출산(과거에는 고출산)을 경제성장 발목 잡는 주범으로 지목하는 일, 37만 명 성감별로 낙태된 여아를 뒤로하고 ‘올해 총각 6명 중 1명은 결혼불가-최악의 남초’를 걱정하는 일 등은 불평등하게 구축된 글로벌자본주의의 문제와 전 지구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젠더권력관계를 가뿐히 삭제한 후, 가정문제(결혼 못하는 문제와 출산 안하는 문제)로 분리되어 안착한다. 공사영역이 완벽히 구분된다는 근대의 발명품은 마치 가족에 일어나는 일련의 ‘변화’들이 사회와 무관한 것처럼 가족을 진공상태로 상상한다. 글로벌자본주의와 전 지구적 젠더체계를 가정에서 떼어내고, 개인의 인내, 개인의 ‘노오오오력’, 개인의 (낙태/결혼/출산) 선택의 문제로 단순화된다. 결국 공사이분법은 모오오오오든 골치 아픈 문제를 가정이 책임지고 개인이 노력하게 하는 시스템을 완성시키는 첫 번째 단추였던 셈이다.
가정이라는 불가침의 영역, 가족의 이름으로 겪어내는 폭력
덕분에 가족은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든지 상관없이 가족이 담당해야 할 기능을 수행할 것을 요구받을 수 있게 됐고, 수행하지 못할 경우의 비난도 감수해야 하는 위치가 됐다. 저출산이 문제라며 여성들을 들들 볶는 일, 심지어 알레르기 질병의 유병율 증가를 ‘핵가족화와 여성의 사회진출로 인한 청소기회 감소’로 지목하는 것을 보면,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다 가정이 바로서지 못했기 때문이고, 가정을 버리고 과욕을 부려 사회로 나가려는 여자들 때문이라고 할 날도 머지 않았다. (벌써 왔을 것도 같다.)
그런 ‘가족’이 뭐라고, 가족을 구성하는 데에도 자격을 묻는다. 성적지향과 장애, 나이, 인종, 종교 등을 둘러싸고 결혼과 출산의 자격이 물어진다. 동성애자의 결혼과 장애여성의 출산은 허락되지 않는다. 다양한 주체들의 가족구성권리는 ‘정상적인 형태의 가족’만을 수용하는 한국사회에서 참 당당하게 침해당하는 중이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이 사회의 시민 됨을 인정하는 절차여서 그렇다. 시민과 비시민을 가르는 경계에 ‘가족’이 있고, 그 자격 기준 운운하는 사이에 정작 가족은 부족한 개인들의 공동체적 연대의 개념에서 점점 멀어지는 중이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하나 있다.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는 관계를 그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인간이 독립적이라는 근대의 믿음은 허상에 불과하고 인간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산다. 독립적인 시늉을 하려 애쓰지만 ‘별에서 온 그대’가 아닌 이상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누군가를 위로하고 누군가에게 위로받으면서 산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런 관계를 표현하는 적절한 말로 가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될까 망설인다. ‘가족’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무수한 폭력들 사이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은 따뜻함의 의미를 복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한다. 그 의심을 거두고 가족의 이름으로 누구나의 안식을 바라는 일을 기대해도, 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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