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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후기·인터뷰

[가족 내 차별과 폭력에 대한 기획 기사] 로맨스 장르에서 친족 성폭력을 그리는 법 : 웹툰 <망고의 뼈>

by kwhotline 2019. 6. 4.

[가족 내 차별과 폭력에 대한 기획 기사]



로맨스 장르에서 친족 성폭력을 그리는 법

: 웹툰 <망고의 뼈>

 

오늘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이 글은 <망고의 뼈> 전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주의하세요.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을 소재로 삼는 창작물은 다큐멘터리나 드라마 장르가 대부분이다. 폭력 피해를 왜곡하지 않고 무겁고 진지하게 그려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학원물 로맨스 장르로 가정 폭력, 그중에서도 친족 성폭력에 관해 이야기하는 웹툰이 있다. 레진코믹스에서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연재한 <망고의 뼈>(: 골드키위새, 그림 : 넋부자들).

노력만 하면 뭐든지 쉽게 풀려왔던 모범생 주인은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주인은 차석인 소복과 친해지려 하지만, 소복의 곁엔 도무지 소복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불량하고 평판 나쁜 리사가 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집을 나와 낯선 남자를 만난다는 소문이 도는 리사. 급기야 주인은 리사가 할머니에게 소리 지르며 할머니를 밀치는 장면을 목격하기까지 한다. 주인은 좀처럼 리사를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소복과 친해지면서 리사와도 조금씩 가까워진다. 리사와 어느 정도 터놓고 이야기도 하게 되었을 무렵, 주인이 실은 할머니와 연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사는 불같이 화를 낸다. 그리고는 말한다.


이후 작품은 리사와 아빠와의 갈등을 중심축으로 다른 이들의 관계가 얽힌 채 흘러간다.

로맨스 장르에서 가정폭력 혹은 성폭력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피해 경험이 사랑에 서투른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한 소재거리나, 사랑이라는 결실이 맺어지기 위해

극복되어야 할 결점이나 장애물처럼 소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고의 뼈>는 결코 사랑이야기를 위해 친족 성폭력을 소재로만 소비하는 작품은 아니다. <망고의 뼈>는 로맨스 장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친족 성폭력을 가볍게 그리지 않는다. 그래서 <망고의 뼈>가 친족 성폭력을 어떻게 그려내었는지를 살펴보고 현실의 친족 성폭력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 가해자답지 않은 가해자

<망고의 뼈>는 의도적으로 기존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리사 아빠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말하는 슈퍼 아주머니에게 리사는 곧바로 욕을 하며 손을 올린다. 그런 리사를 두고 아주머니는 말한다. ‘넌 저게 아빠한테 그런 짓 당한 애의 태도로 보이냐? 그런 짓 당하고도 저렇게 당돌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피해자는 안 저래!’ 이 같은 아주머니의 대사는 우리 사회가 성폭행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폭행 피해자는 조용하고, 소극적이고, 의기소침 해있고, 완전무결하고, 언제나 피해 기억에 시달리며 괴로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는 피해자답지 않다며 피해 사실을 의심받는다. 리사는 친구들과 있을 때는 잘 웃기도 하고, 좋고 싫음을 분명히 표현하고,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고, 소리 지르고 화도 내고, 가해자에게도 네가 잘못한 것이라며 당당히 이야기하기도 한다. 작중에 리사의 성폭행 피해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는 피해자답지않아도 리사가 피해자라는 것은 리사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반면 리사의 아빠는 온화하고 선한 인상을 지닌 캐릭터로 등장한다. 동네 사람들은 약사로 일하며 어머니도 잘 모셨던 리사 아빠가 딸을 성폭행한 범죄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유흥업소 출신이었던 아내에게 꽃뱀짓을 당해 억울하게 형을 살았다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왜 그랬대.’와 같이 가해자를 외양과 연결 지어 많이 이야기하곤 한다. 또한 자신의 지인이 가해자로 지목된 경우 평소 알던 그 사람의 행실을 이야기하며 그럴 사람 아니에요라고 가해자를 두둔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친족 성폭력 생존자 수기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에서도 목사였던 아빠가 밖에서는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는 아빠를 연기했지만, 딸과 단둘이 있을 때는 사정없이 폭력을 행사하며 강간을 일삼았다. 자신이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 있을 수 있다. ‘피해자처럼 생긴피해자가 없듯이 가해자처럼 생긴가해자도 없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 : 법적 보호자, 공간 분리, 정상 가족

<망고의 뼈>는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를 작중에 잘 녹여내고 있다. 가장 큰 것은 법적 보호자의 문제다. 작중 리사의 경우 엄마는 사라지고 아빠는 수감 중이어서 법적 보호자가 친족인 할머니로 되어있고 친권도 할머니에게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할머니는 자기 아들이 한 일을 알면서도 아들을 불쌍하다며 감싸는 2차 가해자라는 것이다. 심지어 리사가 엇나가는 것은 집안에 가장이 없기 때문이라며 하루빨리 아들이 출소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리사는 이런 할머니와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어 집을 나와 엄마의 친구인 아저씨 집에 얹혀산다. 아저씨는 리사를 돌봐주고 정신적으로도 지탱해주는 실질적 보호자지만 리사와 혈연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보호자로서의 어떠한 권리도 능력도 없다. 실제로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의 법적 보호자인 경우가 많다. 물론 리사처럼 가해자의 친권이 박탈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친족 성폭력은 가족들이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가해를 행하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가 이중으로 고통받는다.

친족 성폭력은 그 특성상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간 분리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독립하고 싶어도 경제적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해자와 한집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리사는 운 좋게도 머무를 다른 공간이 있었지만, 아빠가 출소하고 나서는 집으로 들어오라며 계속해서 리사에게 접근한다. 리사는 아빠에 대한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려 하지만, <망고의 뼈>에는 이 제도의 허점이 여실히 묘사된다. 신청한다고 바로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단순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닌 성폭행을 다시 시도하는 등 가해자의 새로운 위협이 없으면 기각될 가능성이 높으며, 신청한 거주지 주변만 해당되는 것이라 우연히 타지에서 만나는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리사 아빠는 행정처분에 불과하다며 과태료야 내면 그만이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도 보였다. 가해자는 피해자 앞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피해자에게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 한국에서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온전히 가해자와의 공간 분리를 보장받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또 한 가지는 바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다. 특히 가해자가 직접 강요하거나 피해자의 가족이 강요할 경우 그 고통은 배가 된다. 리사 아빠는 끊임없이 온전한 가족을 이야기한다. 가족은 부모와 자식이 한집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며, 자식은 부모의 아래에서 가르침과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말이다. 온전한 가족을 부수어버린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리사 아빠는 계속해서 자신이 꿈꾸는 정상가족의 틀에 억지로 리사를 끼워 맞추려 한다. 할머니 또한 가족은 가장이 있어야 완성되는 것이라고 믿으며, 리사에게 아빠에 대한 용서를 종용한다. 많은 피해자가 이런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때문에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고통 받는다. 피해 사실을 알리면 화목한가정이 무너진다는 생각에 신고를 망설이거나, 다른 가족 구성원이 정상가족을 연출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침묵할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래서 친족 성폭력은 신고율이 매우 낮다. 더 많은 피해자들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가족은 해체될 수도 있고 재구성될 수도 있다는 유연한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로맨스 장르와 친족 성폭력

<망고의 뼈>는 성폭력 피해가 있었던 과거보다 친족 성폭력 생존자로서 현재를 살아가는 리사의 삶을 더 많이 조명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폭력 피해에 대한 트라우마로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리사 또한 그렇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억울한 사연 알았으면 하다가도 내가 성폭행당했다는 거 아는 사람 다 사라졌으면 좋겠고.’라며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초면부터 차갑게 굴기도 한다. 그런 리사에게 가만히 곁에 있어 주고 조용히 기다려주었던 소복이 있었고, 소문만 듣고 리사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저지하는 주인이 생겼다. 소복과 주인을 만나며 리사는 조금씩 용기를 낸다. 

<망고의 뼈>는 주인과 리사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그린 로맨스물이다. 그렇지만 <망고의 뼈>는 이 둘이 사랑에 빠진 계기를 우연히어쩌다로 뭉뚱그리지 않고, 친족 성폭력 생존자인 리사가 어떻게 주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는지를 세심하고도 차근차근하게 그려낸다. 주인은 리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리사의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멋대로 판단했다. 리사의 할머니를 만나 리사와 할머니의 관계를 어떻게든 회복시키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주인은 리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나서는 리사를 존중한다. 함부로 이야기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제대로 귀 기울여 리사의 말을 들어준다. 2차 가해를 하는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리사의 편에 서서 함께 싸워준다. 리사가 맞서는 세상의 참담함에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리사는 넌 네 엄마처럼 남자에게 들러붙는다는 아빠의 말에 헛소리하지 말라며 당당히 대응했지만, 내심 그 말을 염두에 두고 주인과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난 남자에게 들러붙거나 하지 않아.’라고 되뇌면서 말이다. 그런 리사에게 주인이 단번에 가해자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리사는 더 깊은 관계로 도약하기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로맨스물에서 한쪽이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경우, 상대방이 한쪽을 일방적으로 구원하는 서사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주인과 리사의 관계는 주인이 리사를 일방적으로 구원하는 관계는 아니다. 주인은 리사와의 만남을 통해 그동안 굳게 믿어왔던 세계가 깨어지고 재구축되는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마치 망고의 안에 있던 것이 망고의 뼈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망고의 씨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은 것처럼.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로 보답받는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주인은 그렇게 되지 않는 세계도 있다는 것을 리사를 만나면서 알게 된다. 자신이 노력하면 리사와 할머니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은 게 실은 자신의 오만이었다는 것을, 소설 <캉디드>의 주인공 캉디드만큼 불행을 겪는 사람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족 간의 대화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주인은 성장했다.

 

<망고의 뼈>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삶을 구체적이고 다방면에서 그리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리사가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모든 면모를 전부 다 보여주지는 못한다. 리사와 같이 친족 성폭력 범죄를 신고하고 가해자가 실형까지 사는 경우는 매우 운이 좋은 사례다. 친족 성폭력 범죄는 대표적인 암수 범죄로 신고율 자체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당한 경우 자신이 당한 폭력이 무엇인지 몰랐다가 사춘기가 되어서 깨닫거나, 가해자가 친족이라서 신고를 망설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당사자가 신고를 원한다고 해도 주변인, 특히 가족이 2차 가해를 하거나 진술을 번복하도록 종용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망고의 뼈>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살아가는 삶을 묘사하는 데에 많은 고민이 들어간 것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특히 로맨스 장르에 친족 성폭력 생존자로서의 삶을 잘 녹여내어, 소재와 장르의 조합에 있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끔 한다. 지난 10년간 웹툰 시장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성별이나 연령에 관계없이 폭넓게 소비되는 대중매체로 자리 잡았다. 최근 웹툰 <복학왕>의 작가 기안84는 작중 청각 장애인 비하와 외국인 노동자 비하로 물의를 빚은 적 있다. 웹툰의 영향력이 커진 만큼, 작품에서의 윤리적 재현에 대한 고민도 더 깊어져야 한다. <망고의 뼈>와 같이 진지한 고민과 섬세한 재현이 담긴 작품이 더 늘어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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