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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후기·인터뷰

성폭력, 강력한 처벌만이 대안인가

by kwhotline 2016. 3. 31.

성폭력, 강력한 처벌만이 대안인가


이지원_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최근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한 성범죄 전력자가 4시간 만에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되지 않아, 전자발찌를 찬 상태에서 성추행을 일삼는 사건도 보도되었다. 우리나라는 특정 성범죄자에 한해 전자발찌를 착용하게 하는데, 지난 2013년은 최초로 연예인 전자발찌 착용자가 나타나는 등 이에 관한 관심과 논란이 뜨거웠던 해이다.


전자발찌와 화학적 거세 같은 방식이 성폭력 피해 예방의 대책으로 논의되는 근거에는, 가해자에 대한 보복 심리 이외에도 성폭력에 대한 강한 통념이 자리하고 있다. 전자발찌를 통해 가해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거나, 약물로 가해자의 성욕을 억제하면 성폭력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의 재범률이 높은 만큼, ‘잠재적 범죄자’를 강력하게 처벌하고 제재하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발찌의 구속을 피해 또 다른 범죄가 속출되는 지금, 더욱 확실하고 강력한 기술 개발에 몰두하는 것이 성폭력을 예방하는 답이 될 수 있을까?


3월 25일 금요일 낮 2시, 한국여성의전화 지하 교육장에서 여성상담전문교육 프로그램으로 성폭력의 처벌 문제에 대한 질문과 함께 ‘성폭력의 실태와 대책’ 강의가 열렸다. 한국여성의전화 전(前) 성폭력상담소장 유리화영이 강연을 맡았다.





성폭력 담론의 변화, ‘일상적 폭력’이란 시각


전자발찌를 무력하게끔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나타난 배경엔 성폭력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흐름의 변화가 있다. 강연자가 이날 제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현재 20대 여성의 65%는 ‘최대 악(惡)’으로 성폭력을 뽑고 있는데, 이는 특히 젊은 여성에게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큰 두려움으로 자리 잡았음을 말해준다. 모 대학의 교수, 대학생, 공무원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들이 가시화되면서, 성폭력은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지난 시기, 성폭력은 정신적으로 이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한 ‘잔혹한 범죄’라는 인식에서, 평범한 사람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는 ‘일상적 폭력’으로 담론이 이동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정의하는 성폭력은, 상대방의 자발적인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상대가 원하지 않는 성적인 언어나 행동을 일방적으로 표출하여 상대에게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폭력은 신체 접촉의 형태 등 유형에 따라, 성적 행위의 강제성 여부에 따라, 혹은 성적 행위 때문에 어떤 피해를 보았는가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된다. 최근 성폭력 신고율이 예전에 비해 증가하는 추세인데 이는 성폭력 사건의 증가뿐만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인지 정도가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성폭력을 규정하는 문턱이 낮아지면서, 자신이 겪은 피해와 불편함을 ‘성폭력’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법에 규정된 사항에 한해 가능한데, 이때 피해자의 ‘동의 여부’와 함께 고려되는 것은 ‘강제력이 작용했는지’이다. 또한, 성폭력 관련법에서는 성폭력의 개념을 따로 규정하지 않고, 성폭력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나열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즉, 강간/유사강간/강제추행/준강간, 준강제추행 등 성폭력의 유형과 각각에 해당하는 처벌을 정리하는 방식인데, 여기서 성기의 삽입 여부가 처벌의 주요 기준이 된다.


사회적 통념은 누구의 언어인가


성폭력방지 특별법은 여성단체와 시민단체의 여성폭력추방운동, 그리고 여성들의 용기 있는 피해사실 폭로 속에서 일구어낸 성과물의 일환이다. 그렇기에 여성계의 목소리를 담아내었다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성에 대한 왜곡된 통념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건의 해결과 피해자에 대한 지지가 원만하지 못한 예도 있다. 강연을 통해 성폭력 문제의 실태, 피해자가 사건 해결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겪는 어려움, 그리고 2차 가해 문제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다.


먼저, 성폭력 사건의 상당한 비율이 ‘아는 사람에 의한 폭력’이라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고 긴밀할수록, 성폭력을 사건화 하는 것부터 이후에 피해자에 대한 보호까지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체 상담의 10%, 특히 아동 성폭력의 30%가 친족에 의해 발생하지만, 가해자가 친족이기에 고소나 신고를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또한, 불가피한 대면이 잦아지면서 피해자에게 더욱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온다.


성별화 된 성적규범 또한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배가시킨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는 관계인 경우, 애인/과거 애인에 의한 폭력인 ‘데이트폭력’의 비중이 매우 높다. 이때, 피해자가 숙박업소나 가해자의 집에 따라간 것을 성관계를 허용한 것으로 보는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사법계에서도 ‘동의된 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다. 배우자에 의한 강간의 경우, 가정 내 ‘성행위’의 권력은 남편에게 있다는 통념과 아내에 대한 ‘훈육수단’으로서 폭력을 보는 시각이 성폭력의 배경을 제공한다. 또한, 두 가지 유형 모두,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어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하는 것을 가로막기도 한다.


그러나 ‘숙박업소=성관계 동의’라는 도식은 누구에 의해 탄생한 문법일까? 부부간의 성관계에서 여성과 남성은 왜 불평등한 권력을 부여받는가? 왜곡된 통념과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불균등한 권력관계가 맞물려, 많은 공간에서 성폭력이 발생하는 동시에 용인되고 있다. 사법계의 시각이 피해자의 경험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게 되면 피해자의 고통은 더욱 심화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매체와 문화가 다양해짐에 따라 성폭력의 양상도 다양해지고 있다. 강연자는 “현재 법은 성폭력을 인정하는 데 너무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기에, “사람들이 인지하는 정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다양하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정의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더욱 광범위해지고 일상화된 성폭력의 실태에 맞추어 제도와 법이 정비되어야 하고,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통념과 문화를 함께 바꾸어가야 한다.


통념에 맞서는 여성주의


강의는 성폭력에 대한 여러 통념에 대해 교육생들 스스로 토론하고 발표하는 시간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주로 성폭력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한 경우에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왜곡된 시선에 관해 이야기가 오갔다. 이를테면 야한 옷, 짧은 치마를 입으면 혹은 ‘만취’하여 자신의 몸을 추스를 수 없는 경우에는 성폭력 피해자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존재한다는 시각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교육생들은 저마다의 논리와 재치를 겸한 답변으로 많은 공감을 자아냈다. 어느 교육생은 “길에서 만난 아픈 사람을 병원에 인도하듯이, 술 취한 여성 또한 보호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강연자는 여성주의적 상담의 원리로 “여성의 시각에서 문제를 재조명하기”를 언급한 바 있다. 결국,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처벌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괴롭히는 왜곡된 시각과 통념들에 저항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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