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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한국의 소수민족

by kwhotline 2015. 6. 16.

한국의 소수민족


공식화의 파장은 생각보다 큽니다. 여타 계층, 지역의 말들을 제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 표준어라는 공식적 지위를 획득한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덕분에 ‘교양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 필자가 고향 가면 쓰는 현대 대구말’은 공적인 자리에서 지양해야 할 말이 되었습니다.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위해 순화되어야 할 말로 취급 받기도 합니다. 한컴오피스 한글로 문서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말’에는 별 지적이 없는데 ‘대구말’에는 ‘표준에 어긋났으니 띄어쓰기라도 하거라.’하는 빨간 밑줄이 그어져 있네요.



△ 네이버 사전에 ‘표준어’를 검색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여기 필자가 구사하는 지방 사투리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문화권에서 발생해 한국인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니 외국어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대한민국 언어로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언어, 바로 한국 수어입니다.


먼저 용어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흔히 (예)비 청각장애인, 즉 청인(廳人)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청각장애인, 농아인, 농인 등의 단어가 통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셋 중 가장 적절한 표현은 ‘농인’입니다. ‘청력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청각장애인(聽覺障碍人)이나,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농아인(聾啞人)보다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몰가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청인 한국인의 음성 언어인 ‘한국어’에 대비되는 농인의 시각 언어가 ‘한국 수어’입니다. 아직은 수어보다 더 익숙한 명칭인 수화를 굳이 수어로 바꾸어 표현하는 이유는, 수화라는 단어에는 언어로서의 의미보다는 의사소통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수어는 그 자체로 고유한 언어입니다. 한국어와 외국어가 다르듯, 국가마다 수어의 표기법이 다릅니다. 또한, 수어는 한국어 문장 그대로를 손동작으로 바꾼 것이 아닙니다. 한국어와 한국 수어는 어순도 다르며, 수어는 조사나 어미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한국 수어’라는 표현은 한국 수화가 외국(수)어, 혹은 한국어와는 다른 독립된 ‘언어’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공식화되지 못하는 것의 파장도 생각보다 큽니다. 한국 수어가 한국의 공식 언어로 채택되지 않아 농인이 겪게 되는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공식 언어로서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하니 수어 이용자에 편리한 환경을 조성할 의무도 사라지고, 따라서 수어환경이 미비해 농인들의 의사소통과 학습 등에 많은 제약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농학교 교사의 수화 통역 자격증 소지가 의무화돼있지 않아 수화통역사 자격증을 소지한 특수교사는 전체 중 3.8%에 불과하고, 전국 18개 청각장애인 특수학교 교사 중에서도 6%만이 수화통역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2013년 6월 기준)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과 교사가 쓰는 언어가 다른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식화의 파장이 필요합니다. 이미 우간다, 포르투갈, 베네수엘라, 뉴질랜드, 스웨덴, 핀란드 등에서는 수어를 해당 국가의 공식 언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중 하나인 뉴질랜드 수어법(NZSL Act)에 따르면, 모든 법적 절차에서 뉴질랜드수어 사용을 가능케 하고, 농사회나 농어의 발전을 국가적으로 지원하며, 수화를 선택과목의 하나로 지정해 청인의 수화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습니다. 


한국에서도 위와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한국수화언어법’ 제정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한국수화언어법은 농인들의 언어인 '수화'를 하나의 공식 언어로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수화의 보급과 이를 통한 소통을 지원하기 위한 법입니다. 그 내용으로는 수화연구기관·수화심의회 설치와 수화교육·수화통역 지원 등의 사항이 담겨 있으며, 농 문화, 농 정체성, 농가족 지원도 포함돼 있습니다. 


수화언어 관련 법안은 지난 2013년 총 4개가 국회에 발의됐습니다. 하지만 ‘산적한 다른 문제들’로 인해 소관 상임위원회인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교문위’)의 심사가 진행되지 않아 여전히 계류 중인 실정입니다. 지난 4월 30일에도 임시국회에서 교문위 법안심사소위원회가 네 법안의 병합안 등을 검토할 예정이었으나 관광진흥법 개정안 논의가 지연됨에 따라 밀려나 현재까지도 검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새정치민주연합 이상민 의원 ‘한국수화언어 기본법안’(2013. 8. 20)

▲ 새누리당 정우택 의원 ‘수화기본법안’(2013. 10. 8)

▲ 새누리당 이에리사 의원 ‘한국수어법안’(2013. 10. 22) 등이다.

▲ 정의당 정진후 의원 ‘수화언어 및 농문화 기본법안’(2013. 11. 26)


△ 현재까지 발의된 수화언어 관련 법안



무엇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


로널드 메이스에 의해 처음 주창된 것으로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장애의 유무, 연령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제품, 건축, 환경, 서비스 등을 보다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디자인을 뜻합니다. 2005년 제정된 일본의 배리어프리신법(barrier-free新法)은 유니버설 디자인을 확대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일본의 공항에는 일반 화장실과 장애인 화장실의 구분이 없이 모든 칸이 넓고 칸마다 손잡이가 설치돼있다고 하네요. 화장실 사용에 있어 노인과, 어린이와, 청년과, 지체 장애인과, (예)비장애인 간의 차이를 최소화한 것입니다.


어느 사회 내에서 무엇이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는가(광의의 문화)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흑인이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던 시대와 곳의 문화는 딱 그만큼의 격을 갖고 있었고, 여자에게 투표권이 생기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로만 알았던 사회는 또 그만큼의 격을 갖고 있었죠. 지금은 인류의 부끄러운 역사쯤이 되어버린 이 예시들은, 당대에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행하는 것, 생각하는 것, 규정해놓은 것 등에 대한 질문과 의심을 던지지 않는다면, 우리 문화의 격도 딱 이만큼에 머물러 ‘인류의 부끄러운 역사’ 리스트에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차이를 부각시키고 차이에 따라 이용자를 나누던 (당연한) 기존의 디자인을 거부합니다. 대신, 공간, 기구 등의 이용에 있어 신체상의 차이를 의미 없는 차이로 만들어버립니다. 한국수화언어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수화언어법은 현재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는 농인이 살기에 불편한 문화, 농인의 언어가 언어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문화, 청인 부모와 농인 자녀가 자연스레 대화하지 못하는 문화를 거부합니다. 대신, 청인과 농인의 차이가 1.0인 시력을 가진 이와 0.1인 시력을 가진 이의 차이만큼이나 작은 문화가 우리의 문화가 될 것을 목표합니다.

 

 

한별_한국여성의전화 대학생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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