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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이것은 우리 국민이 보기에 너무 음란치 않소!”

by kwhotline 2015. 5. 16.

이것은 우리 국민이 보기에 너무 음란치 않소!”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와 관련해 일어난 두 사건 덕분에 한국이 다소 소란스러웠습니다. 지난 318일 종영한 jtbc선암여고 탐정단225일 방영된 11회에서 여고생 간의 키스 장면을, 34일 방영된 12회에서 여고생 간의 포옹 장면을 내보냈습니다. 누군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했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긴 논의 끝에 423, 선암여고 탐정단에 대해 법정제재인 경고’(벌점 2) 조치를 결정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웹툰 사이트 레진 코믹스에서 청소년의 열람을 제한하는 조치 없이 음란물을 유통한다는 의견이 접수되기도 했습니다. 방심위는 업체 측에 통보도 없이 사이트 접속을 차단했다가 이용자들의 항의에 부딪혀 몇 시간 만에 차단을 해제했습니다. 레진코믹스 측에서는 문제가 된 일부 웹툰에 판매 중지 등의 조치를 취하고, 방심위는 심의 의결을 보류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습니다.

 

 

문제가 된 선암여고 탐정단의 동성 키스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 2008, 방송법 제 32조에 따라 방송 내용의 공공성 및 공정성을 보장하고, 정보통신에서의 건전한 문화를 창달하며 정보통신의 올바른 이용환경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치됐습니다. 비슷한 명칭 때문에 방송통신위원회와 헷갈릴 수 있지만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통신 분야의 정책 전반을 규제하는 기구입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단통법이 이들의 작품이죠. 반면, 방심위는 방송·통신 분야 콘텐츠의 내용이 적절한 공정성/공공성을 갖추었는지 심의·의결하는 기구입니다.

 

절차는 이러합니다. 방송 시청자, 통신 이용자가 방송프로그램의 공정성·선정성·폭력성에 대한 내용이나 음란·불법 등에 대한 정보통신 정보에 대하여 민원을 남기면 방심위는 신속히 처리해줄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효율적인 민원 신고를 위해 청소년 방송 모니터[각주:1]도 선발하고, 불법·유해정보 민원이라는 프로그램까지 배포하고 있습니다. 특정 콘텐츠의 부적절성을 가려 제재 조치를 가하는 것 외에도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바른 방송언어 특별상을 시상하기도 합니다.

 

 

△「불법·유해정보 민원프로그램의 사용 예시.

 

방송·통신은 유통의 완벽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거의) 누구나, 어느 때나, 어디서나 접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사회적 영향력 역시 커 좋은 콘텐츠를 만들 책임감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하나, 무엇이 좋고 나쁜 지를, , 방심위가 정해준다는 것입니다.

 

방송·통신분야 콘텐츠의 공정성과 공공성을 추구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이상적인 목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정성, 공공성, 객관성, 바름 등의 단어만큼 공허한 말도 없습니다. 그 기준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개인에 따라 상이하기 마련입니다. 공정성, 객관성 신화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인 뉴스조차도 주제 선정, 워딩(wording), 기사 배치, 사진 혹은 영상의 앵글 등 모든 면면에 주관성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한국을 기반으로 생산되는 방송·통신 콘텐츠의 수용자인 5000만 이상의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기준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깔끔하게 방심위의 위원 9명 중 과반이 그 기준을 정해줍니다. 5000만 이상의 다름들이 한자리수의 아저씨들[각주:2]에 맞춰져야 제재를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423선암여고 탐정단을 놓고 진행했던 방심위 전체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발언이 나왔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데 대해 반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올바른 가치관이 무엇인지는 알고 가야 한다. 이런 인식이 없어지면 사회가 혼란해진다. 동성애는 인정은 하되 올바른 가치관은 아니다 라는 걸 짚고 넘어가자는 거다.” (함귀용 위원)

 

나도 키스신을 많이 보지만 여고생들이 키스하면서 더듬는 장면을 봤을 때 이성 간 키스와 다른 자극을 받고 다른 상상을 하게 된다. 이런 표현이 청소년에게 어떤 영향 미칠 것인가 상상하게 된다. 여고생 딸을 둔 부모가 같이 집에서 드라마를 볼 수 있겠나. 불편해서 못 볼 것이다. 채널을 돌릴 거다.” (하남신 위원)

 

개인적으로 성소수자의 권리는 보호되어야 하지만 이것을 권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방송의 기능 중 공공성을 확보하는 문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주는데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가를 놓고 고민해봐야 할 거 같다.”(조영기 위원)

 

공정성공공성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들이 과연 스스로 목표 삼고 있는 공정성공공성에 닿으려 노력이나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청소년의 성적 지향까지 신경 써주시는 상당히 아버지적인 우리의 방심위는 그 구성도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을 지니고 있습니다. 방심위는 표면적으로는 독립된 민간기구이지만 그 위원들이 행정부와 사법부에 의해 정해지게 되어있습니다. 헌재 역시 방심위를 사실상 국가행정기관으로 인정한 판례가 있을 정도입니다.

 

위축 효과(chilling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규칙이나 규제로 인해 사람들이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위축효과가 큰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겠죠. 심의기구가 제아무리 완벽한들 내 표현행위를 감시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고, 그것이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표현의 자유와 여론 형성에 일정부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명시적인 강압으로 표현을 제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축효과를 겪는 당사자는 정작 표현의 자유를 침해받았음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기 미국 드라마 Modern Family에는 세 가족이 등장합니다. 돈 많고 나이도 많은 제이와, 그의 딸보다 어리지만 글래머러스한 콜롬비아 이민여성 글로리아는 재혼한 부부입니다. 그들 사이에는 글로리아가 그녀의 전남편과의 결혼에서 얻은 아들 매니, 그리고 제이와 결혼 후 얻은 아들 조 형제가 있습니다. 제이와 제이의 전처 사이에 태어난 아들 미첼은 게이입니다. 미첼과 그의 남편 캠은 베트남에서 입양한 딸 릴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트러블이 있긴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이들 가족이 한국 드라마에 등장했을 때가 걱정입니다. 여고생 간의 키스가 언짢고 성인물에 등장하는 성기가 너무도 음란해 보이는 분들에게, 과연 이들의 가정생활이 건전하게 비춰질지, 청소년의 인격형성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비치진 않을지 말입니다.

[각주:3] 

한별_한국여성의전화 대학생기자단




 


  1.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홈페이지에 나오는 소개글입니다 : 청소년 시청자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방송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방송심의에 다양한 연령대의 시각을 반영하기 위해 청소년 방송모니터를 모집·운영하고 있습니다. 선발된 청소년 방송모니터에게는 임명장을 수여하고, 활동우수자는 올해 연말 방송통신심의위원장 명의 표창장 및 기념품 수여 등 혜택이 주어집니다. [본문으로]
  2. 현재 방심위의 위원은 모두 남성입니다. [본문으로]
  3. 방송법 제33조(심의규정) 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방송의 공정성 및 공공성을 심의하기 위하여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이하 "심의규정"이라 한다)을 제정·공표하여야 한다. <개정 2008.2.29.> ②제1항의 심의규정에는 다음 각호의 사항이 포함되어야 한다. <개정 2006.10.27., 2008.2.29., 2009.7.31., 2014.5.28.> (중략) 2. 건전한 가정생활 보호에 관한 사항 3. 아동 및 청소년의 보호와 건전한 인격형성에 관한 사항 (후략)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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