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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페미니즘에 위기 아닌 때가 있었을까?” <석순편집위원회의 편지>

by kwhotline 2016. 2. 17.

페미니즘에 위기 아닌 때가 있었을까?”

고려대학교 여성주의교지 <석순편집위원회>가 선배 활동가들에게 보내는 편지


_고려대학교 석순편집위원회 편집장



저희 석순의 정식명칭은 <석순편집위원회>입니다. 고려대학교의 여성주의교지로 한 학기에 한 번 발간하고 있어요. 한 때는 거의 열 명에 가까운 편집위원들이 편집실을 꽉 채우고 활동했다고 하는데, 몇 년 전에는 1인 체제로 운영된 적도 있을만큼 인력난을 겪고 있어요, 요즘에는 4-5명의 활동인원을 유지하고 있고요. 운영을 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정도는 아니지만 안정적인 수준도 아니예요. 예전에는 석순이 다른 학내 여성단위들과 연대를 맺어 대중사업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요즈음엔 그렇지 못하거든요. 교류를 하고 싶어도 책을 내는 것만으로도 석순의 풀파워를 짜내고 있는 상태기 때문이죠.


저는 석순 편집위원으로 활동한지 1년이 조금 넘었고, 지금은 편집장을 하고 있어요. 제가 석순을 하며 가장 고민하는 것은 석순을 여성주의 교지로만 남겨두지 않는 일입니다. 교지편집위원회니 당연히 교지 발간을 최우선으로 해야겠지요.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가치체계가 사회 전반에 깊숙이 자리한 지금, 학우들은 석순에 큰 관심이 없어요. 가히 노력 인플레이션이라 할 만큼 경쟁이 당연하고 또 치열해진 사회에서 학우들에게 <석순>은 이력과 상관없는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이것은 석순만의 위기는 아닙니다. 고려대학교만의 위기도 아니고요. 전반적으로 교지라는 것에 관심이 없어지고 있지요. 그 와중에 선택의 자유가 언급되며 교지대는 자율납부 형식으로 바뀌는 추세입니다. 기존에는 학생회비에 교지대가 포함되어있는 등 약간의 강제성을 띤 방식이었지만, 분리납부가 시행되면 학생회비와 교지대를 분리해 교지대 납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거죠. 학우들의 선택할 권리라는 입장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학교의 목소리가 아닌 학생들의 목소리, 그리고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학내 자치언론은 경제적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제작비용을 보장 받지 못하게 된 타대학의 교지들이 실제로 폐간되거나 폐간의 위기에 놓여있기도 하고요. 현재 남아있는 학내 여성주의 저널이 <석순><녹지> 정도 밖에 없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사회 기층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전반이 외면당하는 때잖아요.


스펙과 학점 외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기울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학우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석순은 교지 외의 다른 방식도 고민해야 합니다. 교지 발간은 기본사업이고, 보다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공부로만 남아있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엄연한 여성운동의 단위로서 활동해야 해요. 석순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 길이자 학우들로부터 잊혀지지 않기 위한 길이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력도 충분하지 못한 지금의 석순으로서는 많이 어려운 일이겠지만요. 여성주의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진보적 가치나 소수자담론 자체가 외면 받는 상황에서, <석순>이 운동만으로 (당위적 참여기도 하지만요)학우들의 관심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은 카드 돌려막기 같은 임시방편일지도 모르죠. 그러니 여성운동을 통해 학우들과 소통하는 방법 뿐 아니라 당장 학우들의 입맛에 맞을만한 대중사업을 기획하는 것도 필요해 보입니다. 같은 교지인 <고대문화>와도 그간 교류가 거의 없었는데, 최근 들어 성원들 간의 만남을 통해 나름의 연대를 꾀하는 중이기도 하고요.


요즘 제가 꽂혀있는 퓨어 킴이라는 가수가 있어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한 적은 없지만 제가 느끼기에 그는 다분히 페미니스트 끼(!)가 있어요. 저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골머리 앓으며 석순에 20p짜리 글 싣는 것보다 노래 한 곡이 훨씬 효과적이겠다는 충격을 받았거든요. 사람들이 그 숨은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할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건 다루기 나름이겠고. 확실히 지금 페미니즘 진영에 필요한 것은 세련된 화법인 듯 합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긴 글을 읽게 만드는 대중사업과 동시에 새로운 화법으로 페미니즘을 설파하는 것이 필요해요. 동시에 그렇게 알린 페미니즘을 실천의 영역으로 옮기는 Movement를 진행해야하고요.


학내 페미니즘이 위기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석순도 읽는 사람만 읽고, 전체적으로 관심이 없잖아. 여성들도 이제 성평등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몇일 전 함께 술을 마신 친구의 질문이예요. 정당한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저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페미니즘에 위기 아닌 때가 있었을까?”


주류적 시선을 비판하려 드는 모든 사상은 매 순간이 위기입니다. 눈 앞에 닥쳤다고 해서 위기에 좌절할 필요도, 그럴만한 여유도 없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는지를 인지하고 진지한 운동으로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아닐까요? 페미니즘 뿐 아니라 많은 소수자 담론이 위기고, 사회 기층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불평등은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에 맞추어 노력하지 않는 개인의 탓으로 돌아가는 때입니다. 저는 특별히 페미니즘만이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페미니즘이 위기는 아니라는 것이, 페미니즘만이 갖는 고유한 위치를 뭉개버릴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로서 저는 종종 2중으로 된 벽과 싸워야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가부장제나 성별이원제 같은 눈에 뻔히 보이는 벽 말고도 해일이 오는데 조개를 줍고 있냐는 진보마초라는 은근한 벽도 있더라고요.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라는 사실을 절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기분은 맘 맞는 페미니스트들끼리 우스갯소리를 하며 흘려보내는 것이 좋겠지요. 말했듯이 쉽사리 좌절할 필요도 여유도 없으니까요.


뭔가 석순의... 아니, 저의 포부를 밝히는 듯한 글을 쓴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죠. 저희도 그동안 기성 페미니스트들과의 연결지점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참이었습니다. 석순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지면을 마련해주셔서 감사해요. 다음 기회에는 지금보다 한 발 더 진척된 석순의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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