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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후기·인터뷰

[후기] ‘성 개방’과 ‘여성 해방’의 간극

by kwhotline 2022. 8. 5.

‘성 개방’과 ‘여성 해방’의 간극

— 한국여성의전화 <실용연애특강> 은하선 강의를 듣고

 

지혜_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나는 어릴 적 엄마를 따라 미용실이나 병원에 가는 것이 즐거웠다. 엄마가 머리를 하거나 진료를 받는 동안 소파에 앉아 선반에 비치된 여성 잡지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수준으로는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지면이 있었다. 주로 잡지 중후반부에 실리던, 불특정 여성 독자를 상대로 한 섹스나 성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흔한 보수적인 가정 속에서 자라는 중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드물었고, 그런 식의 이야기가 신기했다. 학년이 올라가고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지식을 접했다. 거기에도 당연히 섹스나 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역시나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그것을 모두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또래 친구들이 잘 모를 것 같은 이야기들을 훔쳐 읽는다는 데서 의의를 찾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친구들과 공유하거나 어디 가서 떠벌리지는 않았다. 한국사회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성에 관한 지식을 떠드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 학년이 올라가도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학교나 가정이 제공하는 성교육에는 한계가 많았다. “남자의 성욕은 본능적이다”, “여자는 자위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여자는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를 욕망한다.” 같은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언어들이 정설처럼 여겨졌다.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보다는 성적인 면에서 훨씬 자유로웠다. 물론 체면에 신경을 쓰는 남자아이들의 경우 여자아이들이 있는 앞에서는 그러한 이야기를 조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남자아이들이 야동(그것도 리벤지 포르노나 몰카인 경우가 허다했다.)을 보거나 여자아이들의 외모품평을 자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여자아이들은 없었다. 원래 그런 건, 한 공간에 있다 보면 다 알게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여자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사회가 남자아이들을 교육하는 방식과 여자아이들을 교육하는 방식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같은 학교 남자아이와 잤다는 이유로 ‘걸레’ 소리를 듣고 전학을 간 여자아이도 있었다.

 

 

난데없이 어릴 적 일화들을 차분히 기술한 이유가 있다. 나의 경험이 한국 여성들에게 굉장히 보편적인 것이며, 이것이 여성 억압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다. 억압적이던 소녀 시절을 지나 성인 여성이 된다고 해서 상황이 좀 달라질까? 처음 성인이 되었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닌 것을 안다. 그것을 처음 깨달은 계기는 재미있게도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여성잡지’였다. 어느 날 미용실에 들렀다가 소파 한켠에 비치된 여성잡지 모음을 발견하고 어릴 적 생각이 나서 슬그머니 집어 들었다. 15년 전처럼 지금도 잡지 구석구석에 성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15년 전처럼 그 잡지를 ‘재미있게’ 읽지 못했다. ‘처녀막 재생 수술’ 이야기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어떤 부분들은 갑오개혁 전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퇴행하고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15년 전 ‘재미있게’ 읽었던 여성잡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나는 그 시절 보던 칼럼들이 나름대로 해방적이라고 느꼈는데, 그것은 정녕 여성을 자유롭게 하던 것이었을까? 나는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되살려 아주 어릴 때 훔쳐보았던 ‘남자가 떠나지 않게 섹스 하는 법’이라는 칼럼 제목을 떠올렸다. 그것은 여자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만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여자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가부장적인 여성 억압이 ‘개방적’으로 보이는 문체와 디자인에 가려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도 섹스 이야기를 터놓고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섹스는 담론의 차원이 아닌 ‘개인적인’ 일로 치부되곤 했다. 해결해야 할 ‘비장한’ 담론들이 너무나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찾아왔다.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장에서 『이기적 섹스』의 저자이자 섹스 칼럼니스트인 은하선 씨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은하선 씨가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궁금해서’ 강의를 신청했던 것이었는데,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내가 ‘한국 여자아이’로서 성장하는 내내 느꼈던 불편함에 대해 공감 받을 수 있었으며, 앞으로 한 여성이자 주체로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 게 좋을지에 대한 방향 설정을 명확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 답을 찾았음은 물론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여성잡지’로 대표되는, ‘여성 친화적 매체’가 여성의 성과 사고를 어떻게 억압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은하선 씨는 나와 거의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은하선 씨 역시 어릴 적 가던 병원이나 미용실에서 여성잡지를 보며 자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잡지에 실린 글의 태반은 ‘남자를 만족하게 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일 뿐, 여자 스스로 만족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했다. 비단 잡지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떠도는 ‘여자들을 위한’ 많은 콘텐츠들이 그런 식으로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성적으로 점점 개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걸그룹들의 노출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예능에서도 섹스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이 ‘여성 해방’과 반드시 직결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여성의 관점에서’하는 것이다. 매체에서 소비되는 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남성중심주의적 욕망’에만 근거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은하선 씨의 강의를 들으며 이 점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은하선 씨에게 “애무를 하지 않고 삽입만 하려는 남성을 어떻게 구슬릴지”를 기사로 쓰겠다며 알려달라던 패션잡지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은하선 씨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왜 여자가 그 남성을 구슬려야 하는가? 왜 여자들은 여성잡지를 만들고 여성 칼럼니스트를 데려와 인터뷰하는 와중에도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또한, 은하선 씨는 똑같이 섹스 칼럼을 쓰거나 성에 대한 개방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남성과 여성에 대한 시선이 다르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가령 마광수 씨는 ‘선생님’으로 추앙받지만, 은하선 씨 같은 경우에는 어마어마한 편견에 시달린다고 했다. 자유롭거나 문란할 거라 단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여자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한다고 해서 그 여자가 반드시 ‘많은 남자들’을 만날 거로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여성 혐오적이다. ‘프리섹스’라는 구호에는 ‘원하지 않는 사람과 섹스를 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은하선 씨의 저서 제목, ‘이기적 섹스’에는 진짜로 이기적인 섹스를 하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기적으로 섹스하는 남자들에게서 (그리고 남성중심주의적 문화에서) 여자들이 벗어났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은하선 씨의 이러한 행보는 ‘당연히’ 기존의 마초적 남성들에게 불편하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은하선 씨는 그것에 그리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그는 “내 책을 읽고 기분이 좋아지는 남성이 많을수록 나는 글을 잘못 쓴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그 말에 동감하는 바다. 좋은 글은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에 대한 ‘안티 테제’가 아니던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는 안전한 글을 구태여 쓸 필요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성 해방’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혼 여성이 늘어나면서 ‘남자들이 결혼을 못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기사에 왜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으려 하는지에 대한 분석은 없었다. 은하선 씨는 이에 대해 “남자가 섹스를 못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라’가 걱정해준다”고 말했다. 남자의 섹스는 그만큼 ‘공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섹스는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여초 커뮤니티나 여성 잡지에서는 “김태희랑 결혼해도 전원주랑 바람나는 게 남자다(김태희에게나 전원주에게나 실례되는 말이다)” 라든가, “임신했을 때는 남자가 딴 짓하지 않도록 애무를 해줘야 한다”는 ‘팁’들이 돌아다닌다. 이는 2015년의 해시태그 물결 이후 페미니즘이 온라인상에서 대중적으로 퍼진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SNS에는 착시가 많다. 그리고 세상은 내가 속한 바운더리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런 점에서 여성 섹스에 대한 논의를 선점하고, 그것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끌어올리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섹스하지 않는 여성에게나 섹스를 즐기는 여성에게나 모두 의미가 클 것이다. 사회가 ‘개방’되었으니 성 역시 ‘해방’되었을 거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남성중심 헤게모니를 전제로 한 ‘성 개방’은 전혀 페미니즘적이지 않다. 그러한 부류의 성적 개방은 도리어 남성의 시선 권력에 부합하는 형태로만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착취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성의 몸으로 느끼고, 여성의 언어로 대화하고, 여성의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 본 글은 2016.7.4에 작성된 후기를 다시 게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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