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들의하루 취재기
* 쌤~ 뭐하세요?
한국여성의전화를 습격?하기로 한 날, 불광역 2번 출구로 나와 녹색버스를 타고 사무실 건물에 도착했다. 층계를 오르다 보니 계단 한 칸에 작은 물그릇이 놓여있다. 얼마 전에 새 식구가 됐다던 고양이의 것인 듯 했다. 언덕을 오르느라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씻으며 문을 열자 선생님들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뭐하세요?” 가정폭력상담소 담당 선생님 옆에 쭈그리고 앉아 오늘의 취재 목적을 던졌다. 그러자, 빼곡이 적힌 리스트를 하나 보여주셨다. [1.해외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2. 해외대사관통화 3. 영문메일보내기 4. 피해자 가족 oo씨 소송관련 통화 3.수요일 상담약속 잡기 4.협의회 ........ 9. 고갱이 취재.] 리스트를 쭉 보다가, 항목 9번에 눈이 멈췄다.
“어? 선생님 저도 일이에요? ' 하고 묻자 선생님은 당연하지 않냐며 웃으셨다. 다른 항목들에 대해도 여쭤보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미리~ 지금 통화중?
쉴 틈 없이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여기저기서 들리는 ‘미리~지금 통화 중?’하는 말은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었다. 책상 맡에는 딸 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삐뚤빼뚤한 그림이 한 장 붙어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서류며 메모지가 한 가득이었다. 전화를 받던 목소리가 일순 무거워졌다. 아까 업무리스트에 있었던, 피해자 가족의 상담전화인 듯 했다. “결단이 필요하신 것 같아요. 소송을 할 수 는 있는데, 가족분들이 너무 힘드세요. 증거가 불충분한 사건의 경우에는 아무리 피해자가 돌아가셨어도, 가족분들만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거든요”
*에어컨 구할 데 어디 없겠나~, 그리고 그거 그건 자기가 가늠잡아봐요~
통화내용을 사뭇 무거운 마음으로 듣다보니 너머에 앉은 사무처장님과 신입활동가 선생님의 대화가 들렸다. 출근한 지 이제 이틀째라고 하시던 신입활동가선생님은, 사무처장님의 “자기가 가늠 잡아봐요~” 라는 대답에 한숨을 푹 쉬며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는 중이었다.
“(전화 중인 사무처장) 에어컨 어디 구할 데 없겠나~ 우리 상담가들 상담하는데 에어컨을 좀 놔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사무실 한쪽에 딸린 네 칸의 상담실에 상담원들이 올 때면 사무실 반대쪽 끝 에어컨을 켜고 문을 열어놓는 것이 그나마 임시방편이라고 했다. 그 말에 잠깐 들어가 본 다섯 평 남짓의 상담실 안은 한여름 낮 온도에 정말 후끈후끈했다.
“아 ~돈 쫌 많았으면 좋겠다. 성폭력 쪽에서 프린터는 좀 사면 안되나 ~”
사무처장님은 혼잣말을 꿍얼꿍얼하면서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사무실 어딘가에서 들린 전화통화를 가장한 아우성.
“어? 어떻게 지내냐고? 우리 완전 덥게 지내지~ 우리 사무처장이 에어컨 안 켜는 거 알잖아~ 그래 에어컨이 뭐 좋겠어?”
신입활동가 선생님이 잠시 텀이 생긴 사무처장님의 통화 사이에 다시 끼어들었다.
“선생님 행정안전부에 내는 게 뭐에요???”
*점심시간의 절규
파란꼭지가 드러난 딱풀과 서류더미 속에 파묻힌 회계담당선생님 옆에서 기웃거리고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렇지만 점심시간 10분전에 울린 전화벨이 화근이 될 줄이야……. “여성부가 그런 절차 무시하더라도 주민번호만 주면 비영리민간단체 주겠다는 거야~그게 말이 돼?” ‘00김밥’집 메뉴스티커를 꼬깃꼬깃하게 쥐고 기다린 지 삼십분 째다. 12시 땡 하자마자 ‘쌤~뭐 먹을 거야?’하고 기자단 담당 유연 선생님이 신나게 달려오셨건만 한창 불붙은 화제의 열띤 토론에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괜히 마우스를 달각거리며 이야기를 들으니, 관변단체며 보이콧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입을 열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기 보다는 내 뱃속에서 먼저 소리를 낸다. ‘으 꾸륵꾸륵,.너마저.’ 노려보던 분침이 20분을 지나기 직전 유연선생님의 절규, ‘우리 밥 좀 고르면 안 될까~? 20분 째 밥 못 고르고 있어!!!’
엄마, 아무리 그래도 밥 안주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아!
가까스로 시킨 밥과 각기 싸온 도시락을 앞에 두고 모여 앉았다. 좁은 테이블 탓에 먼저 식사를 끝낸 사람이 일어나면 아직 못 먹은 사람이 와서 앉는, 2부제식 점심시간이었지만 대화에는 끊김이 없었다. 회의시간인 양 이어진 일 거리 이야기들 중에서도 컴퓨터 모니터에 붙어있던 삐뚤빼뚤한 그림의 천재화가 별이의 이야기에 마음이 찡해졌다. 얼마 남지 않은 10월 여성인권영화제 준비며 가정폭력상담 일 등 여러 일에 치인 별이엄마, 미리선생님은 괜히 바쁜 일 때문에 별이에게 심하게 야단을 친 것 같다고 했다. “쬐끄만게 울먹울먹하면서, 엄마 아무리 그래도 밥 안주는 건 좀…’이러더라니까~.”하는 미리 선생님의 얼굴은 아까 있었던 통화때와는 다르게 환히 웃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내 울린 전화벨에 미리 선생님은 다시 전화앞으로 달려갔다. ‘미리~전화좀 받아봐!’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가득한 그 곳
취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바깥에서 쏴아 하고 빗소리가 들렸다. 후덥지근하던 사무실이 빗소리에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취재를 하게 된 것은 활기차면서도 항상 바빠 보이는 한국여성에전화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렇지만 내가 본 것은 글로 쓴 것 이상의 것이었다. 이 날 사무실에는 형사님, 묘령의 꼬마 숙녀, 그리고 회원분들까지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 뿐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곳에서 내가 본 것은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보다, 한국여성의전화사무실은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휴머니스트적 열정이 가득한 곳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고갱이' 원다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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