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성인권 이슈/칼럼

피치 두낫 니드 어 프린스!

by kwhotline 2018. 12. 24.

피치 두낫 니드 어 프린스!

 

갱 한국여성의전화 회원

 


게임 <마리오>의 세계는 대개 일직선이다. 가로로 난 길을 계속해서 전진한다. 해서 이런 장르를 횡 스크롤 게임'이라고 한다. 마리오는 횡 스크롤 액션 장르의 대표적인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갖가지 장애물을 피하며 목적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리오가 전진하는 이 길의 시작과 끝에는 늘 여성이 있다. 주로 여성 캐릭터가 괴물에 의해 납치되고, 납치된 여성을 구하기 위해 마리오의 모험이 시작된다. 납치되는 여성 캐릭터로는 피치'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피치만 납치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초기에는 동키콩(고릴라)에게 폴린'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잡혀갔고, 그 후에는 쿠파'(거북이 괴물)에게 피치', ‘타탕가'(외계인)에게 데이지'가 각각 납치됐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마리오 모험의 시작을 위해 괴물에게 잡혀갔고, 그들을 납치한 괴물들도 남성으로 그려졌다.

 


그중에서도 마리오의 오랜 숙적으로 등장하는 쿠파는 피치와 결혼하고 싶어 하고 이 때문에 피치를 자꾸 납치해간다. 지금에서는 이러한 쿠파의 욕망이 굉장히 기형적으로 보이는데, 사실 80년대 게임에서 결혼'은 굉장히 흔한 요소였다. 패미컴(테이프 모양의 게임 팩을 끼워서 플레이하는 게임 기기) 시절을 회상할 때 사람들이 주로 떠올리곤 하는 <서커스 찰리> 역시 결혼에 대한 욕망 때문에 시작하는 게임이다. 주인공 소년 찰리'는 서커스 단장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타오르는 불 속으로 점프하고 각종 위태로운 곡예를 선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마리오와 비슷한 시기 출시된 <모모코 120%>라는 게임은 여성 캐릭터 모모코'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게임을 다 깨고 나면 마지막으로 모모코'가 결혼식을 올린다. 그게 이 게임의 엔딩이다. (심지어 결혼식장을 나가지도 않았는데 아기까지 태어난다.) 이 엔딩 때문에 한국에서는 게임 제목이 <시집가는 날>로 번역되기도 했다.

 

게임의 서사를 이끄는 주된 욕망이 결혼'이고, 엔딩마저 결혼식'으로 끝나는 이 문법 속에서 결혼 이후의 삶은 서사화될 수 없고 따라서 플레이할 수도 없다.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도 후속 시리즈가 다수 제작되었지만, 늘 같은 서사 구조 속에서 오로지 캐릭터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만 플레이할 수 있다. 닌텐도는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지 당대 많은 게임이 결혼식으로 엔딩을 맞을 때, 마리오만은 끝내 피치와 결혼하지 않았다. 언제나 여성 캐릭터를 구출하는 것까지만 마리오의 역할이었고, 이 때문에 <마리오>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리즈가 지속해서 발매될 수 있었다. 공식적인 엔딩이 없었기 때문에 모험이 끝나도 또다시 쿠파가 피치를 노리고, 납치하고, 다시 마리오가 피치를 구하러 가는 끝없는 서사가 가능했다.

 

내러티브는 늘 똑같았지만 그래도 <마리오>는 꽤 많은 변화를 시도해왔다. 2D에서 3D로 그래픽을 바꾼다거나 새로운 몬스터를 출현시킨다거나 게임 기기를 바꾸는 등 하드웨어부터 그래픽, 진행 방식, 난이도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다양한 면면에서 변화를 추구해왔다. 하지만 유난히 내러티브만큼은 변하지 않았고, 그다지 발전하지도 않았다. 내러티브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개별 캐릭터 자체도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다. 마리오가 배관공'이라는 건 널리 알려졌지만, 필드에서 초록색 배관을 타고 공간 이동을 하는 것 외엔 배관공으로서의 특별한 기술도 없다. 캐릭터와 내러티브가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풍성해지는 게 아니라 늘 같은 형태로 반복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마리오>는 늘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기사' 이야기의 오마주로만 대중에게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다양한 시리즈가 수없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여성 캐릭터 피치는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슈퍼마리오 월드>에서는 마리오 일행과 함께 모험을 떠나기도 했고, <슈퍼 프린세스 피치>에서는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해 마리오를 구출하기도 한다. 피치의 주요 능력치가 생겨났고, 피치가 직접 일구어낸 성취들도 추가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리오> 시리즈의 큰 맥락에서 피치는 계속해서 납치되고 구출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캐릭터로만 그려지고 있었다.

 

 

얼마 전 출시된 <슈퍼마리오 오디세이>도 게임의 서사 자체는 여전히 같았다. 게임의 오프닝에서 피치는 또다시 쿠파에게 납치당한다. 게다가 이번 시리즈에서만큼은 쿠파도 피치와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제대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쿠파는 피치를 납치한 채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결혼식을 공식적으로 올리기 위해서 결혼식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하러 다니며 여러 왕국을 초토화시킨다. 쿠파의 하수인 브리'들은 쿠파의 결혼식을 위한 웨딩플래너로 등장한다. 이 웨딩플래너들은 모자 왕국에서 티아라', 요리 왕국에서 축복의 스튜', 숲 왕국에서 부케'를 탈취하며 꼼꼼하게 결혼식을 준비한다. 마리오는 이들을 뒤따르며 중간 보스 브리들과 대결해 파괴된 왕국들을 재건해나간다.

 

쿠파가 지나쳐 간 왕국들을 열심히 뒤따르다 보면 중간 무렵 도시 왕국'이 등장한다. 뉴욕을 본떠 만든 것 같은 이 도시의 이름은 동키 시티'. 여기에서 마리오가 처음으로 싸운 괴물, 고릴라 동키콩'이 등장한다. ‘동키콩'이 도시에서 사람들을 해치는 건 아니고, 전적으로 동키시티 시장의 관리 아래 있다. 흥미롭게도, 이 동키 시티 시장은 오래전 동키콩'에게 납치되었던 여성 캐릭터 폴린'이다. 폴린은 말쑥한 바지 정장을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도시의 문제를 고민한다. 도시에 문제가 생겼을 때, 마리오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하면서 그녀 자신이 문제의 근원지에 먼저 도착해 있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피치 역시 <슈퍼마리오 오디세이>에서 자신에 대한 혐의(늘 납치당하는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풀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싸움과 모험의 중심에 있지는 않지만, 그녀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을 지켜내려 노력한다. 결혼식을 순조롭게 준비한 쿠파는 결혼식을 여는데, 피치는 결혼식장에서 쿠파의 반지를 받지 않으려고 쿠파와 적극적으로 씨름한다. 쿠파는 억지로 반지를 끼우려 하고, 피치는 이를 받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쿠파를 밀어낸다. 마리오는 이 둘의 사이로 난입하여 피치를 구해내는데 이때 마리오 역시 신랑 예복을 입고 있다. 한 신부를 두고 두 신랑이 싸우는 모양새로 캐릭터의 의복이 구성되고, 이 때문에 플레이어는 이번에야말로 마리오와 피치가 결혼하는 건가?’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피치의 선택은 달랐다. 게임의 엔딩에서 마리오와 쿠파가 각자 서로의 부케를 내밀며 피치에게 구애하는데, 피치는 그 둘을 다소 짜증나고 황당한 표정으로 번갈아 살펴본다. 그러더니 둘의 구애를 모두 거절하고 훌쩍 마리오의 배에 올라타 혼자서 어디론가 출발해버린다. 발 빠른 마리오가 피치의 배에 올라타 함께 버섯 왕국으로 돌아오긴 하나, 피치는 도착하자마자 다른 왕국으로 떠나버렸다. 오랜 기간 납치당했던 트라우마는 말끔히 잊고, 그녀는 여러 왕국을 친구 티아라'와 둘이 돌아다니며 세계 여행을 즐긴다. 그것도 각각의 왕국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곳만 골라 올라 다니면서 말이다.

어떤 플레이어들에게는 그런 피치의 모습이 밉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애써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는 한마디 없이 구애는 모조리 거절하고 세계 여행을 떠나버린다니, 이보다 더 완벽한 김치녀가 어디 있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스시녀지만) 하지만 내 눈에 피치는 정말 멋있었다. 결혼식장까지 끌려가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결혼식을 온몸으로 거절하고 있었고, 마리오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해서 청혼에 꼭 응해야 되는 건 아니라고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결혼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캐릭터였다. 결혼은 (한쪽의 강제적인 압박은 물론이고) 스테이지의 성취나 모험의 완성, 보상 따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슈퍼마리오 오디세이>는 마리오가 여태 유지해오던 공주 구출'의 서사를 결혼'이라는 컨셉으로 구체화하되, 캐릭터들이 결혼을 따르고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면으로 대결하게 한다. 이 안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의지를 분명히 이야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해 나가는 역할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폴린은 도시를 운영하는 시장으로서 여성 리더의 롤모델이 되고(‘도시왕국'의 여자 NPC폴린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 치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세계여행을 떠난 것처럼 말이다.

 

결코 (내러티브의 측면에서)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마리오> 시리즈마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대에 따라 문화콘텐츠 역시 달라지고, 또 달라져야만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슈퍼마리오>만 그런 건 아니다. <디즈니> 역시 <겨울왕국>, <메리다와 마법의 숲> 등을 통해 스스로 구축한 공주'의 상을 깨는 새로운 상상력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고, 주류마저 바꿀 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의 게임 업계는 이를 모르거나, 무시한다. 그 의도적인 무지가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테지만, 아마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