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빚은 '모범 아동'의 세상, 뽀로로

 

갱 한국여성의전화 회원

 



뽀로로

'뽀롱뽀롱 뽀로로' (출처 : 타임트리)



이제 벚꽃 피는 봄이 다가오는데, 내 입가에 착 달라붙은 건 벚꽃엔딩이 아니라 뽀로로송이다. 길을 가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하며 흥얼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제 20개월이 되어가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바로 <뽀롱뽀롱 뽀로로(이하 뽀로로)> 때문이다. 딴에는 여러 만화를 접하게 하고 싶어서 <겨울왕국>도 틀어주고 <메리다와 마법의 숲>도 보여줬지만, 아이는 아직 장편 만화의 긴 호흡보다 짧게 끊어지는 에피소드형 만화 시리즈를 좋아한다.

 

아이 때문에 옆에서 따라 <뽀로로>를 보게 된 지 두 달째, 처음에는 아이가 좋아하니 유료 시즌까지 결제해서 보여줬지만, 옆에서 함께 볼수록 여러 의문이 보글보글 솟아났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래도 기존의 차별적인 성역할을 답습하는 캐릭터 설정이다. 주인공인 뽀로로는 남성인 데다가 파란색이고, 시즌1부터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루피는 완전히 분홍색이다. 특히 루피공주 놀이를 좋아하고, 운동 신경이 매우 둔하며, 요리를 좋아한다. 신나게 놀고 나면 친구들은 저녁에 루피의 집에 모여 앉아 루피가 만든 샌드위치, 파이 등을 먹으며 즐거워한다. ‘뽀로로는 늘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고, 1등에 대한 경쟁심이 강한 데에 반해 루피는 한결같이 왕자님이 찾아오기를 꿈꾸며 남성 캐릭터들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제작 기법은 최신식 3D인데, 캐릭터의 성역할은 성경보다도 고전적(?)이어서 아무래도 비판을 많이 받았는지, 시즌3에서 패티라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가 추가됐다. 운동을 못하고 요리만 잘하는 루피에 비해 패티는 운동을 잘하고 요리는 정말로 못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루피패티는 지붕이 새거나 물건이 부서지는 등의 일이 생기면 늘 남성 캐릭터들에게 수리를 부탁하고, 다른 친구들이 위험에 빠질 때 먼저 나서지 않는다. ‘패티는 다른 남성 캐릭터들에 비해 용감하다는 설정이지만, 모험에 나서거나 위험한 장난을 할 때만 용감함이 발휘된다. 간헐적으로 루피만 요리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친구들이 루피의 요리를 도와주고, ‘패티도 다른 친구들을 날렵한 몸동작으로 도와주는 일이 종종 생기지만, 기본적으로 캐릭터 설정을 뒤흔들지 않는 한 <뽀로로> 내의 근원적인 성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고전적인 여성성을 차용하여 여성 캐릭터들을 비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성 캐릭터도 인간 군상의 다양함을 무시하여 억압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도 우려스러운 건 <뽀로로>의 캐릭터들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스토리텔링이다. 기본적으로 <뽀로로> 세계는 친구 우월주의라고 할 만큼 친구와의 관계를 최우선의 가치로 배치한다. 이 때문에 사건의 인과와는 무관하게, ‘친구들과 화해했으니문제가 쉽게 해결되어 버리는 에피소드가 많다. 예컨대 고릴라 에피소드가 있는데, 뽀로로와 친구들이 고릴라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 차려진 음식을 먹어버린다. 이에 화가 난 고릴라가 음식을 먹은 대신 누군가 한 명 남아서 일을 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누가 남을 것인지 선정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친구보다 자신이 남아 일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고릴라가 감동하여 모두를 풀어준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과정이 다소 뜬금없고 고릴라가 감동하는 포인트가 전혀 이어지지 않아 황당했던 에피소드였다.

 

세계의 가치관에 순응하고, 이를 깨지 않으려는 <뽀로로> 캐릭터들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에디는 자신의 발명품을 깨뜨린 뽀로로와 크롱을 너무 빨리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고(뽀로로와 크롱조차 이 갑작스러운 전개 때문에 어리둥절해 한다.) 친구들의 억측으로 억울한 상황에 내몰렸다가도 친구들이 다시 미안해한마디만 하면 곧 웃는 얼굴로 괜찮아하고 대답한다. 발명품이 깨져서 속상하거나 오해가 생겨 억울했던 것과 같이,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 분명 있을 텐데도 이 감정을 살펴보고 풀어내는 과정은 과감히 생략된다. 그보다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정언명령만이 <뽀로로> 캐릭터들의 전반을 지배한다.

 

혹자는 유아용 만화에 뭘 그런 거까지 바라느냐고 타박할 수 있겠지만, 유아 그림책과 비교해봤을 때 유아 만화의 컨텐츠 발전 속도는 굉장히 느린 편이다. 유아 그림책은 이미 똥이나 방귀와 같은 생리적 현상을 자연스럽고 즐거운 과정으로 탐구하게 하지만, <뽀로로>에서 방귀는 더럽고 냄새 나며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으로 인식된다. 화가 나는 과정이나 화가 다시 풀어지는 과정들을 집중적으로 세밀하게 그려내는 유아 그림책들에 비해, <뽀로로>는 그 과정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빨리 해소되어야 하는 일로 스토리텔링한다.

 

<뽀로로>가 그려내는 세계는 아름답고 즐겁지 않다.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다 뜯어보고 나면, 이들의 일상은 괴롭고 고단해 보인다. <겨울왕국>이나 <메리다와 마법의 숲>처럼 기존의 세계관에 도전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투쟁하는 주인공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캐릭터 하나하나의 내면과 감정을 소중하게 여겨주었으면 한다. 문제가 해결되거나 봉합되지 않아도, 굳이 친구와 초스피드로화해하지 않아도, 고민하는 과정과 폭풍우 치는 감정의 결을 탐색할 수 있는 <뽀로로>라면, 그나마 전 시즌 유료 결제한 과거의 나를 덜 미워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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