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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기타 자료

독박골 “곁에”

by kwhotline 2016. 2. 25.

독박골 곁에

 


손명희 한국여성의전화 공동대표

 



엊그제 밤에는 천둥과 세찬 바람을 타고 비가 내렸습니다. 창이 흔들리고 지붕이 날아갈 것 같은 바람은 요란하기만 할 뿐 기대한 만큼의 비는 내리지 않았지요. 겨울에 이어 봄 가뭄엔 턱 없이 모자란 비였으니까요. 요란한 천둥과 바람이 비를 몰고 온 것이 아니라 비를 몰아 낸 게 아닌가 싶네요. 그래도 그 비에 농부는 논을 갈고 밭을 일굽니다. 우리 집 언덕배기 돌 틈에 봉우리를 올리던 진달래도 그 세찬 바람에 꽃을 피워냈습니다.

 

언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지 모를 서릿발 같은 시대가 있었지만 그래도 민주화의 봄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아침은 온다던 정치인은 대통령도 되었지요. 20여 년 전 폭력피해여성을 지원하는 일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바위가 갈라집니다.” 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을 쓰면서 역사는 정의의 강과 함께 흐른다는 진리를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의전화는 30여 년 전 옥탑의 단칸 셋방살이로 시작했습니다. 화장대를 책상으로 사용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지나, 불광동에서의 내 집 마련, 그리고 20153월 회원 공간 곁에가 열렸습니다. “곁에를 단장하는 회원들의 질주하는 의욕을 지켜보면서 제가 처음 방을 가졌을 때를 떠올립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제 방을 얻었습니다. 엄마의 기대와 달리 공부를 하지 않고 잠만 자도, 나만의 공간에서 꾸는 꿈이 뿌듯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우리 회원들의 설렘과 질주 본능은 여성의전화의 새로운 봄기운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여성의전화 32년의 역사와 활동의 현장은 늘 누군가의 곁에였습니다. 여성의전화는 여성들이 겪는 폭력에 고통당하는 여성들과 늘 함께 있습니다로부터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말하기로 사회의 인식체계를 허물어 왔습니다. 확신과 굳은 의지로 바람 앞에 등불같은 폭력 피해자의 곁에있어 왔습니다. 여성의전화가 여성운동의 방식으로 선택한 상담은 생존자와 어두운 밤길을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길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상담 기법이라는 작은 손전등이 있을 뿐입니다. 그 전등 빛이 흐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상담 수퍼비전과 스스로를 여성주의로 무장하는 밧데리 충전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지난 해 4월은 잔인하게 다가왔고, 그리고도 한 해 내내 우리 사회는 잔인함의 세상이었습니다. 자식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조롱하고 야멸차게 외면하는, 무섭고 잔인한 이 사회를 맞닥뜨리며 내 자신이 이 사회의 일원인 것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그 곁에우리도 함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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