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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기타 자료

독박골에서

by kwhotline 2016. 2. 23.

[들어가는 글]


독박골에서


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낙태반대단체에서 임신상태를 중단하려는 여성들의 이름과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많은 여자들이 그녀들과 함께 에 오르겠다고 했다. 수십 명의 여자들이 모두 제각각 스카프를 머리에서부터 두른 채 배에 오른다. 몇은 다소 비장하고, 몇은 깔깔댄다. “누가 누군지 모르겠죠?”

 

올해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파도 위의 여성들(Vessel)>의 한 장면이다. ‘파도 위의 여성들이라는 단체가 영해 12해리 밖에서는 배의 국적 국가의 법을 적용한다는 점을 이용해 낙태금지국 여성들이 합법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도록 고안해낸 일종의 해방구. 말도 안 되는 논쟁 대신 그들이 택한 재기 넘치는 선내 진입은 그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자 힘이었으며, 조용하지만 뜨거운 연대의 실체였다. “그래, 이런 거지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다 우리의 연대를 떠올린다.

 

반드시 정당방위가 인정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명도 필정이라 붙였던 윤필정 씨 사건. 지난 10월의 항소심 선고에서도 정당방위는 인정되지 않았다. ‘사회적’ ‘통념상식의 벽은 어찌나 강고한 것인지. 아내폭력 피해자들은 죽어서도, 살아서도 통념상식밖에서만 존재해야 한다(그 기막힌 선고재판 참관기는 이번 호에 실렸다). 백방으로 지원방법을 찾고, 면회를 다니고, 편지를 주고받았던 우리 회원들은 재판이 끝나고도 한참 지난 저녁에서야 혼자서들 눈물을 삼켰다. 당연히 상고했다.

 

그 와중에 서울에서도 진해에서도 비슷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글씨보다 무겁고 깊은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편지가 구치소로부터 도착했고, 서명운동도 시작됐다.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지만, 우선은 서로 가만히 등을 쓸어주는 것부터다. 긴 시간 돌아왔지만, 우리가 만났으니까. 그게 다행이니까.

 

쉼터의 아침 풍경도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 서로 잘 잤냐는 인사말을 나누는 것이 너무 행복하단다.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서로의 끼니를 묻는 사이. 그런 사이가 생겼다는 것이 주는 안도. ‘파도 위의 여성들을 응원하는 여자들이 기꺼이 한 배를 탔듯, 여기 독박골에도 비장할 것도 없이 한 배를 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이문재의 시 <어떤 경우>의 전문이다. 우리 모두 혼자지만, 서로에게 타자가 되진 않겠다는 꿈. 그 선량한 꿈을 함께 꾸는 여러분께 베틀의 두 번째 소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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