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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상담을 통해 본 강간 (1989. 9. 5. <베틀>)

by kwhotline 2013. 9. 4.

*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과거 상담 사례를 통해 여성인권의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시작된 1983년부터 30년을 맞은 2013년까지, 그 동안 한국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혹, 아무 변화도 없는 건 아닐까요?

 

첫 번째 순서로 지금으로부터 딱 24년 전인 1989년 9월 5일 발행된 베틀』의 '상담소 소식'을 돌아봅니다.

 

* 베틀』은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행한 소식지의 제호로, 『여성의 눈으로』,『여성, 그 당당한 이름으로』를 거쳐 현재는베틀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베틀1989. 9. 5. 발행, 통권 제41/발행처 : 여성의전화

 

 

<상담실 소식>

 

상담을 통해 본 강간

 

 

 “선본 날 강간당해 결혼했는데 남편은 구타가 심합니다.” “직장상사에게 강간당한 경험이 있는데 남편이 알까 너무나 두렵습니다.”

 

  구타상담으로 주로 알려진 여성의전화가정상담창구를 통해 호소해 오는 강간상담 내용이다. 주로 강간 후 결혼에서 오는 남편의 구타 및 외도에 대한 상담, 또는 다른 남자와 결혼 후 갖게되는 심리적 압박감을 호소해 오는 상담으로 지난 891월부터 6월까지 전체 상담 1642건 중 35건 정도이다. 숫적으로는 적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그 심리적 피해 및 육체적 손상은 매우 크며, 또 숨은 강간 즉 타 범죄와 달리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을 받는 사회통념 아래에서 피해여성의 수치심으로 신고율이 낮고 또 상담내용으로도 그 수가 적은 현실을 감안할 때 강간 그 내용을 분석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강간상담의 내용을 유형별로 몇가지 나누어 보면 첫째, 남성의 결혼 수단으로 강간이 행해진다. 교제중이건, 맞선을 본 직후이건, 교제가 없는 낯선 사람이건간에 순결을 빼앗음으로 해서 여성이 자포자기하도록 하여 결혼할 의도로 행해지는 강간이다. 둘째로는 직장여성의 상사 또는 동료에 의한 강간으로 직장여성에 대해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이용한 압력, 수치심 발동으로 행해진다. 주로 이 경우에 있어서는 성적 노리개감으로 여성을 바라보며 외도의 대상이 된다. 셋째의 유형은 형부의 처제 강간, 삼촌과 조카, 남편과 시누이, 아버지와 딸 등 친인척 남성의 강간으로 이른바 근친상간이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이 문제가 크게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지는 않았으나 여성의전화상담비율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넷째, 신문지상에서 자주 접하는, 또 일반적으로 모두가 강간이라 생각하는, 급작스레 모르는 사람에게 당하는 강간이다. 예를 들면 택시타고 가던 중 기사에게 당하는 경우, 검침원이라 속이고 들어와 칼로 협박, 강간당하는 경우 등 자주 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의 상담에서 알 수 있는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 “강간은 길거리에서 모르는 치한에게 급작스레 당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통념과 달리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많다는 점이다. 즉 숨은 강간이라 할 수 있는데 첫 번째 유형처럼 결혼의 의도로 행해지는 형태의 대부분이 여성의 자포자기하여 결혼을 하게 된다. 둘째, 뿌리깊은 순결이데올로기에 의해 신체적 손상 뿐 아니라 이후 심리적 압박감, 후유증이 심하다. 여성 최고의 가치인 순결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자신의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결혼하거나, 매춘여성이 되는 경우까지 있다. 셋째는 강간 이후상황으로 결혼 후 남편의 구타나 외도 및 남편의 폭력에 적극적 대응을 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강간당했다아니 순결을 목숨걸고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을때는 부정한 여자로 남편의 구타 및 외도의 핑계가 되고, 결혼의 수단으로 강간당한 경우에 있어서는 폭력과 강제를 통해 여성의 자포자기하여 결혼하였기 때문에 이후 구타를 비롯한 남편의 압박에 무감각하여 폭력상황이 가중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렇게 인격의 파괴를 낳는 강간은 폭력이 폭력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정치풍토, 군사문화 아래 더욱 강화된다. 또한 국가정책으로 확대되는 퇴폐문화, 향락산업의 번창이 강간을 양산해낸다. 이로써 건강한 문화, 의식이 말살되고 여성의 성은 더욱 상품화되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도덕의식을 말살시켰다. 또 한 측면으로는 순결을 여성의 최고의 가치로 삼는 정조이데올로기,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등 가부장제사상이 남성의 성적 소유욕을 가중시킨다. 더불어 인격, 생명파괴 행위인 강간에 대해 도덕범죄시 하여 피해자에게 원인을 두고 지탄하는 사회풍토는 여성의 대응을 적극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미약한, 또는 여성의 행위에 초점이 맞춰지는 성폭력처벌법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제는 더 이상, 딸에게 아내에게 일찍 들어와라라는 것으로 강간대책을 세울 수는 없다. 근본적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지 않고는.

 

   다음호에는 강간대책피해자여성의 심리상태, 왜곡된 강간시각을 극복하는 측면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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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월에 발행된 베틀에 실린 상담실 소식입니다. 지금은 20139. 꼬박 24년이 흘렀지만, 상담실을 통해 들려오는 여성들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989년은 여전히 정조에 관한 죄로 성폭력이 규정되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몇 번의 개정을 거쳐 지난 619, 과거보다는 진일보한 개정된 성폭력 관련 법률이 시행되었습니다. 법과 제도는 달라졌지만, 성폭력을 유지시키고, 피해자가 피해를 말하기 어렵게 하는 통념과 인식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성폭력에 대해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 성폭력피해자로 인정받는 현실, 보호받을 피해자와 그렇지 않은 피해자를 구분하는 행태, 여전히 유효한 순결이데올로기,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특히, 1989년에도 지적되었던 “‘강간은 길거리에서 모르는 치한에게 급작스레 당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통념은 여전하여, 지금도 성폭력 예방대책을 세울 때는 CCTV 확충 등 하드웨어를 개선하는 데에 많은 예산과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데이트 상대, 직장 사람, 친인척 등 대부분의 성폭력이 아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 이 현실에 부합하는 대책은 2013년 현재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는 일에는 아주 오랜 시간과 많은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의 본질을 꿰뚫는 근본적인 정책은 반드시 더 많이 입안되고 시행되어야 합니다.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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