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성폭력 무고 타령인가
- “성폭력 불기소나 무죄판결이 무고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대법원 판결에 부처
지난 14일,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는 성폭력 가해자의 역고소로 무고 혐의로 기소된 피해자의 상고심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무죄 취지로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성폭력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이나 무죄 판결이 나왔다고 해서 이를 무고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여전히 강간죄의 구성요건으로 상대방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최협의’의 폭행 또는 협박을 요구하는 해석이 기본값인 사회에서 대부분의 성폭력은 신고조차 되지 못하고, 신고해도 불기소 처분이나 무죄 판결로 결론 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성폭력 피해가 있음에도 무고 혐의 판단의 대상이 되거나 가해자의 역고소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높으며, 툭하면 “꽃뱀”을 찾아대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피해사실을 드러내기 전부터 자신을 향한 비난과 의심, 역고소를 걱정하고 대비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무고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신고한 사실이 객관적 사실에 반하는 ‘허위사실’이라는 요건에 대한 ‘적극적 증명’이 있어야 하며, 성폭력 신고에 대한 무고죄 적용은 ‘상대의 동의가 있었다’는 사실 증명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폭력 신고·고소에 대한 무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는 여느 법리적 해석과 판단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합리적인 의심’, ‘증명력을 가진 증거’, ‘피고인의 이익’ 등의 문구가 사라지거나 다른 범죄와 다르게 차용되는 기막힌 현상을 목격하기 일쑤였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그와 달랐고, 지극히 상식적인 판결임에도 반갑기 그지없다. 성폭력이 아닌 무고와 싸워야 했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지난 6년여의 걸친 피해자의 지난한 법적 투쟁의 결과이며,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보복성)역고소의 제동장치를 요구하며 검찰청 <성폭력 수사매뉴얼> 개정 등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수많은 시민들의 목소리가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해 혹자는 “성별갈등을 조장한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단골 소재는 성폭력 무고이다.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고 항변하는 자, 성폭력 무고 단속과 처벌에 열을 올리는 사회에 묻는다. 1%대에 그치는 낮은 신고율로 환원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은폐하는 현실은 보이지 않는가. 상대의 동의는 없었지만 성폭력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피해자의 옷차림, 성 이력, 경제적 상황, 친밀한 관계, 늦은 신고 등의 정황을 성차별적 젠더규범으로 판단하며, 그 각본에 맞지 않으니 피해자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이고 성폭력이 아닌 것으로 손쉽게 처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피해자가 유발한 것이니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고, 가해자는 ‘호기심’에, ‘성적본능’에, ‘유혹’에 넘어가 ‘우발적’으로 한 것이니 죄를 감면해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에 없는 성폭력과 그 피해자를 ‘진짜’로 상정하며 세상에 넘쳐나는 성폭력과 그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데 심히 기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수많은 목소리가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민낯을 낱낱이 밝혀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어느 시간과 장소, 어떤 관계에서든 발생하며, 피해자를 비난, 의심하는 단서로 이야기되는 것들은 오히려 대부분의 ‘진짜’ 성폭력의 단서이거나 피해자가 폭력적인 관계나 상황에서 대응하기 어렵게 만드는 정황인 경우가 많음을 확인시켰다.
여성이라는 특정 집단에 이토록 무차별적으로, 숨 쉬듯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젠더에 기반에 차별과 폭력의 현실을 직시했을 때, 이 사회의 구성원 누구든, 특히 성별권력관계 등 권력의 우위를 점하는 자들이 폭력 가해자가 될 잠재성은 넘쳐난다. 35세 학원장에 의한 10세 여아 성폭력 사건에 대해 폭행·협박의 증거가 부족하다며 감형하는 판결이 나왔고,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며 영상촬영 하여 남성배우자의 폭력에 대한 명백한 증거로 자신의 피해상황을 알렸던 이주여성은 ‘내연관계’였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비방의 대상이 되며 국적을 주지 말라는 청원이 2만 명이 넘어섰다.
이토록 척박한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변화의 가능성을 믿고 함께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좋은 판례와 승리의 경험이 쌓여가고 있음을 잊지 말자. “단 한 명이라도 내 말을 믿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싸움이었다”는 당사자의 목소리에 신뢰와 지지를 보내자. 더 많이 말하고, 경험을 공유하고 연결시키고, 경험을 해석하는 투쟁을 멈추지 말자. 상대가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성폭력은 아니라는 언설은 가당치도 않게 하는, 어떠한 관계에서도, 어떠한 이유에서도 폭력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의가 법률과 시대의 상식으로, 일상의 문화로 분명하게 새겨지는 세상, 그 세상은 반드시 올 것이다.
* 관련 기사: 서울신문 ‘#미투→무고죄 역고소→ "무고 무죄" 뒤집은 대법’ (2019.07.14.) http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715011006
* 당신과 함께 하는 기억의 화요일 ‘화요논평’ 19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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