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대로 사는 독박골 생활기
은총|한국여성의전화 기획홍보국
“스물네 살에 취직하겠네. 거기에서 오래 있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죠. 전 여기 오래 있을 거예요.”
3년 전, 인문학공동체에서 처음 사주풀이를 받았을 때 오갔던 대화다. 당시 나는 그곳의 먹고, 자고, 싸고, 책 읽고, 글쓰기만 반복하는 간소한 생활이 꽤 마음에 들었던 상태였다. 이 공동체에 뼈를 묻겠다는 호언장담에 풀이를 해주시던 선생님이 일침을 놓았다.
“너 그런 팔자 아니야.”
그리고 2015년 초여름, 독박골에서 고립생활중인 20여명의 활동가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24살에 취직하게 된다는 말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결국 팔자대로 되었다.’라고 단언하기에는 묘하게 어긋난 구석이 있다. 내 팔자는 원치 않는 남자가 몰려드는 피곤한 팔자다. 그래서인지 피시방 사장, 멀티방 사장, 카페 사장, 호프 사장 두 명과 또 한 명의 알바노동자, 공연팀원 20여명. 지금껏 일터에서 만난 모든 사람의 성별은 남자였다.
그런데 21살 이후로 목욕탕과 레즈비언바를 제외하고 여자구경하기 힘들어야 할 운명인 내 앞에 여자들이 떼로 나타나다니. 게다가 일상을 부대끼고 살아가야 하는 친밀한 관계의 형태로! 팔자타령을 하기에는 지속해오던 삶의 궤도를 너무 크게 이탈해 있는 이 만남. 운명인 듯 운명 아닌 운명 같은 이 만남과 두 달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어떻게 부대끼며 지내왔는지 지금부터 ‘썰’을 풀어볼까 한다.
관인상생官印相生
나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단정한 인상의 어린 여자를 싫어하는 고용주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든, 무슨 일을 하던 간에 나는 언제나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싹싹하게 애교를 부리지도 않았고,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발랑 까진데다가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되바라진 여자애였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나를 정말 이상하게 여기던 직장동료가 말했다. 은총 씨는 마음속에 아저씨 하나를 품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반자발적 독박골 감금생활을 함께하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무렵, 활동가중 한 분이 “은총 선생님은 도시여자과’ 인 것 같아.” 라고 말했을 때는 정말 놀랐다. 내가 정말 많이 변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사장을 대하는 태도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카카오톡 해고통보를 받기도 했던 나는, 비슷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어가며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일 잘하는’ 여성이 아니라 일 잘하는 ‘여성’이 될수록 대우도 나아졌고 시급도 빨리 올랐다. 내 안의 아저씨를 숨길수록, 그런 구석을 싫어하는 사람인 척 할수록, 일상에서 발생하는 귀찮은 일들이 점점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내게 된 ‘한국여성의전화라’는 공간의 분위기가 반가우면서도 많이 낯설다. 일러스트 작가든, 영상촬영 감독이든, 분야를 막론하고 이토록 ‘일 잘하는’ 여성을 우대하는 곳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여성의전화에 오고 나서야 이 나라에 ‘일 잘하는’ 여성을 지지하는 환경이 구성된 역사가 없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웃을 때 호탕하게 웃고, 술을 많이 마시며, 미팅 혹은 외근이 없는 날 화장을 하거나 예쁜 옷을 입고 오면 의아해한다. 사무실 유리문에 찰싹 붙은 채 고양이를 바라보며 독백을 속삭일 때나, 누군가가 허기지다고 외치면 뚝딱뚝딱 퀄리티 높은 간식을 만들어 올 때 빼고는 내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의식 되지도 않는다. 한국여성의전화에 출근한 지 두 달 남짓이 된 지금. 내 얼굴은 화장이 다 벗겨졌고, 서클렌즈도 끼지 않으며, 신경 써서 틈틈이 뿌리던 섬유탈취제는 이제 어디서 굴러다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성역할을 얼마나 열심히 쫓아가는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만 여겨지는 곳이 있다는 것. 참으로 어색하면서도 기쁜 인연이다.
한국여성의전화 상근활동가들은 바쁘다. 해가 어둑어둑해진 후에도 사무실에는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등을 구부리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항상 남아있다. 이들 옆에서 나도 매일매일 뭔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이 공간과, 이 사람들에게 배워 가는 것이 훨씬 많다. 나는 사주를 배웠다. 아니, 사실 배웠다고 거창하게 말하기엔 조금 야매다. 선무당 수준의 지식을 살짝 늘어놓아 보자. 사주에는 관성과 인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관성은 조직, 사회생활, 명예나 공적인 관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남편 혹은 남자 애인을 의미한다. 인성은 공부, 깨달음, 지혜, 등 나를 키워주는 힘을 뜻하기도 한다. 이 관계에서 관은 인을 생하고 인은 나 자신의 기운을 살린다. 관인상생은 사회적인 관계가 배움을 만들고, 그 배움이 다시 나를 키워주는 건강한 흐름을 뜻한다.
“넌 팔자에 인성이 부족해서 성공할 궁리하지 말고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해!”
사주풀이를 하며 선생님이 덧붙였던 말이다. 한국여성의전화라는 관인상생의 흐름을 만들어 주는 조직에서 나는 일과 배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인성은 인복 즉,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원래 그렇다며 덮어놓고 넘어가지 않고, 고통을 고통으로, 화를 화로, 잘못을 잘못으로 꼬치꼬치 집어내어 그 상황을 기괴함을 지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공간과 사람들에 접속할 수 있게 태어나 준 내 팔자가 참으로 고맙다.
이곳에서 얻은 배움을 통해 내 안의 아저씨와 발칙한 여자애가 떳떳해 질 수 있는 그 날까지, 수많은 되바라진 여자들이 당당히 ‘나대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인연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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