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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혐오스런 그 여자의 일생

by kwhotline 2012. 2. 28.

혐오스런 그 여자의 일생

s#1 헬스장

“제가 여자랑 일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헬스보이에게 들은 첫마디였다. 대학생인 여자는 슬슬 아르바이트 자리가 필요했다. 마침 그녀의 학교에 있는 헬스장에서 청소하는 학생을 뽑는다는 정보를 들었다. 면접을 보러온 그녀에게 헬스보이는 그녀가 ‘여자라서’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일도 잘하고 힘도 세다는 그녀의 말은 이미 차단된 상태.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여자가 헬스장에 일하러 올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그리곤, 그녀를 채용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를 늘어놓는다. 먼저, 헬스장에선 힘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여자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게 불편하다며, 아니 청소가 너무 힘들어서 못 할 거라며 오히려 그녀를 말리기까지 한다. 문득 여자는 궁금해졌다. 이른 새벽 무거운 쓰레기를 들고, 매일 넓은 학교를 청소해야하며 ‘힘을 써야하는’ 청소부는 왜 나이많고 힘도 없는 아주머니들을 뽑는지.
여자의 눈이 미동도 하지 않자, 헬스보이는 나름 최후의 수단인 듯 보이는 카드를 꺼냈다.
"헬스트레이닝도 좀 시켜야하는데….”


그제야 그의 무지함을 알았다고 훗날 뒷담화에서 전해진다.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학교 친구들은 모교에 있는 여자헬스트레이너들을 모욕하는 행위라며 자기들이 열을 냈다고 한다. 헬스보이의 한마디에 전국에 있는 수백, 수천 명의 여자 트레이너들이 흐물흐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도 남자 지원자가 없자, 헬스보이는 자신이 시키는 일을 군말 없이 잘 할 것 같다는 또 다른 이유로 여학생을 뽑았다. 여자라는 것이 가끔은 구색 좋은 변명이 되기도 한다.


s#2 학교 사무인턴

헬스보이와의 격렬했던 첫 만남이 잊혀져 갈 때 쯤, 여자는 학교에서 사무실에서 인턴을 하던 선배가 일을 관두면서 후임자를 선발한다는 정보를 듣게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연락을 했지만 그녀에게 온 답장은 “미안, 담당자가 여자는 좀 그렇대”.
자칭 인권과 평화를 추구하는 학교에서 벌어진 놀라운 사건. 여자는 화가 단단히 났다. 페이스북에 강렬한 감정을 표출하다가, 이 사건을 알게 된 제 3자가 학교에 제보하면서 이야기가 커졌다. 그리고 그녀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자는 좀 그렇다고 말한 바로 그 담당자였다.

어색했던 그와의 만남은 여자의 눈물과, 그의 변명으로 시작했다. 담당자는 자신은 절대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며, 편협한 사람이아니라고 했다. 그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예전에 잠깐 그 사무실에서 일했던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여자는 서류한번 보이지 못한 채 부당하게 선발과정에 오르지 못했다. 여자라서 안 뽑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보라 따졌다.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신은 다만 남자랑 일하는 게 좀 더 편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여자가 서류선발까지 오지 못한 건, 전달과정에서 여자를 아예 제외한 선배의 탓이라며. 그때 여자는 무언가 떠올랐다. 예전 아르바이트 했던 곳의 남자사장은 여자랑 일하는 게 더 편하고 좋다고 했다. 그래서 비서는 꼭 여자만 뽑는다고 했다. 단지 남자가 편했다는 담당자의 얼굴에서 사장의 얼굴이 겹쳐지는 건 왜일까.

자신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했을 거냐는 아이 같은 질문에, “뽑았겠죠.” 라고 말하는 담당자. 그의 담담한 말이 여자의 가슴에 큰 생채기를 새겼다.
여자에겐 힘든 일을 시키지 않는 사회와, 여자들은 힘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남성. 궁색한 이유로 사용되는 ‘여성’의 이미지는 변명 그 이상도 이하가 아닐 것이다. 억울한 맘에 여자는 캄캄한 유리천장을 바라보며 큰 눈을 깜박인다. 내일은 좀 나아지려나.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페이스북에 글을 남긴다. “여자로서 사는 거 참 힘들다” 그러자 몇 초도 안 되어 댓글이 달린다.
“남자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휴- 빡쳐.



s#3 집

여자는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켠다. 하지만 이내 곧 미간에 세 가닥 깊은 주름이 생긴다. 트는 족족, 모든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은 남자들에게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고, 그것도 모자라 비싼 선물을 받는 장면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딱보니 여자주인공의 어장관리. ‘연약함’을 무기로 상대에게 매번 남자들의 도움 받는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들의 무한한 짝사랑을 등에 업은 채 마치 자신이 자립적으로 성공한 마냥 겸손을 떤다. 거기서 여자는 문득 어떤 여자후배를 떠올린다. 자칭 여성학에 관심이 많다는 그녀는, 자신의 말이 무색하게도 남자들에게 기생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다른 남자와 감성을 나누는 그 후배는 “친구일 뿐”이라며 관계를 일축한다. 물론 자기 혼자만.

<사진출처: 한경닷컴 기사>

여자주인공도, 후배도 짜증나서 컴퓨터를 켜니 인터넷에는 ‘된장녀’와 ‘보슬아치’라는 여자들을 비하하는 말들이 유머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미 여자에게 여러 가지를 뜯긴 일이 있는 남자들의 경험담은 남녀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여자라는 이름의 연약함은 불평등의 상징이자 큰 무기이기도 했다.

여자에겐 괴리감이 느껴지는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누군가에겐 현실이기도 하고 유머이기도 한 불편한 진실. 여자는 민망함과 어떤 자책감사이에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어색함을 잊으려는 듯 다시 텔레비전을 켰다. 막 뉴스가 시작하고 있었다.


s#4 침대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다. 집으로 끌고 가려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으니 성폭행이 일어난 것도 아니지 않냐며.
새벽2시, 여자는 몸을 바싹 웅크리고 잠에 들지 못하고 있다. 뜬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아까 본 뉴스 때문일 거다. 어떤 남성이 여성을 비상계단으로 끌고 가다가 납치 미수로 경찰에 잡혔다는 소식을 봤다. 뉴스에서 보여준CCTV상황은 더 처참했다. 가지 않겠다는 여성과 비상구로 끌고 가려는 남성의 폭력적인 모습. 여자는 흠칫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문득 잊고 있던 그날이 떠올랐다.

<사진 출처: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Main.do?blogid=0TqD6&alllist=Y#ajax_history_home>


즐거운 축제날, 술에 취한 선배가 여자를 집으로 끌고 가려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끌려가다 중간에 멈췄다. 그 후 선배를 마주할 수 없었다. 불편하고 무서운 감정, 뉴스 속 CCTV를 보며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뉴스 속 가해자는 자신은 그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라고 말했다.
“그랬겠지.”
그 선배도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들으면 충분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여자에게 말한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난 거 아니잖아, 그것도 성폭력이야? 네가 예민한 거겠지, 혹은 그러기에 왜 술을 마시냐는 막말과, 그녀가 겪었을 폭력 상태의 고통에 대해선 자신은 느껴보지 못한 것이기에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회피했다. 또 어떤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 알기 때문에 중립을 지키고 싶다며 사건개입자체를 꺼렸다.
여자는 문득 사람들은 어떤 일이 왜 벌어졌는지, 그리고 사건에 따른 피해 결과에만 관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건에 이 논리를 대입해본다. 차사고가 났지만 사람이 다치거나 죽지 않았으니까 잘못된 일이 아닌 걸까?, 돈을 훔치려 지갑을 가져갔지만 다시 돌려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까? 결과적으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한쪽의 잘못이 있었고, 상대는 그의 행동 때문에 피해로 인한 고통 이상의 심리적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사건은 ‘아무것도 아닌’일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그날의 공포는 피해자 혼자 오롯이 갖게 되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가해자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채.

그날의 두려움 때문에 신새벽에 남몰래 흐느꼈던 지난밤들이 떠오른다. 으씨! 이판사판, 법적으로 어쩔 수 없다면 개인적으로 처리해버릴까. 에라, 모르겠다, 내일을 위해 질끈, 눈을 감는다. 새벽4시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한국여성의전화 1기 기자단 '고갱이'_ _황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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