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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여성과 제모 ①] 털 앞에서 왜 나는 작아질까

by kwhotline 2017. 11. 1.


[ 여성과 제모 ① ]

털 앞에서 왜 나는 작아질까


윤선혜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성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을 풀어내는 토크쇼에서 여성의 제모를 다룬 적이 있다. 겨드랑이, 다리털 제모 등으로 한 번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해본 출연자들은 매우 공감한 주제였지만,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느냐’며 이해하기 어려워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쉽게 말한다. 자기가 원해서 하는 제모가 왜 그렇게 문제냐고, 어떻게 여성 억압까지 될 수 있냐고. 하지만 과연 여성의 털이 여성 개인만의 문제였던 적이 있을까? 누군가에겐 선택이지만 여성에겐 그렇지 않은 제모 이야기, 그저 ‘보기 좋다’거나 선호의 문제를 넘어 여성의 제모가 갖는 사회적 의미를 더 깊게 파고들어보자.


  “어제 씻으면서 다리털을 밀었던가?” 옷장에서 반바지를 꺼내던 나는 잠시 망설였다. 손으로 다리를 슥 쓸어보니 삐죽 솟은 털이 유독 까칠하게 느껴진다. 아, 어제 씻으면서 밀어야 했는데……. 어젯밤 더위와 피곤에 찌든 채로 집에 들어와 만사가 귀찮다며 세수만 겨우 하고 잠든 내가 원망스럽다.


 거대한 찜통 속 같은 여름 날씨가 계속되자 사람들의 옷차림은 더욱 가볍고 짧아졌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반소매와 반바지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옷의 길이가 짧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맨살이 더 드러남을 의미하고, 겨우내 잘 감춰왔던 내 털들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녕. 잘들 있었니?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혹자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성큼 다가온 여름을 실감한다고 하지만, 나는 드럭스토어에서 제모 용품을 고르며 여름을 실감한다.


 드럭스토어에서 제모 용품 코너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겨울보다 진열 범위도 훨씬 넓어졌고 ‘여름 필수템’ 판넬이 크게 붙어있기 때문이다. 나란히 줄 서 있는 분홍색 면도기들과 피부 타입, 부위, 방법별로 세세하게 나뉜 제모 용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막막함이 밀려온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제모해야 할지, 밀어야 할지, 뽑아야 할지, 녹여야 할지, 그리고 가격은 또 왜 이렇게 비싼지.

 




 대학가에 위치한 드럭스토어에 두 곳에서 판매 중인 제모 용품 45개를 제모 부위와 방법별로 나눈 뒤 평균 가격을 계산했다(기획구성, 특가상품은 제외했다). 아주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라는 털 때문에 꾸준히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한 것이 사실이다.


 피부과나 왁싱샵을 찾아 레이저, 왁싱 등 전문적인 관리를 받을 경우에는 더 큰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서울대학교병원 건강칼럼에 따르면 영구 레이저 제모 시술 비용은 범위가 좁은 겨드랑이와 비키니 라인은 5회에 50만원 이내, 범위가 넓은 팔다리의 제모는 5회에 100만원 이상의 가격이 일반적이라고 밝혔다. 물론 제모 수요가 증가하면서 매우 저렴한 가격에 시술을 받을 수 있는 곳들도 늘어났다. 


 제모 부위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김지혜(가명, 23세)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인중털을 제모했다. “어느날부터인가 인중털이 유독 도드라지는 것 같아 여성용 면도기로 밀기 시작했어요. 인중은 다리에 비해 범위도 적고 그렇게 귀찮지는 않아요.” 인중털을 밀면 털이 더 굵게 자란다는 말에 망설였지만, “너무 보기 싫다는 생각에” 제모를 시작했다고 한다.


 전문 왁싱샵에서는 인중 털, 손가락 털부터 시작해 머리를 묶었을 때 깔끔해 보이도록 목 뒤 잔털까지 제모해야 한다고 광고한다.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식이 강했던 브라질리언 왁싱도 여러 매체에 등장하며 꽤 보편화됐다. 이전까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위까지도 관리해야 한다는 묘한 압박감을 느낀다. 


 잦은 제모 탓에 상한 피부와 색소침착도 골칫거리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 또 추가로 돈을 써야 한다. 이쯤 되면 그렇게 밀어대는데도 눈치 없이 또 자라는 털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귀찮고 성가신 일인 걸 알면서도 삐죽 올라오는 검은 털을 가만둘 수가 없다. 짧은 소매 사이로 보이는 겨드랑이털이, 치마 아래로 드러나는 다리털이 부끄럽게만 느껴진다. 털이 많다는 이유로 ‘바야바’라고 놀림 받던 친구 생각도 잠깐 한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학교병원 건강칼럼 조회수에 기반을 둔 네이버의 빅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해당 칼럼을 가장 많이 읽은 연령대는 10대였다. 20대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위치했다. 성별 이용률은 여성 57%, 남성 43%로 결과적으로 10대 여성이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실제로 사전 인터뷰를 진행한 8명의 여성 중 6명이 10대에 제모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기숙사 생활을 했던 이지영(가명, 21세)씨는 샤워를 할 때마다 샤워커튼 사이로 친구들과 면도기를 주고받곤 했다고 한다. “교복 치마를 입으면 어쩔 수 없이 다리가 드러나니까 검은 스타킹을 신을 만큼 춥지 않은 이상 항상 다리털을 밀었어요. 친구들이 미니까 왠지 나도 해야 할 것 같고. 저도 겨드랑이는 고등학교 때 처음 밀어봤어요.”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는데 왜 털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지 모르겠다. 이번 여름만큼은 제모 없이 지내보려고 소매가 긴 옷을 여러 벌 샀지만, 찜통더위에 굴복하고 말았다. 머리카락을 기르려고 트리트먼트를 잔뜩 샀다는 친구가 인중에 난 털은 어떻게 뽑아야 하냐고 물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언제쯤 내 몸에 당당할 수 있을까. 내 털들은 언제쯤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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