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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나의 직장생활 생존기

by kwhotline 2017. 10. 30.


나의 직장생활 생존기



목화




* 이 이야기는 가상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로서, 나이, 직업, 회사 모두 실제와 다릅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다


 저는 재작년 4월부터 서초동에 있는 한 로펌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애매한 중상위권 성적의 여성 변호사는 누구도 탐탁해 하지 않는다’는 세간의 소문을 애써 외면하며 이곳저곳 문을 두드리던 중 어렵게 구한 직장이었기에, 반드시 살아남고자 선배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듣고 최소한 한두 가지는 의연히 대처하기로 각오를 다졌습니다. 첫째는 정말 일이 쏟아지듯 많고 초과근무는 일상이 되리라는 것, 둘째는 오랫동안 남초였던 법조계의 성비 불균형과 그로 인한 불편함이 상존하리라는 것. 물론, 각오가 충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데, 업무도 생활도 최소한의 합리성은 보장될 것이라고 은연중 생각했기 때문이죠.


 저의 순진한 믿음은 첫 환영식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6명의 신입 변호사 중 여성이 저 혼자뿐이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날 참석한 구성원 변호사(파트너 변호사)가 두 분을 제외하고 모두 남성이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남초였던 법조계에서 이 정도의 성비 불균형은 어쩌면 당연하겠습니다만, 그 불균형을 직접 한 컷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윗분들은 만남의 기쁨을 폭탄주 잔의 숫자로 헤아리는 분들이셨고 그래서 신입 변호사 모두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셨습니다. 저는 원래 술을 좋아하지만 이런 술자리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첫인상에 미움이 박히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리고 중간에 도망가면 나머지 입사 동기들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 빼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랬더니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너는 여자 변호사답지 않아서 좋다”



통과 의례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인정받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조금 전 발언은 여성차별’이라고 감히 지적할 수도 없었습니다. 털털한 성격을 타고나서인지, “예전에 있던 애는 뭐 말만 해도 울 것 같았는데, 너는 느낌이 통한다. 여성 변호사는 그게 중요한데 잘 하고 있다”라는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침묵하면, 나도 공범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저는 억지로 술을 더 비우며, 웃으며 농담처럼 “에이, 변호사님, 이럴 때면 참 옛날 분 같으세요~” 라고 얼버무렸습니다. 


 미봉책으로 대처하던 도중, 결정적인 사건은 머지않아 찾아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제가 속한 팀의 유구한 전통 중 하나는 젊은 여성 변호사가 입사하면 그분을 유흥업소에 데려가 ‘충성심을 시험’해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의연하게 대처하면, 너는 우리 사람이 되는 것이고, 아니면 ‘이래서 여자애들이랑은 일하기 불편하다’라고 씹고 끝내면 그만입니다. 이 자리를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저는 이 시험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적당히 둘러대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고민했지요. 


 ‘내가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이 일에 침묵하지도, 묵언의 공범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선은 어디까지일까.’


 

남성처럼, 때로는 어린 여성처럼


 노파심에 이야기하자면, 저는 제 입사 동기들에게 ‘너는 남자라서 인생이 편하겠다’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저와 제 입사 동기들은 매일 자정까지 사무실 불을 밝히고 같이 시달리며 살고, 한국사회에는 제가 겪는 것보다 고통의 총량이 훨씬 큰 ‘막내’들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수많은 권력 관계가 교차하는 가운데 말단 사회초년생이 각자 고달픔을 안고 살지만, 분명 “여성 직장인”만의 서사가 있고, 그 서사가 어떻게 전개되든 간에 그 기저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성공한 여성 직장인이 되려면, 그냥 그 사람이 성격이 좋고 일을 잘 한다고 충분한 것이 아니라, “명예 남성”으로 인정받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명예 남성으로 인정받는 절차는 몇 가지 통과의례부터 시작해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이 절차를 성공적으로 마친 일부 선배들은 “나도 여자지만 여자애들이 이해가 안 갈 때가 너무 많다”는 단골 발언으로 동료 남성으로부터 암묵적 지지를 얻곤 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대다수의 여성 후배들은,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성을 타자화하는 데 실패”하고, ‘여자애들’로 묶여 평가받게 될 것이며(남성의 경우, 개저씨나 개부장처럼 개인 혹은 해당 직책 군(群)으로 평가받는다는 점과 대조적입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본인의 결혼생활과 육아를 위해 대부분 직장을 등지게 됩니다. 


 특히 전문직에서는 남성성이 미덕이고, ‘여자처럼 구는 것’은 금기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바람직한 드레스코드부터 사회생활 요령까지 다양하지만 제대로 된 기준이 있을 리가 없는 내용이라 그런지 서로 상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권력을 쥔 남성의 연대에 편입되기 위한 것으로서 자신을 그 연대의 말단으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나 본인은 배제될 수 있고(때로는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미덕이기도 하고) 특히 출산, 육아를 거치게 되면, 그 각본은 도무지 수행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재밌는 것은, 제가 단순히 성격이 털털하다는 이유로 ‘명예 남성 유망주’에 꼽혔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어린 여성”의 역할을 요구받았다는 점입니다. 식사자리에서 아재 개그에 웃어주고 지루한 교양, 자기 인생 자랑을 경청하는 임무를 수행하되, 상사의 업무지시에 또래 남자애들보다는 그의 의견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을 기대받기까지, 그 역할은 예기치 못할 때 오직 상대방의 필요에 따라 요청되었습니다. 비슷한 능력을 갖춘 변호사들끼리도, 남성 변호사에게는 좀 더 중요한 업무가, 여성 변호사에게는 번다하고 사소한 업무가 배당된다는 의심을 하게 하는 순간도 왕왕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괜히 쓸데없는 생각 말고 그 역할도 일상생활에서 편리한 부분(예컨대, 어린 여성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신사적’으로 군다거나)도 있으니 이를 누리라고 했고, 실제로 그 점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요구한 적도 없고 소질도 없는 역할을 단지 내가 이 나잇대의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여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저는 싱글이라 ‘여성이어서 갖추고 있는지 의문스러운 자질’ 예컨대 조직에 대한 헌신을 초과업무로 증명해낼 여력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때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선배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어찌 된 연유에서인지 가사노동을 전담하거나 더 많은 몫을 부담하게 되고, 출산과 함께 체력을 잃으면서 결국엔 야근을 감당하지 못해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보면 눈앞이 캄캄합니다. 애초에 회사가 사람을 적게 써서 벌어진 일인데도, ‘정규 근로시간’만 일하는 탓에 주어진 일을 다 소화하지 못하는 기혼 여성은 상사와 동료에게 모두 천덕꾸러기가 되고, 그녀의 보이지 않는 고군분투를 알아주는 이는 손에 꼽습니다. 오히려 ‘가사도우미를 써서 버티고 있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선배가 한 하소연하자, 일부 눈치 없는 상사들은 ‘우리 애는 알아서 다 자라있던데’라고 킬킬거리거나, ‘여자들 일해서 버는 월급이 다 도우미 월급으로 나갈 거면 본인이 안 키우고 굳이 왜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대꾸하기까지 합니다. 



잘 살아남고자 하는 각오


 통과의례의 밤에, 저는 ‘여성성을 타자화하여’ 인정받는 것의 부당함과 그 정치학의 한계, 그리고 나의 직장 내 생존전략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내에서 ‘여자 마초’라고 소문난 한 선배 변호사가, 혹시라도 의뢰인이 자신이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쁘게 볼까 두려워, 의뢰인에게 ‘잠깐 몸이 안 좋아서 간단한 수술을 하고 왔다’며 출산휴가를 거짓으로 숨겼다는 일화, 다른 모 사기업에서 상사가 여직원을 성추행하자 우선은 담당 상사를 징계하되 그 해 티오에서 여성을 삭제했다는 일화, 매일 식사자리에서 반복되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 가장 어린 여자 막내를 꼭 집어, ‘아, 혹시 이런 말도 요새 여성단체에서 여성차별이라고 하나?’라는 식으로 묻던 질문들, 술자리에서 빠지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비난과 동시에 2차에서 여성 직원이 빠지는 것이 미덕이 되는 시점 등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부적절한 발화나 행동에 맞춰주지 않으면서, 한 사람의 몫을 다하며 조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뾰족한 해답은 얻지 못했으나, 그 대신 ‘할 수 있는 선에서 저항하기’라는 세 번째 각오를 추가했습니다. 물론 슬프게도 그 각오의 대가로 조금이라도 덜 미움을 사기 위해 저를 야근과 주말 근무로 혹사시키고 있습니다만, 우선은 제가 할 수 있는 미봉책을 세워두고 더 나은 생존전략에 대해 고민을 이어갈 생각입니다(그래서 조금 더 용기가 생기면, 네 번째 각오는 ‘직업적 헌신으로 설명되지 않는 노동착취에 대한 저항’으로 할 생각입니다). 그래도 요새는 “여자 변호사답지 않아서 좋다”는 말에 대답하지 않거나, 각자 하기 나름이라고 응수하고, 그래도 말이 길어지면 (짐짓 밝은 얼굴을 지어 보여야 합니다만)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 발언은 여성차별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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