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新 여성인권운동 풍속도

 


은총 한국여성의전화 기획홍보국


 

‘휴거’도 Y2K도 없이 평화롭게 21세기의 태양이 떠오른 지 17년이 지났다. 새천년은 세기말의 난리통이 무색할 정도로 고요히 찾아왔으나, 그 후 17년은 결코 무탈하지 않았다. 2015년에는 영화 <백 투더 퓨처 2>처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우리는 여전히 54.4%의 남성이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가부장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각주:1]

 

그러나 2017년 현재, 여성인권운동에 신흥 기류가 불어 닥치고 있다. 온라인은 SNS를 중심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게릴라성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다. 여성주의 서적은 우후죽순 출간되고 있으며, 다양한 소규모 프로젝트와 여성의 삶 전반에 대해 여성이 스스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공론장이 활발히 생겨나고 있다. 이 기류의 시발점은 2015년 중반 일어났던 ‘메르스 갤러리’[각주:2]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여성들이 여성인권운동을 ‘언어유희’를 통한 ‘놀이문화’로 전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라인 중심으로 시작된 여성인권운동의 新 조류는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기점으로 여성들이 오프라인에서 행동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지금,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이러한 신흥 운동의 효과로 소비, 여가 생활, 삶의 태도 전반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본 글은 아주 가까운 일상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도발적인 변혁의 몇 가지 사례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작성되었다.

 


사랑한다, 공부해라


‘빠순이’라는 용어로 비하되곤 하는 연예인 팬 문화는 좋아하는 스타를 위해 감정과 시간과 경제력을 ‘헌신’하는 문화로 여겨진다. 이 문화는 좋아하는 연예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러한 헌신을 바탕으로 마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쉴드’를 치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객관적 판단력이 부족한 여성적 문화’로 취급되기 일쑤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팬으로 전제되는) 여성은 스타의 콘텐츠에 반응할 뿐인 수동적인 개체로 여겨진다.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신흥 여성인권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체들은 자신의 취미인 ‘연예인 덕질’ 영역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나가고 있다. 이들은 스타의 콘텐츠를 능동적으로 ‘즐긴’다. 성희롱 발언을 하거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른 스타에게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거나, 노래 가사 등 반여성인권적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에 시정을 요구하는 일은 이제 특별하지도 않다. 주목할 점은 연예인 팬 문화 중 가장 ‘비이성적’으로 여겨지던, 스타의 기쁨을 기대하며 선물을 보내는 ‘조공’ 문화의 변신이다. 이들은 더 한 발짝 나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스타에게 페미니즘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이들은 스타를 사랑하는 방식과 내용을 직접 선택·기획하고 이를 위한 ‘즐거운’ 소비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성희롱 발언 이후 팬들의 요구에 따라 사과문을 작성하고, 

선물 받은 페미니즘 책을 인증한 배우 김윤석. 



아이돌 ‘오마이걸’ 팬의 페미니즘 서적 서포트 모금 프로젝트



 

내가 입는 패션이 여성의 패션이다


 


‘로리타 패션’은 서양 동화 주인공의 옷처럼 프릴과 레이스, 리본 등의 장식품이 달린 드레스를 입는 패션을 뜻한다. 언뜻 여성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패션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로리타 여성주의자모임 <로리타 펀치>는 “로리타 패션은 여성이 주도적으로 만들고 소비하며, 여성 주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로리타 펀치>는 “로리타 패션은 세상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패션이 아니”며 당사자인 여성의 말에 주목하지 않고 가부장적인 남성의 시선으로 문화를 해석하는 것을 비판했다. <로리타 펀치>는 활동의 모토를 “로리타를 입고 뭐든지 한다 정도”라고 밝히며 여성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자신이 세운 기준을 떳떳하게 드러내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투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렇기에 “그런 것들을 더 지지하고, 더 재밌고, 더 즐겁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지속가능한 로리타’를 위해 여성공동행동 집회에 참여하거나 정기 소모임을 열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로리타 옷을 입는 의미에 대해,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나가고 있는 것에 대해 로리타를 입고 살아가는 여성들에 대해 정기적인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2060년 페미니스트 나가신다!

 

전국디바협회 로고



"지금 세상을 살고 있는 송하나들과 미래의 송하나가 마음 놓고 게임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행동"합니다.[각주:3]

 

2016년 11월 26일, 박근혜 (前)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에서 유쾌한 패러디로 화제에 올랐던 깃발들 중 <전국디바협회>의 깃발이 있었다. 2060년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 <오버워치>의 캐릭터 중 하나인 디바(송하나)는 천재 프로게이머이자 거대한 로봇을 조종하는 여성 영웅이다. <오버워치>를 이용하는 여성 게이머를 중심으로 구성된 <전국디바협회(이하 전디협)>는 “한국이 지금과 같이 성차별적인 국가라면 오버워치의 배경이 되는 2060년에는 디바와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일은 불가능 할 것”이라며, 성평등한 2060년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게임_내_성폭력’ 이슈를 공론화하는 발화점이 되었으며, 게임을 제작한 디렉터 제프리 캐플런이 게임 콘텐츠에 대한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재해석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전국디바협회에서 제작한 Feminism For Future Female 포스터

 


전디협은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집회와 행진에 참여하거나, <페미니즘 도서 가이드북> 제작을 위한 독서모임을 격주로 진행하고 있다. 또 이들은 페미니즘 굿즈 스토어와 같은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현재 가장 중심적인 활동은 본 원고 작성자의 마음에 불을 지른 전디협배 오버워치 여성게이머대회 <여자 나가신다!>이다. 게이머뿐만 아니라 모든 스태프를 여성으로 기획하고 있으며, 2017년 4~5월 중 예선이 진행될 예정이다. 현재 대회 참여 인원파악을 위한 가신청을 받고 있으며, 신청은 forfuturefemale@gmail.com 으로 <팀명>, 팀원의 <닉네임#배틀태그>, <티어(게임 내 등급)>를 간단하게 적어서 보내면 된다.


  1. 여성가족부 「2016년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 [본문으로]
  2. 2015년 5월 말 메르스 사태가 심각해진 어느 날 홍콩에 여행을 간 두 여성이 메르스 의심환자로 진단받았음에도 당국의 격리를 거부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인터넷 게시판은 두 여성을 비난하는 게시글로 넘쳐났다. 그러나 이것이 의사소통의 오해에서 비롯된 와전된 소식이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그 동안 여성혐오적 악성댓글에 시달려왔던 여론의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디시인사이드 게시판인 ‘메르스 갤러리’에 그 동안의 여성혐오 발언을 남성 대상으로 미러링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남자도 신사처럼, 조신하게 미래의 배우자를 위해 동정을 지켜야 한다.” 같은 과거의 여성혐오발언에 대한 패러디 말이다. [본문으로]
  3. 출처 전국디바협회 트위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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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빚은 '모범 아동'의 세상, 뽀로로

 

갱 한국여성의전화 회원

 



뽀로로

'뽀롱뽀롱 뽀로로' (출처 : 타임트리)



이제 벚꽃 피는 봄이 다가오는데, 내 입가에 착 달라붙은 건 벚꽃엔딩이 아니라 뽀로로송이다. 길을 가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하며 흥얼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제 20개월이 되어가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바로 <뽀롱뽀롱 뽀로로(이하 뽀로로)> 때문이다. 딴에는 여러 만화를 접하게 하고 싶어서 <겨울왕국>도 틀어주고 <메리다와 마법의 숲>도 보여줬지만, 아이는 아직 장편 만화의 긴 호흡보다 짧게 끊어지는 에피소드형 만화 시리즈를 좋아한다.

 

아이 때문에 옆에서 따라 <뽀로로>를 보게 된 지 두 달째, 처음에는 아이가 좋아하니 유료 시즌까지 결제해서 보여줬지만, 옆에서 함께 볼수록 여러 의문이 보글보글 솟아났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래도 기존의 차별적인 성역할을 답습하는 캐릭터 설정이다. 주인공인 뽀로로는 남성인 데다가 파란색이고, 시즌1부터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루피는 완전히 분홍색이다. 특히 루피공주 놀이를 좋아하고, 운동 신경이 매우 둔하며, 요리를 좋아한다. 신나게 놀고 나면 친구들은 저녁에 루피의 집에 모여 앉아 루피가 만든 샌드위치, 파이 등을 먹으며 즐거워한다. ‘뽀로로는 늘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고, 1등에 대한 경쟁심이 강한 데에 반해 루피는 한결같이 왕자님이 찾아오기를 꿈꾸며 남성 캐릭터들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제작 기법은 최신식 3D인데, 캐릭터의 성역할은 성경보다도 고전적(?)이어서 아무래도 비판을 많이 받았는지, 시즌3에서 패티라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가 추가됐다. 운동을 못하고 요리만 잘하는 루피에 비해 패티는 운동을 잘하고 요리는 정말로 못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루피패티는 지붕이 새거나 물건이 부서지는 등의 일이 생기면 늘 남성 캐릭터들에게 수리를 부탁하고, 다른 친구들이 위험에 빠질 때 먼저 나서지 않는다. ‘패티는 다른 남성 캐릭터들에 비해 용감하다는 설정이지만, 모험에 나서거나 위험한 장난을 할 때만 용감함이 발휘된다. 간헐적으로 루피만 요리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친구들이 루피의 요리를 도와주고, ‘패티도 다른 친구들을 날렵한 몸동작으로 도와주는 일이 종종 생기지만, 기본적으로 캐릭터 설정을 뒤흔들지 않는 한 <뽀로로> 내의 근원적인 성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고전적인 여성성을 차용하여 여성 캐릭터들을 비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성 캐릭터도 인간 군상의 다양함을 무시하여 억압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도 우려스러운 건 <뽀로로>의 캐릭터들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스토리텔링이다. 기본적으로 <뽀로로> 세계는 친구 우월주의라고 할 만큼 친구와의 관계를 최우선의 가치로 배치한다. 이 때문에 사건의 인과와는 무관하게, ‘친구들과 화해했으니문제가 쉽게 해결되어 버리는 에피소드가 많다. 예컨대 고릴라 에피소드가 있는데, 뽀로로와 친구들이 고릴라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 차려진 음식을 먹어버린다. 이에 화가 난 고릴라가 음식을 먹은 대신 누군가 한 명 남아서 일을 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누가 남을 것인지 선정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친구보다 자신이 남아 일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고릴라가 감동하여 모두를 풀어준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과정이 다소 뜬금없고 고릴라가 감동하는 포인트가 전혀 이어지지 않아 황당했던 에피소드였다.

 

세계의 가치관에 순응하고, 이를 깨지 않으려는 <뽀로로> 캐릭터들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에디는 자신의 발명품을 깨뜨린 뽀로로와 크롱을 너무 빨리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고(뽀로로와 크롱조차 이 갑작스러운 전개 때문에 어리둥절해 한다.) 친구들의 억측으로 억울한 상황에 내몰렸다가도 친구들이 다시 미안해한마디만 하면 곧 웃는 얼굴로 괜찮아하고 대답한다. 발명품이 깨져서 속상하거나 오해가 생겨 억울했던 것과 같이,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 분명 있을 텐데도 이 감정을 살펴보고 풀어내는 과정은 과감히 생략된다. 그보다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정언명령만이 <뽀로로> 캐릭터들의 전반을 지배한다.

 

혹자는 유아용 만화에 뭘 그런 거까지 바라느냐고 타박할 수 있겠지만, 유아 그림책과 비교해봤을 때 유아 만화의 컨텐츠 발전 속도는 굉장히 느린 편이다. 유아 그림책은 이미 똥이나 방귀와 같은 생리적 현상을 자연스럽고 즐거운 과정으로 탐구하게 하지만, <뽀로로>에서 방귀는 더럽고 냄새 나며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으로 인식된다. 화가 나는 과정이나 화가 다시 풀어지는 과정들을 집중적으로 세밀하게 그려내는 유아 그림책들에 비해, <뽀로로>는 그 과정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빨리 해소되어야 하는 일로 스토리텔링한다.

 

<뽀로로>가 그려내는 세계는 아름답고 즐겁지 않다.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다 뜯어보고 나면, 이들의 일상은 괴롭고 고단해 보인다. <겨울왕국>이나 <메리다와 마법의 숲>처럼 기존의 세계관에 도전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투쟁하는 주인공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캐릭터 하나하나의 내면과 감정을 소중하게 여겨주었으면 한다. 문제가 해결되거나 봉합되지 않아도, 굳이 친구와 초스피드로화해하지 않아도, 고민하는 과정과 폭풍우 치는 감정의 결을 탐색할 수 있는 <뽀로로>라면, 그나마 전 시즌 유료 결제한 과거의 나를 덜 미워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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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여성인권영화제 10회 기념 포럼의 정민아 영화평론가 발제문입니다.


영화의 폭력 이미지: 고통의 카메라, 외설적 카메라


정민아 영화평론가




1. 흥행 영화 키워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영화』 78호에서는 2012년 이후 흥행영화 키워드로 ‘사회성’, ‘애국’, ‘부성애’를 들고 있다(www.kofic.co.kr). 몇 년간 부성애, 사회성, 애국 코드에 덧붙여 복고 코드가 영화시장에서 통하는 키워드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명량>, <국제시장>, <부산행>, <터널>, <암살>, <밀정> 등에서 보듯이, 각각의 키워드는 독립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서로 엮인다. 이러한 영화들의 흥행은 사회 안정성의 위협, 국가 시스템에 대한 의심, 가족 해체의 두려움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들 영화에서 여성의 자리는 많지 않다. 대개 여성들은 한 평범한 남성이 위기의 순간에 대오각성하고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서사를 위해 단순하게 소비되고 만다. 위기에 빠진 아내와 딸이거나, 동료일지라도 보조적 인물로 그려지고, 혹은 약한 희생자이어서 남자 주인공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한국영화 제작 경향은 이렇듯 한 성별에 일방적으로 초점이 맞춰지고 남성 서사 위주로 영화가 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는 한국영화산업의 현재가 남성 제작자에 의해 주도되는 이유뿐만 아니라 실은 관객 취향과도 관계가 깊다. 다시 말해, 여성 서사 영화는 흥행을 끌기 어렵고, 액션, 스릴러 장르를 위주로 하는 남성 서사 영화에 더 많은 관객이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는 디지털 시대 이후 스펙터클이 강조되는 스케일이 큰 영화의 선호, 남성 스타 위주로의 산업 재편, 경제 위기 이후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 등 몇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필자는 여기에 ‘걸크러시’라는 키워드를 더하고 싶다. ‘여성이 여성에게 반한다’는 의미의 걸크러시는 2015년 이후 여성 영화배우, 랩 가수, TV 연예인을 대상으로 널리 사용되는 대중적인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칼럼니스트인 마리사 히긴스의 경우, 잡지 『xoJane』에서 걸크러시라는 단어 사용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전개한다. 그녀에 따르면, 한 여성의 다른 여성에 대한 감정에서 보이는 내면의 동성애적 성향을 인정하지 못해서 걸크러시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단어는 동성애자들을 심리적으로 더욱 고립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고스트 버스터즈> 스틸컷 사진 출처 : mydaily.co.kr



지난해와 올해 걸크러시를 보여주는 영화들의 등장이 흥미롭다. 지구가 완전히 파괴된 후 여성영웅의 등장을 그린 고강도 여성 액션 블록버스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조타수 역할을 했다. <매드맥스>의 성공 이후 걸크러시 영화들이 줄줄이 시장에서 성공했는데, 여성 첩보 액션 코미디 <스파이>, 루크 스카이워커의 딸이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스타워즈>, 젠더 역할 뒤집기를 보여준 액션 코미디 <고스트 버스터즈>, 어머니를 마음속의 등불로 삼고 일어서는 여자 성장담 <와일드>, 여성 퀴어영화 <캐롤>, 참정권 투쟁을 그린 시대극 <서프러제트>,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녀와 아씨의 사랑을 그린 <아가씨> 등이 있다.  


20-30대 젊은 여성과 젊은 성소수자 수용자들은 여혐·남혐 논쟁, 온라인 젠더 논쟁을 거치며 페미니즘 리뉴트를 경험하고 있다. 이들은 대중문화의 주류 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는 젠더 편향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수용자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대중문화 소비 활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2. 또 하나의 키워드 ‘성폭력’ 


걸크러시라는 긍정적 키워드와 함께 또 다른 키워드 ‘성폭력’이 최근 부쩍 눈에 띤다. <매드맥스>, <스포트라이트>, <룸>, <내부자들>, <귀향>, <곡성>, <아가씨> 등의 영화에서는 여성 성폭력이나 아동 성폭력이 중요한 영화적 소재로 쓰인다. 걸크러시 현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성폭력 소재 영화들에서 성폭력의 재현은 이전과 달라지고 있는가 하면,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스틸컷 사진 출처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매드맥스>에서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지구에 새로운 폭군이 등장하여 생식능력이 있는 젊은 여자들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끊임없이 임신하게 한다. <스포트라이트>는 미국 가톨릭 신부들의 아동 성폭력을 파헤치는 기자들의 활약을 다루는 실화영화이며, <룸>은 7년 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성노예로 착취당하다가 필사의 힘으로 탈출한 한 여성의 실화를 다룬다. 이 영화들은 성폭력이 서사의 중심 사건이지만 성폭력 묘사는 거의 배제된다. 성폭력 장면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후 인물들이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가 서사의 중심이다. (예: <룸>의 성폭력 장면)   

영화에 이야기가 도입되기 시작하던 초기 시대부터 영화는 “남자와 여자와 총”(D.W. 그리피스)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폭력은 영화의 필수 성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르영화가 생겨나기 시작한 100여 동안의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발달과 관객 의식의 변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이 영화의 폭력 묘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면 한국영화로 들어와 보자. 영화의 폭력 이미지 묘사는 동시대 사회의 젠더 감수성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시각 스펙터클이 중요한 요소인 영화는 선정성으로 시장에 즉각적으로 호소하려는 속성이 있어 폭력 이미지를 더 과잉되게 그려내곤 한다. 이러한 영화들은 일명 익스플로테이션(exploitation) 영화라고 불린다.   


한국 장르영화의 성장과 함께 폭력 재현이 과잉되게 남발되고 있는 현재, 폭력 이미지 재현에서 윤리성, 제의성, 방어기제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미디어의 폭력 이미지 묘사는 위험하고, 모방범죄 등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표현을 법률로써 제재해야 한다는 것이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다. 폭력이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이미지 재현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쁜 것은 폭력 이미지를 물신화해 포르노그래피식의 쾌락을 얻게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폭력 장면을 예술적으로 그렸다고 지지를 받는 경우, ‘폭력 미학’, ‘헤모글로빈의 시인, ’폭력의 피카소‘ 등과 같은 별칭을 얻곤 하는데, 여기에는 폭력 장면을 보는 철학적 의미가 있다. 영화의 폭력을 이해하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제의론은 영화의 폭력을 인간이 지닌 디오니소스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제의로 간주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전쟁과 광기로 터져 나올 폭력 충동이 영화로 인해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적응론은 속도감, 과잉 자극이 특징인 근대 사회에서 영화는 “대중적 정신 이상에 대해 정신적 예방 접종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발터 벤야민,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는 주장과 관련이 있다. 영화의 폭력 이미지는 현실의 폭력 에너지가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방어기제론은 예로부터 조각난 신체에 매혹된 사람이 자아의 통일성을 위해 타자를 조각내려는 충동이라는 본성을 영화나 시각문화를 통해 정화한다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이론은 정치 리더들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 등 폭력의 시대에 과격해진 할리우드의 스크린 폭력이나, IMF 시기의 조폭영화, 시민에 대한 폭압이 가해진 보수주의 정권기의 스릴러 영화의 번성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폭력영화 마니아 중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게 사실이다. 폭력 이미지에 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폭력 이미지 이면에 놓인 정치적 메커니즘이나 사회적, 젠더적 폭력 구조에 눈을 돌려야 하지만 화려한 폭력성은 이를 방해하곤 한다. 주관적 폭력의 직접성으로부터 눈을 돌려 “객관적 구조적 폭력을 응시”(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해야 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밀양> 공식 스틸컷

이창동 감독은 <밀양>을 찍은 후 한 대담(《씨네21》, 602호, 2007. 5)에서 “영화가 그렇게 윤리적인 매체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영화가 관객의 영혼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윤리적 화두를 던진다. 공포영화에서 클리셰가 된 장면이 있는데, 연쇄살인마가 여성 희생자를 쫓을 때, 카메라는 여성을 보는 살인마의 시점과 놀란 여성의 시점을 오간다. 관객인 우리는 두 시점을 번갈아 점유하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살인마가 여인을 끔찍하게 살해할 때, 완수의 쾌감을 느끼는가, 아니면 고통을 느끼는가. 복수의 시점이 균형을 잡아 줄 수 있을까. 무의식에 자리한 파괴적 충동을 살려내는 순간은 아닌가. 여기에서 영화의 폭력에 탐닉하는 폭력성의 포르노그래피라는 문제가 생겨난다. 


파퓰러 페미니즘의 확산과 여성주의를 둘러싼 사회의 인식 변화와 함께 영화계 내부에도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주류영화에서 남성 서사의 장르영화가 많지만 여성 캐릭터 표현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 장면 연출에서 여성관객을 의식하는 점이 보인다. CGV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상반기 여성관객이 61%라고 하는 점(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 78호)에서 볼 때에도 여성관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 <곡성>의 성폭력 묘사 장면) 


2000년대에 나온 조폭영화에서까지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강간 장면은 장르 컨벤션이었다. 조폭 사이의 신체적 폭력처럼 여성에 대한 강간도 일반적 폭력 장면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러한 문제들이 많이 시정되고 있는 지금,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에서 나타난다. 여성 중심 서사의 성폭력 묘사 사례를 보자. <귀향>에서의 성폭력 장면이다. 


이 장면은 역사 속 고통스러운 순간을 현재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 꼼꼼하게 연출되었다. 일본군 ‘위안부’가 처한 가장 잔인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꽤 오랫동안 이 장면을 봐야지만 관객이 위안부 피해자의 감정에 이입하고 그들을 애도할 수 있을지 질문할 차례다. 고통스러운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모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창작자가 강제한다. 이러한 꼼꼼한 묘사는 성폭력을 스펙터클화하고 피해자를 성적 묘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순결을 잃은 소녀’ 서사는 소비적 감상주의로 인해 구조적 폭력을 보기 힘들게 한다. 사악한 일본군의 얼굴과 멍든 조선 처녀의 얼굴의 대비는 폭력 이미지 뒤에 숨은 사회의 구조적 폭력, 즉 군국주의 가부장제 국가가 여성으로 젠더화된 식민지를 집단 강간했다는, 역사적 맥락 및 국가 시스템을 지워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성 피해자의 수난 장면을 꼼꼼하게 재현하는 것을 통해 불행한 타자를 이상화하는 태도는 기만적이다. 이는 자아의 무능력을 은폐하려는 시도이다. 좌파, 우파, 남녀노소 관객을 아우르며 <귀향>은 흥행에서 성공했지만 주관적 폭력으로부터 객관적 구조적 폭력을 응시하도록 하는 영화서사 구조의 결핍으로 인해 영화는 단순하게 소비되고 말았다. 윤리적 착각이라는 면에서 영화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진다. 영화를 보러가는 것이 마치 행동하는 시민이 된 것 같은 착각 말이다. 개인의 죄책감과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상의 인식의 확장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영화는 선동적 프로파간다에 그치고 만다. 


3. 젠더 스와프의 가능성     

 

브로맨스 영화의 전성기, 아재 예능의 전성시대다. TV 예능 버라이어티의 멀티 MC 체제에서 성공한 여성 MC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재’, ‘아빠’가 예능의 흥행 키워드가 되었다. 돌보는 아빠, 요리하는 남자, 놀고 꾸미는 아재 사이에 낀 여성은 욕 받이 비호감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여자 연예인은 진짜 사나이가 되어야 하고, 예체능에서는 남자와 함께 몸으로 대결해야 하며, 여자 개그맨은 철부지 남자를 이끄는 가모장이 되어야 한다. 


브로맨스 영화에서 여성은 아픈 아내(<아수라>, <신세계>), 마담(<범죄와의 전쟁>, <타짜>), 희생양(<내부자들>, <아저씨>), 덜 성숙한 동료(<소수의견>, <감기>)이다. 역사는 룸살롱에서 이루어지고, 접대부와의 동영상이 협박의 만능키로 등장한다. 딸은 울고 있고, 아내와의 감정적, 육체적 교류는 거의 없다.   


이미지 출처 : 일간스포츠 - 중앙일보이미지 출처 : 메트로



여기에 소수의 여성 중심 서사 영화가 있었다. <차이나타운>은 갱단 두목을 여자로, 그리고 그의 뒤를 잇는 차세대 리더 역시 여자로 설정했다. 어린 여성 갱은 순결무구한 또래 남자로 인해 비정한 갱스터 세계의 속성을 깨닫게 되는데, 이 영화의 서사구조와 캐릭터는 기존 남성 중심 갱스터 영화에서 성별만 바꿔놓은 것이다. <아가씨>의 경우 레즈비언 무비의 시장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영화이지만, 펨-펨 레즈비언 커플은 충무로 남성 감독의 시선에서 쾌락적으로 그려진다. 영화의 아름다운 레즈비언 커플은 남성 시선에서 볼 때 덜 위협적이어서 수용에 별 문제가 없다. 여성감독이 만든 <비밀은 없다>는 사회의 여혐 현상을 은밀하게 투영하는 대담한 성 정치학 텍스트이지만 관객의 악평에 시달리며 처참한 성적을 남기고 금세 극장가에서 사라졌다. 씁쓸한 결과로 아직 갈 길이 멀게 만 느껴진다.   


일방적으로 하나의 젠더 재현이 휩쓰는 한국영화계 현실에서 다른 재현과 다른 감각을 펼치는 할리우드의 젠더 스와프 현상을 지켜봐 할 것이다. <매드맥스>, <고스트 버스터즈>, <스타워즈> 등 여성 액션 주인공 영화에 이어 ‘엑스맨’을 여성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는 계획은 확실하게 성사되고 있고, 007의 새로운 본드로 여자배우도 후보에 올릴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세계 영화계의 경향이 이러할진대 우리 영화계도 관객의 선택이라는 이유를 들어 브로맨스 영화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재현과 다른 감각과 다른 시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관객의 영리한 관람 행동이 중요하다. 


4. 여성인권영화제 출품작 경향과 그 외






데이트 폭력 문제, 성폭력 이후의 트라우마, 동성애 등을 다룬 단편영화들이 최근 많이 출품되고 있다. 대중 페미니즘의 확산이 그 이유인지, 몇 년 전만해도 왕따 문제, 실업 문제, 사회생활 문제, 가족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많았는데, 조금씩 경행이 변화되고 있는 것이 체감된다.  


폭력 문제, 폭력 이미지는 대중적으로 소비되거나 설득되기 쉬운 문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객관적 구조적 폭력을 응시하지 못할 때의 폭력 이미지는 익스플로테이션이 되고 만다. 사건 그 자체의 비극성에 집착하며 개인의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애도의 행위가 아니며 표면의 전시일 뿐이다. 또한 폭력 이미지 그 자체의 탐닉적 묘사, 혹은 폭력의 순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은 위험하다. 영화에서 폭력 이미지는 어떻게 조직되는가의 문제와 관련을 맺어야 한다. 


세상은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곳이다. 폭력은 세상에 늘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폭력의 작가들이 필요하다. 문제는 쾌락인지 고통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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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혼 법제화, 나와 세상을 받아들일 용기

다큐멘터리 <사회학자와 곰돌이>


최호연 페미디아


감독(오른쪽)과 통화하는 사회학자 이엔 테리(왼쪽) / 사회학자와 곰돌이(SOCIOLOGIST AND POOH, 2015)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해 현명한 결론을 내릴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당연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갓 스무 살이 된 2년 전의 난 "동성 결혼 법제화까지는 지지하지만, 동성 부부의 자녀 입양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 정리가 안 됐어" 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어쩐지 남성 양육자와 여성 양육자의 돌봄을 골고루 받아야만 아이가 건강하게 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굽히기 싫었고, 동성 부부의 자녀 입양에마저 동의하는 '너무 멀리 나간 사람'으로 보이기 싫다는 이유 모를 마음도 있었다. 약자의 인권이나 정치적 존재로서의 내 삶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본 적 없었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한 흑역사다. 비슷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아마 나 말고도 많겠지. 


이러한 우리를 위로하는 듯, 사회학자 <이렌 테리>는 영화의 막바지에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은 자기들의 생각이 변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걸 싫어해. 그건 본인이 과거에는 틀렸고 지금은 맞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꼴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생각의 변화는 '틀림에서 옳음으로의 과정'이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언제나 '틀린'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어. 세상은 계속 변하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의 이면을 말하다 <사회학자와 곰돌이>


<사회학자와 곰돌이>는 2012년 9월부터 2013년 5월까지, 프랑스에서 진행된 동성혼 법제화와 관련된 논의의 진행에 대한 영화다. 감독은 사회학자 이렌 테리와의 대화를 통해 지금껏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실은 얼마만큼의 투쟁과 변화를 거치며 만들어졌는지, 의심의 여지 없이 무언가가 '당연하다'는 믿음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틀어막혀 왔는지를 보여준다. 


고용주의 아이를 갖게 되어 더럽다는 소리를 들으며 주인집에서 쫓겨난 이렌의 증조할머니, 아빠 없는 아이라는 불명예를 씻어내고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결혼을 택한 이렌의 할머니, 2차 세계대전 후 연인과 결혼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살아간 이렌의 어머니, 그리고 결혼 제도 자체에는 회의적이었지만 파리로 발령을 받기 위해 연인과 시청에서 간략하게 결혼식을 올린 이렌 본인. 네 세대를 거치며 결혼 제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요소들도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동성 간의 결혼 또한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시대가 왔다.


"성소수자들은 왜 하필 지금에서야 결혼할 권리를 요구하나요?"라는 감독의 질문에 이렌은 답한다. 오래전 성소수자들은 자기의 성적 지향을 숨기고 이성과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서 겉보기에 '정상'으로 여겨지는 삶을 살아냈다고. 결혼 제도밖에서 배우자 몰래 동성 애인을 만나는 이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다 베이비 붐 세대의 성소수자들이 이성 배우자와 가정을 만드는 이중생활을 택하길 거부하고 벽장 속에서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식을 기르며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하는 성소수자들도 여전히 있었다고. 여자와 남자가 만나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편적인 모델로 내세우는 이성애 중심적 사회는 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성소수자들을 침묵시켜 왔다. 그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지켜내고 주장해온 동성애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고, 이제야 비로소 대중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동성혼 법제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프랑스에 필요한 건 동성애자가 아니라 아기들이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 가정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등의 구호를 내걸고 시위를 한다. 성소수자들을 존중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거라며,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보편적 본보기로 여겨질 순 없다고 말하면서 본인은 호모포비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미 동성 커플에 의해 길러지고 있는 아이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건 맞지만, 소수의 그들을 위해 법 전체를 갈아엎을 필요는 없다고, 가정이 튼튼하지 못하면 사회도 튼튼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들과 동성 부부의 입양에 쉽게 찬성할 수 없다고 말하던 2년 전의 나는 대체 뭘 지켜내고 싶었던 걸까. 누구를 위한 주장이었을까. 몇 년 후, 몇십 년 후 우리는 그때 지켜내고 싶어 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어떤 생각을 할까. 부끄러움을 느낄까, 아니면 결국에는 지켜내지 못한 무언가를 계속해서 아쉬워할까. 




혹자는 아이를 기르고 가정을 꾸리겠다는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사회적 정상성의 구조에 순응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정상적인 본보기로 여겨지는 삶을 누구는 마음 편히 누리지만 다른 누구는 손쉽게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차별의 증거인데, 이미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사회 모든 정상성의 구조에 맞서 싸우기를 요구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동성혼 법제화가 동성애자 이외의 다른 성소수자들을 차별하는 정상성을 재생산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네 명 다섯 명의 사람들이 부부의 연을 맺고 싶어 한다면? 양육자와 피양육자들의 조합이 아닌, 다른 형태의 관계로 가족을 구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에 따르는 무게를 나누어 짊어져야 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건 세상에서 온전한 1인분의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상성의 모델을 거부하고 시위하는 이들만의 몫일까. 


결국, 2013년 봄, 프랑스 의회에서 찬성표 331개와 반대표 225개를 얻고 동성혼이 법제화된다. 이 이후로도 특정 집단에 붙는 비정상이라는 꼬리표를 조금이라도 지우고자 노력하려는 목소리는 계속 나올 것이다. 무언가가 '당연하다' 혹은 '옳다'는 지금 나의 믿음이 사실은 누군가를 억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깨달음을 받아들일 용기를 우리는 갖고 있는가.





* 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 페미디아는, 여성과 여성주의, 여성운동에 관련된 외신을 번역하고, 국내/외 연구를 소개하며, 여성주의적 시선의 비평을 싣는 온라인 여성주의 매체입니다. 최호연은 페미디아 연구소개팀에서 편집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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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에는 성별이 없다

다큐멘터리 <성평등을 코딩하라>


갱 만화평론가, 프로그래머




첫 사회생활을 IT 회사에서 시작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꾸준히 '개발'을 해왔다. 일보다 인원이 부족하여 개발과 관리 직무를 오갔으나, 관리 직무를 수행할 때라도 자잘한 개발 일들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이직으로 인해 전 직장의 선배들과 송별회를 할 때의 일이다. 거나하게 취한 우리는 '개발자의 경력 종착점은 치킨집 아니면 프랜차이즈'라며 자조 섞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자 동석자 중 한 명이었던 팀장이 자신은 퇴직 후 IT회사를 창업하겠다며, 어두워진 분위기를 가로지르고 자신의 포부를 밝히기 시작했다. 


하필 취한 내가 그것을 흘려 듣지 않고 '그럼 저도 입사하겠습니다'고 외친 게 화근이었다. 아주 재미난 유머를 들었다는 듯 팀장은 한바탕 크게 웃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개발을 할 줄 아냐? 넌 와서 경리 해라.


그 말은 들은 후, 불현듯 급격한 두통이 몰려 왔다. 알코올 때문만은 아니었다. 업무상 엮이지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그는 내 직속 팀장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개발했다고 보고한 시스템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그는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해 왔던 걸까.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고, 이 물음표는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뿌리내렸다. 그후부터는 꽤 재미있게 해오던 개발도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스티븐 잡스, 마크주커버그, 일론 머스크…. '실리콘 밸리에서 조차 남성의 이름만이 빼곡한데 하물며 나 따위가 뭐라고' 하는 자책만이 가득 찼다. 



전문성을 증명해야 하는 여성, 쉽게 받아들여지는 남성


<성평등을 코딩하라!>의 오프닝에 실리콘 밸리의 거물 남성들의 얼굴이 영상을 가득 채운 것처럼, 우리나라의 IT 역시 그랬다. IT 콘퍼런스에는 90~100%의 비율로 남성 스피커가 압도적으로 많고, 대다수 회사에서 CTO 역시 남성이 차지하고 있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는 IT 업계에서 여자 노동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로, 여자에게 불공평한 현실뿐 아니라 현재까지 여자들이 IT에서 일궈 낸 성과들도 밝혀낸다. <성평등을 코딩하라!>에 따르면, 최초의 프로그래머조차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여전히 IT 업계의 이방인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여자 아이들이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이공 계열 능력을 함양할 수 없게 하는 교육 풍토의 문제가 존재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위시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언제나 남성만이 프로그래머로 등장하는 설정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모 타이어 업체의 광고엔 '컴퓨터 고장 나면 오빠'라는 문구와 함께 여자가 컴퓨터를 남성에게 맡기는 장면이 그려진다. 여자는 전자·전기·컴퓨터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존재로 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매체들은 여성과 기술이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라는 이미지를 심어낸다. 


더 심각한 건 이러한 시각이 IT 업계 바깥쪽만을 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IT 업계의일선에서 뛰고 있는 여러 여성 노동자들을 향해서도 이러한 편견은 이례 없이 작동한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를 보며 가장 공감이 갔던 장면은 깃헙(github, 프로그래머라면 전 세계 누구나 아는 서비스다. 서로 개발한 코드를 공유하고, 수정하며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수 있다)에서 일했다던 여성의 인터뷰였다. 


그녀는 회사 동료들과 토론이라도 할 때면 언제나 자신의 전문성을 또다시 증명해야 하는 벽에 가로막혔는데, 이건 나 역시 현장에서 너무나도 많이 접했던 일들이었다. 나야 연차가 낮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전문성이 없어서그랬을 수 있지만, 나보다 훨씬 오래 근무한 10년 차, 15년 차 여자 선배들 역시 그러한 대우를 받았다. 


똑같이 기술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도, 여자 선배의 말은 마땅한 근거 없이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반면 남자 선배의 말은 너무나 쉽게 수용됐다. 남자 선배가 틀린 경우도 많았지만, 이슈가 발생하면  'Brogrammer'(Brother + Programmer의 합성어)라는 말마따나 남자 개발자들끼리 모여 웅성거리면서 처리해버렸다. 기술 동향 같은 것도 여자에게는 쉽사리 오픈하지 않고, 남성들끼리만 은밀히 공유하곤 했다. 분명히 이 태도들에 악의는 없었지만, 그기저에는 '여자는 기술에 관심이 없다'(심지어 같은 IT 종사자인데도 말이다!)는 견고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자 개발자에게 남은 길이라곤 남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인재가 되거나, 차별에 무심한 채 자족하는 것뿐이다. 전자든 후자든 고달프고 외롭기는 매한가지다. 얼마 전에 만난 여자 후배는 어제도 새벽까지 야근했다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여자 개발자들은 야근 안 한다는 편견을 깨고 싶어요. 그래서 오기로라도 전 매일 야근해요. 남자 개발자들 다 퇴근해도 전 꿋꿋이 남아요. 


그녀는 여자라는 편견을 깨고 싶어 했지만, 그 기준은 언제나 남성이었고 편견에 대한 판단 역시 남성이 내리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혹독해져야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깊이 우울해졌다.






실력과 여성을 조합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물론 나 역시 이러한 시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남성들에게 인정받아야만 '진짜 개발자'가 되는 것처럼 언제나 'Brogrammer'들의 근처에 기웃거렸다. "나 정말 기술에 관심 많다고요!" 하면서 업무 외의 개발을 무리하게 소화하려 하기도 했다. 


하나같이 남성을 향한 인정 투쟁이었지만, 그 끝에는 '네가 개발을 할 줄 아냐?'는 맥 빠지는 질문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 허무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었을 때여서 그랬는지, <성평등을 코딩하라!>는 더욱 반갑고 위로가 되는 필름이었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는 여성과 기술의 관계가 결코 이질적이지 않음을 다시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 문제를 위해 투쟁하려는 여성들이이만큼이나 있다며 IT 업계에 여성들이 꽂아낸 깃발들을 펄럭인다.


아직도 '능력'과 '여자'는 상치되는 개념처럼 존재한다. 이건 비단 IT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것이다. 심지어 어떤 여자는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가 아니'라는 취급까지 받기도 한다(최근 <진짜사나이>에 출연한 이시영이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은 아이즈의 칼럼을 참조). 


때로는 여성성을 포기하고 명예 남성화돼야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실력도 있고 여성성도 갖춘 데다가 적당히 남성을 배려하기까지 하는 초-슈퍼우먼(<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처럼, 대중 매체는 여자는 유능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하는 이미지를 그려낸다.<배드 걸 굿 걸(수잔 J 더글러스, 글항아리 출판사)> 에 따르면 이는 성차별주의의 진화된 모습이다)을 바라기도 한다. 


나는 '실력'과 '여성'을 작위적으로 조합하려는 이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여성도 한 사람의 노동자이고 한 명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언제까지 외쳐야 할까. 내가 회사와 계약한 건 '노동력'이지 결코 나의 '여성성'이 아닌 것이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를 보고 난 후, 나는 확신에 찼다. 디버깅해야 하는 건 팀장의 머릿속이지, 나의 성과물이 아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네가 개발은 할 줄 아냐'라는 그의 말에 이제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하려고한다. 



물론이지, 난 IT 전문가야! 여자인 게 뭐, So 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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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프렌즈>, 혐오와 폭력은 되풀이된다

[TV리뷰] 되물림되는 폭력... 나 하나 참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이정희 미디어평론가


※ 이 기사는 <미디어스>, <오마이뉴스>에도 중복 게재되었습니다.


지난 26일 방영된 <썰전> 168회에서는 <주간 떡밥>으로 강남역 살인 사건을 다뤘다. 패널인 유시민 작가와 전원책 변호사는 모두 이 사건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두 사람의 해석은 달랐다. 


전원책 변호사는 자신이 맡았던 이와 유사한 사건의 예를 들며 우리 사회가 방기한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가 '강남역 살인 사건'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반해 유시민 작가는 '여성'을 최후의 식민지로 여기는 '남성' 일반의 전근대적인 인식이 결국 강남역 살인 사건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유시민 작가에 대해 전원책 변호사는 반대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인식들이 우리 사회 '남'과 '여'의 대립을 조장하며 본질을 왜곡한다는 뉘앙스의 입장을 밝혔다. 그런 전원책 변호사의 의견에 대해, 


유시민 작가는 짚는다. 그 '남성'은 여성이 들어올 때까지 여섯 명의 자신과 같은 '남성'들을 그냥 보냈다고. 물론 그 '남성'은 정신적 질환으로 인해 왜곡된 인식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병적 인식의 근저에는 바로 우리 사회 뿌리깊게 박혀있는 '여성'을 남성보다 낮잡아 보는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덧붙인다. 우리 남자들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이나, '차별'을 잘 모른다고.



남자들은 모르는 최후의 식민지 여성




▲전형적인 꼰대. 그들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무감각하다.ⓒ tvN


전원책 변호사도 그랬다. 세상이 이전과 달라졌다고. 요즘은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는데 왜 새삼스레 '여혐'이니, 차별이냐고. 유시민 작가의 '모른다'는 말 조차 선뜻 수긍하기 힘들어 하는 전원책 변호사의 표정은 어쩌면 바로 우리 사회 표준의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오히려 억울해 하며 강남역에 모여든 여성들에게 어떤 잣대를 들이대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원책 변호사의 수긍하기 힘든 표정에서부터, 최근 강남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갈등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얼마나 뿌리깊게 여전히 '차별'이 박혀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28일 <디어 마이 프렌즈>는 바로 그 오늘날 '여혐'으로 드러나고 있는 우리 사회 최후의 식민지 여성 차별의 역사를 짚는다.


<꽃보다 청춘>의 네 할아버지 중 한 분으로 '구야 형'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새삼스레 노년의 인기로 회춘한 신구 선생이 <디어 마이 프렌즈> 정아 이모의 남편 김석균으로 분한다. 


하지만, 넉넉한 웃음의 배려심이 넘치던 '구야 형'은 온데간데 없이, 동네방네 시끄럽게 아파트 현관 문을 발로 차며 마누라 이름을 불러 제끼는 김석균씨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꼰대 할아버지다. 


'구야 형'을 좋아했던 시청자들조차 김석균씨의 신구 선생을 쉽사리 수긍할 수 없는 가부장이다. 문을 제때 안 열어주는 아내, 밥을 제때 안 차려주는 아내, 이러저러한 그의 요구에 딱딱 맞춰 주지 않는 아내에게, 아니 요구를 제때 맞춰 주더라도 그저 집에서 하는 없이 밥만 축내는 여편네라고 입에 달고 산다. 


말뿐이 아니다. 늦게 들어오는 아내 문도 안 열어주는 식으로 '실천'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미 드라마에서 드러나듯이 김석균 노인의 아내에 대한 태도는 그가 한평생 견뎌온 트라우마의 방출이다. 


중졸 학력으로 고졸 아내와 결혼한 컴플렉스에서부터 사회적으로 늘 못배운 것으로 인해 겪은 수모 등이 자신의 '안사람'인 아내에게 쏟아부어지는 것이다. '내' 사람, 가장 만만한 사람, 바로 그의 아내가 그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소외의 '배설지'가 된다.


그런 남편을 아내 정아 이모(나문희 분)는 인내해왔다. 그리고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만 하다 이제는 요양 병원 신세가 된 친정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10억을 모은 남편이 자신을 세계 일주 시켜줄 것만을 고대하며 모든 모욕을 견뎌왔다.



가부장, 그 '폭력'의 역사 



▲부부의 문제는,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tvN


하지만 6회, 드디어 가족에게 드러난 정아 이모 큰 딸의 가정 폭력으로 인해, 정아 이모 부부의 일이 그저 '부부'만의 일이 아닌, '내림'이 되는 역사였음을 드라마는 밝힌다. 


즉 어린 시절 석균이 일하던 공장 사장 아들에게 추행을 당했던 순영은 사랑의 힘으로 그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남편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고, 그로 인해 결혼 생활 내내 '골병'이 들도록 '폭력'에 시달려 왔다.


그러나 어린 시절 자신의 성추행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했을 때 아버지가 보였던 '기집애가'라는 모멸적 반응, 거기에 자신 못지 않게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온갖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참아내는 어머니를 보며, '가부장적' 기제를 내재화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나 하나만 참으면'이라는 의식으로 십수년을 폭력으로 견뎌왔다.


결국 딸의 가정 폭력으로 드러난 게 정아 이모네만이 아니다. 평생을 남편에게 얻어맞고 살다, 아들이 장애인이 되자, 그때서야 '폭력'에서 벗어난 난희 모 오쌍분 여사(김영옥 분)네도 만만치 않다. 


엉뚱하게 절친인 영원(박원숙 분)에게 화풀이 하는, 난희 남편의 '사랑'을 빙자한 집 안방에서까지 마다하지 않은 외도는 어떤가. 남편을 벽장 속에 가둬죽였다는 오명을 뒤집어 쓴 희자(김혜자 분)가 평생 견뎌야 했던 남편의 바람끼는 또 어떻고.


사실은 그 공장 사장 아들을 두드려 팼었고, 이제 또 사실을 알게 되자 사위를 찾아가 패악을 부렸다지만, 그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팔자 좋은 여편네와 딸들이 견뎌온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제는 산소통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오쌍분 여사 남편이 제 아무리 아내바라기를 해도 아내 오쌍분 여사의 시선은 쉬이 남편에게 돌아갈 수 없다. 남편의 그늘에서 살아온 김희자 여사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늘 위태롭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결론이 결국 아름다운 가족애로 마무리될 지는 몰라도, 그녀들이 지난 세월 견뎌야 했던 '가부장'이란 이름의 정신적, 육체적 폭력의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남편에게 맞은 아내가 겨우 경찰서에 찾아가면 '가정' 내 문제라고 되돌려 세우는 세태가 아직도 크게 바뀌지 않는 세상에서, 왜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여성으로 종종 위협을 느끼며, 모멸감을 견뎌야 하는 세상에서 거울 앞에선 할머니들의 얼굴에 새겨진 '가부장'이란 이름의 문신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여전히 '모르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세상이 이를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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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향>, 우리가 보고 기억해야 할 영화


다향


* 본 감상문에는 영화 <귀향>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귀향>은 조정래 감독이 2002년 나눔의 집 할머니들에게 들은 이야기와, 일본군‘위안부’ 강제 동원의 대상으로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했던 피해생존자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한 영화이다.






영화 초반, 1943년 거창에 살던 14살 소녀 정민(강하나 분)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 의해 끌려간다. 마찬가지로 여러 지역에서 끌려온 다른 또래 여자아이들이 끌려간 곳은 소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옥’이다. 비명 소리와 교차되어 나타나는 위안소 장면은,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그 속에서 어느 순간 자신의 ‘진짜 이름’은 순간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공포와 슬픔은 어떤 것이었을까.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조차 가물가물해지는 공포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일본군 중 직급이 높을수록 강도 높은 학대를 가하는 것은 폭력과 학대가 권력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직급이 높지 않은 일반 병사라 할지라도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안부’ 소녀들에게 마음껏 학대와 착취를 일삼는 것 역시 그러하다. 전쟁이 만든 ‘괴물’, 어쩌면 그 이전부터도 ‘괴물’이었을지 모를 군인들의 잔학함에 고통 받는 그 ‘지옥’ 속에서도 소녀들은 서로를 다독이고 도와주며 버텨 나간다. 인간성이 사라진 그 현장에서 가장 빛나는 인간성과 자매애를 느끼게 하는 아이러니가 더 아프게 와 닿는다.


영화를 보던 중, 내 앞쪽에 있던, 친구 사이로 추정되는 두 명의 관객이 벌떡 일어나 상영관을 나가버렸다. 그들이 왜 나갔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영화의 만듦새가 허술해서 재미가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어서 일수도 있다. 어쩌면 다른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짐작컨대 그들이 나간 시점을 생각하면 그들이 마주하고 있던, 그리고 앞으로 마주해야 할 장면들이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끔찍하고 참혹한 것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은 유혹을 자주 받는다. 당장의 내 일이 아니니까, 나와 상관없으니까, 라며 눈을 돌리고, 때로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억누르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상영관에서 나가버려야 할 만큼 참혹한 그 장면들은, 영옥 역을 맡은 배우 손숙의 이야기처럼 “만약 내가 태어난 시대가 조금만 달랐다면 바로 내가 겪었을 수도 있는” 폭력의 장면이다. 또한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당하고 있는 폭력의 한 조각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얼마 전 보았던 드라마 속 대사가 자꾸 맴돌았다.


“난세란 게 뭐야? 난세란 약자의 지옥이야. 난세엔 여러 종류의 약자가 존재하지. 그 중 언제나 빠지지 않는 약자는 아이와 여자야. 그래, 난 아이인 동시에 여자였던 소녀였지.”(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15회 중, 연희의 대사)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제작과 상영을 반대하던 쪽에서도 ‘전쟁에서 여성과 아이가 피해를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고 한다. ‘당연한 일’인데 왜 문화적 기록으로 남기려고 하느냐는 그들의 논리는 가해자의 위치에서 전쟁성폭력의 피해자들을 계속 피해자의 위치에 두고 목소리를 억압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힌다.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더욱 피해자들이 겪은 일들이 하나하나 기록되고 알려져야 한다.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왜 그토록 오래 걸리고 어려웠는지, 전쟁 속에서 여성이, 한 인간이 겪은 폭력 피해 이전에 국가의 피해로 먼저 읽혀 오용되었는지를 한 장면을 통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좀 더 초점을 맞췄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기도 하다. TV에서 ‘정신대’ 피해자들의 신고를 받는다는 뉴스를 보고 읍(혹은 면)사무소를 찾은 영옥(손숙 분)은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 않아 신고를 망설인다. 그 때 들려오는 공무원들의 이야기. 정신대 신고의 실적 기안을 해야 하는데 우리 관내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는 동료의 말에 다른 직원이 말한다.


“에이, 있어도 좀 그렇잖아, 솔직히. 난 실적 없을 줄 알았어.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그런 과걸 밝혀, 안 그래?”


이 이야기를 들은 영옥의 반응, 그리고 대사는 처절하고 슬프면서도 통쾌하고, 무엇보다 아프다. 성폭력 피해를 ‘미치지 않고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자 ‘수치’라고 환원하는 가부장적 태도는 이처럼 피해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침묵을 강요해 온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다. 더구나 그것이 국가의 침탈이나 전쟁과 관련지어졌을 때는 너무나 손쉽게 국가 대 국가, 집단 대 집단의 구조가 되어 피해자 개인은 사라지고 만다. 


이 영화에서 은경(최리 분)이 가진 ‘신기’의 발현이 꼭 성폭력 피해 이후였어야 했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부장적 사회의 피해자’인 영옥과 은경이 만나게 함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도록 하고, ‘굿’을 통해 영혼들을 위로하도록 한다는 다분히 의미 있는 시도라 할 수 있으나, 성폭력 피해로 인해 신기를 가지게 되었다거나, 성폭력 피해가 반드시 정신적으로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든 문제를 가져온다는 식으로 오역될 가능성 역시 가지고 있는 위험한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귀향>은 여러 아쉬움이 남더라도 우리가 보고 기억해야 할 영화이다.


조정래 감독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영화는 실제 일어났던 일의 100분의 1도 표현하지 못한 것”이라며 ‘위안부’ 피해에 대한 “문화적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고 밝힌다. 바로 그 “문화적 증거”로써 영화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단순히 일본군이라는 미시적 초점의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넘어 가부장제와 전쟁이라는 거시적 측면의 가해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영화가 끝나고 약 10분 간 계속되는 엔딩 크레딧에는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함께, 심리치유를 위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그린 그림이 흘러나온다. 그림 하나하나에 과거의 기록이, 아픔이 들어 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이 영화를 볼 때 꼭 엔딩 크레딧을 마지막까지 보고 나오신다면 좋겠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냥 분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돌아볼 수 있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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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영화제 피움’ 

질주는 끝나지 않았다


유연|한국여성의전화 기획홍보국

 




달리지 않았어도 괜찮다. 하루하루가 똑같다고 느꼈어도 괜찮다. 혼자만 뒤쳐진 것 같아 좌절했던 날들이었어도 괜찮다. 다만 그때, 당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새삼 거리감을 느낄 만큼이면 족하다. 여성인권영화제 질주는 때로 주저하기는 했어도 멈추지 않았던 당신에게 바치는 헌사다.

 

지난해 질주를 주제로 진행된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 화제작들이 지역에서 다시 한 번 상영됐다. 천안(5/6-7)을 시작으로 강화(5/12), 울산(5/14), 창원(5/14), 영광(5/16), 전주(5/30) 6개 지역에서 진행됐다.

 

상영작은 가볍게 더 높이,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 외모등급, 원더우먼, 잔인한 나의 홈, 춤추는 별자리, 팻바디, 할머니 배구단(이상 가나다순) 등 국내외 장˙단편 5개국 8편의 영화이다.

 

영화상영 이외에도 다양한 부대행사들이 진행됐다. 폭력을 넘어뜨리는 비석치기(영광), 질주감수성 포10퀴즈(울산), 불편한 진실! 가정폭력 통념 0X퀴즈(전주) 등 관객 참여 행사 등이 함께 했다. <피움 톡톡>은 여성인권영화제가 자랑하는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영화와 관련된 주제를 심도 있게 파헤쳐 보는 일종의 토크쇼이다. 나이 듦, 마을공동체, 외모등급 등 다양한 주제로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되었다. 올해 6개 지역에서 함께 한 여성인권영화제 지역상영 피움은 내년 더 많은 지역으로 확대해 진행 예정이다.

 





두 자녀와 함께 왔어요. 영화를 보고 피움톡톡을 함께하면서 가정폭력을 남의 일로 만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새삼 놀라웠어요. 우리 가정을 돌아보게 된 계기도 되었고요. 아이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한 방법이 뭐가 있을지 숙제를 안고 갑니다.” 

 - 여성인권영화제 in 전주 관객 중

 

생소하고 어렵게만 생각했던 여성인권문제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문제들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이 들어감에 대한 의미와 즐거운 노후, 행복한 삶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 여성인권영화제 in 창원 관객 중

 

" 지역에서도 이런 의미 있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도 폭력예방을 위해서 여성인권에 대한 내용이 있는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성인권영화제 in 강화 관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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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워보이들에게


신필규| 한국여성의전화 회원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리뷰를 쓰기로 결정한 뒤, 나는 내가 난관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이 멋진 영화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분노의 도로가 페미니즘영화가 아니라는 논쟁이 발발한 탓에, 이미 여러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좋은 이야기들을 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독자로서는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지만, 쓰는 사람으로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이 사족과 같은 이야기를 서두에 첨부하는 것은, 이 글이 임모탄과 워보이들 그리고 맥스를 중심에 놓은 글이기 때문이다. 분노의 도로는 의심할 여지없이 퓨리오사와 브리더들, 그리고 부발리니족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때문에, 나는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고, 남성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글을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차적인 이야기라고해서 결코 무의미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그나마 유의미한 세 남성 캐릭터(임모탄과 맥스, 그리고 워보이들)의 차이를 분석하는 것이, 근래에 발생한 흥미로운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인터넷, 특히 메르스 갤러리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분노하고, 이를 조롱하는 목소리가 크게 표출되었다. 자신들의 언행에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남성들에게, 이 분노의 목소리는 낯선 현상이었는데, 오죽하면 이런 (분노하는) 글을 쓰다니, 당신들이 여성일 수 없다라는 반응까지 나왔을까. 물론 부정적인 반응이 다수이긴 하지만, ‘이런 말들을 들어왔다니, 당신들의 분노에 공감한다는 성찰적인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이며, ‘남성들이 보여야 할 가장 정의로운 반응은 무엇일까.


 

가부장적 지배체제의 화신 - 임모탄


영화의 초반, 임모탄은 워보이들과 퓨리오사, 그리고 시타델의 주민들에게 연설을 늘어놓는다. 그는 이 척박한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원할 자는 자신뿐임을 강조한다. 그 다음 그는 사막화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물을 제공한다. 하지만 물은 주민들이 임모탄의 말에 주목하게 할 만큼만, 사람들이 그를 숭배해야만 쓸 수 있을 만큼만 제공된다. 이 때 임모탄의 가장 측근에서 그를 보조하는 인물들은, 그와 혈육으로 연결된 아들들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임모탄의 아이를 낳았던 브리더들이 마치 수유하는 기계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화 도입부의 묘사는, 극단적인 가부장적 통제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 있다. 여성사학자 거다 러너에 따르면, 지배계급의 형성은 단지 자원을 축적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계급이 안정적으로 유지가 되기 위해서는, 지배체제를 영속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때문에 이들은 여성의 신체를 통제한다. 지배계급 각각이 여성의 신체를 교환하고(근친을 막기 위해), 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해 적자 이외에는 다른 아이를 만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 이를 통해 가부장적 족보를 탄탄하게 만들어, 권력을 상속하는 것이 지배계급 유지의 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임모탄 캐릭터를 가부장적 지배체제의 화신이라고 한다 해도,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는 자원(물과 기름)을 축적한 캐릭터다. 그리고 이 자원을 한정적으로 배분하며 시타델의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한다. 또한 그는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자신의 아들들을 배치함으로서 지배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해 여성들을 탈취해 가두어두고, 브리더라는 의미 그대로 아이를 낳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여성을 마치 물건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워보이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 시스템, 한 사람의 신체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시스템은 자연히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낳을 수밖에 없다. 또한 여성이 지정된 위치를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할 때, 이에 대한 반발도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성 혐오를 수행해온 사람들, 반 여성혐오의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사람들은 임모탄과 같은 존재들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가부장적 통제를 통해 수혜를 입는 계층은 한정적이다. 즉 성별 분업을 완벽히 수행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가지는 주체는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가부장제는 분연한 노동을 통해 도달해야할 이상에 불과하다. 이미 부양을 위해 노동시장에 나와 있는 많은 수의 기혼여성들이 이를 증명한다. 분업이 완벽하다면 이들이 여벌의 부양노동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가부장제를 신봉하고, 성별에 따른 역할이 있다고 믿으며, 이에 기반한 혐오와 차별을 재생산하는 이유는 하나다. 가부장제가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는 무관해도, 이것이 지배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임모탄이 아니며 될 수도 없다. 이들은 워보이들에 불과하다.


영화는 이러한 현실을 명징하게 반영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구태여 그것의 정당성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영화 내내, 임모탄이 외치는 구호는 단 하나다. 내 소유물들은 어디 있냐는 것이다.(그는 자신이 이미 소유한 권리를 주장하면 끝이다) 반면에, 그 소유물들(브리더)에게 체제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주체는, 그녀들과 대면한 워보이 캐릭터인 눅스다. 그는 임모탄의 체제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항해 스플렌디드는, 임모탄이 그와 브리더들을 총알받이와 아이 낳는 기계로 사용했다고 반박한다.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에 따랐을 뿐, 자신은 비난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눅스의 말은, 한국 사회의 워보이들이 공감하는 주장일 것이다. 스플렌디드는 여기에 통쾌한 일갈을 날린다. ‘그럼 세상을 망친 게 누구지?’


 

워보이들이 진정 해야 할 일들


사실 이 영화의 제목에 걸맞게 미친상태인 캐릭터들은 임모탄과 워보이들, 맥스가 유일할 것이다. 임모탄은 권력에 미쳐있으며, 워보이들은 그의 지배에 미쳐있고 맥스는 분노와 생존에 대한 욕구로 미쳐있다.(이에 비하면 퓨리오사와 브리더들, 부발리니족은 분노할지언정 미쳐있진 않다. 이들은 우리는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요구를 던진다) 사실 임모탄이야 그렇다쳐도, 총알받이 신세인 워보이들이나 피 주머니 신세인 맥스의 처지는 오십 보 백 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영화 내내 극명하게 다른 행보를 보일까.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맥스가 시타델 출신이 아닌 외부인이라는 점이다. 똑같이 도구화된 처지, 종속된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인인 맥스는 거리를 두고 이 시스템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때문에 임모탄의 허황된 약속은 맥스에겐 먹히지 않는다. 또한, 맥스에겐 체제 내부의 사람이 가진 차별이나 편견이 없다. 그래서 그는 퓨리오사나 브리더들, 부발리니족과 동료가 되는 것이 가능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듣는 것이 가능하고, 때문에 그 주장이 정당하다면 함께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 맥스는 그들에게 진솔한 조언을 건네며, 조력자로서 임모탄의 체제를 무너뜨리기위해 함께 싸움에 나선다.


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거동을 하는 임모탄처럼, 그로 상징되는 체제도 이미 낡았다. 때문에 주인공들이 다시 시타델로 돌아왔을 때, 워보이들도 순순히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통념이 제공하는 틀은 매우 안온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라면 우리는 계속 워보이나 브리더, 혹은 피 주머니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스스로의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 편견을 걷고 사회를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 때에, 시끄럽고 불편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상식적이고 정의로운 요구를 하는 이들이 보일 것이다. 한국 사회의 워보이들에게 건네고픈 조언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군소리 말고 그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줘라. 그것이 당신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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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웹툰을 만들 수 있을까?”

대학생기자단 4, 여성폭력 웹툰 프로젝트 3개월의 이야기


슬기|한국여성의전화 기획홍보국



 



누가 맨 처음 웹툰을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했을까? 11월 말, 추위가 몰려오던 그 즈음 따뜻한 커피가 든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회의하던 날이 기억난다. 해마다 기수를 달리하는 한국여성의전화 대학생기자단은 연말 마무리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4기 대학생 기자단은 총 다섯 명인데, 지수, 정희, 수연은 대학 졸업반으로 한창 취업준비 중이었고, 하영은 한 달 후 유학을 앞둔 채였다. 상민 또한 외부 활동을 병행하고 있어 웹툰 완성물을 제작하지 못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웹툰 (콘티) 만들기 프로젝트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대학가 원룸 성폭행 사건, LGBT 단체 취재, 여성 영웅을 찾아서, 20대 여성이 느끼는 문제다양한 소재가 거론되었다. 신촌에서 만나 주말 회의까지 한 끝에 겨우 각자의 이야기를 정했다. 그러나 이제 시작, 궁리하고 정해야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정희

  20-30대 워킹맘의 삶

  

  상

  한여자의 일생:

  가족내 남녀차별, 성폭력, 가정폭력을 

  모두 겪은 한 여성의 이야기 


  수연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에 입소하다

  

  지수

  가정폭력피해여성의 정당방위 사건

   - ○○○씨의 이야기 


 

   정희

  '어떻게 하면 무겁지 않게 여성인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 많은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웹툰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일단은 해보자!" 

  자투리 시간을 동원해 지하철에서 수많은 웹툰을 읽었다. 

  우리나라와 외국 워킹맘들의 생활을 비교하기 위해 신문기사도 찾아 읽었다.



 

회의가 반복되며 각자의 이야기는 더 섬세해져 갔다. ‘20~30대 워킹맘의 어려움을 소재로 잡은 정희는 다른 친구들 아이디어에 도움 받아 한국과 핀란드의 워킹맘 비교로 발전했다. 지수는 윤필정씨(가명) 사건의 한겨레21 기사 등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했다. 신문사 인턴 기자로 일하게 된 수연은 밤12시에 과제와 자료조사를 올리는 등 투혼을 발휘했다.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에 입소하다

 <먼나라 이웃나라> 

 한 여자의 일생

 <십시일반> 


 






좌충우돌 웹툰 구상하기



<한여자의 일생> 가족내 남녀차별, 성폭력,

가정폭력을 모두 겪은 한 여성의 이야기

(상민의 1차 과제)

<한국과 핀란드의 워킹맘 비교하기> "핀란드

시계는 아침 7시. 같이 일어나는 할로렌과 남편"

눈에 그려지는 콘티를 짜온 정희의 솜씨에 

다들 감탄했다(정희의 3차 과제) 

<가정폭력피해여성에 의한 정당방위 사건>

실제 사건인 율필정씨(가명) 이야기를 조사

하고 이야기를 자던 지수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졌다(지수의 2차 과제) 

지수, 정희, 상민, 수연의 1-3차 과제들 





























 


쉼터 웹툰을 기획하던 수연은 작업에 들어갈수록 어려움에 부딪혔다. 가정폭력피해생존자가 짐 가방을 끌고 와 쉼터에 첫 발을 들이는 순간, 그곳에서 동료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 등을 그저 상상으로 풀다 보니, 이야기를 짜고 나면 이게 맞나?’ 싶었다. 한국여성의전화 쉼터의 소장 단아가 사정을 듣고 대학생기자단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결코 간단히 끝날 수 없는 쉼터의 진짜 이야기는 기자단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철저한 보안 속 쉼터 입소 과정, 오래뜰 가족이 쓴 시()에 담긴 피해당사자의 아픈 경험, 현장의 경험이 녹아있는 귀한 이야기였다.

 


미완성, 그러나 한 뼘의 성장


불쑥 3, 4기 대학생 기자단 활동을 마무리 할 시점이 왔다. 아쉽지만 웹툰 프로젝트는 미완의 상태로 종료되었다. 목표했던 결과물이 없다면 허무한 것일까?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소감을 나눌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완성과 실패의 시절이 때로 우리를 가장 많이 성장시키는 시간이라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여성폭력 문제를 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가슴으로 느꼈다. 흔히 많은 이들이 막연하게 가정폭력과 성폭력이 나쁘다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피해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많은 맥락과 상황이 있음은 몰라 거칠게 바라보고 함부로 이야기할 때가 많다. 다른 시각을 갖고, 다르게 행동하는 힘은 내가 잘 모른다는 겸허함과 배우려는 마음에서 시작됨을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배웠다.



 

  수연

  처음에는 가정폭력을 당한 여성의 몸에 멍이 들어있는 장면을 생각했어요.

  '가정폭력' 하면 발길질하는 남성, 무기력하게 매맞는 아내...

  신문이나 방송이 보여주는 이미지 그대로를 떠올렸던 거죠. 

  가정폭력피해자의 이미지를 좀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됐습니다.









  지수

  웹툰 만들기를 제안했던 것은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수월하지 않았다. 특히 나, 개인에게 있어서. 내가 무엇인가를

  말할 '자격'이 있는지 고민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알 수 없는데. 내가 부족한가, 내가 모자란 건가, 내가 편협한가.


  단아 선생님의 말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이해하거나 아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믿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말. 

  나는 너무 많은 것에 대해 판단하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우리 일정은 종료됐지만, 기자단 활동은 끝났지만, 

  이런 나의 고민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한국여성의전화 블로그에서 대학생기자단 4기의 활동 소감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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