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新 여성인권운동 풍속도

 


은총 한국여성의전화 기획홍보국


 

‘휴거’도 Y2K도 없이 평화롭게 21세기의 태양이 떠오른 지 17년이 지났다. 새천년은 세기말의 난리통이 무색할 정도로 고요히 찾아왔으나, 그 후 17년은 결코 무탈하지 않았다. 2015년에는 영화 <백 투더 퓨처 2>처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우리는 여전히 54.4%의 남성이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가부장적 사고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각주:1]

 

그러나 2017년 현재, 여성인권운동에 신흥 기류가 불어 닥치고 있다. 온라인은 SNS를 중심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게릴라성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다. 여성주의 서적은 우후죽순 출간되고 있으며, 다양한 소규모 프로젝트와 여성의 삶 전반에 대해 여성이 스스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공론장이 활발히 생겨나고 있다. 이 기류의 시발점은 2015년 중반 일어났던 ‘메르스 갤러리’[각주:2]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여성들이 여성인권운동을 ‘언어유희’를 통한 ‘놀이문화’로 전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라인 중심으로 시작된 여성인권운동의 新 조류는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기점으로 여성들이 오프라인에서 행동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지금,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이러한 신흥 운동의 효과로 소비, 여가 생활, 삶의 태도 전반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본 글은 아주 가까운 일상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도발적인 변혁의 몇 가지 사례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작성되었다.

 


사랑한다, 공부해라


‘빠순이’라는 용어로 비하되곤 하는 연예인 팬 문화는 좋아하는 스타를 위해 감정과 시간과 경제력을 ‘헌신’하는 문화로 여겨진다. 이 문화는 좋아하는 연예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러한 헌신을 바탕으로 마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쉴드’를 치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객관적 판단력이 부족한 여성적 문화’로 취급되기 일쑤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팬으로 전제되는) 여성은 스타의 콘텐츠에 반응할 뿐인 수동적인 개체로 여겨진다.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신흥 여성인권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체들은 자신의 취미인 ‘연예인 덕질’ 영역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나가고 있다. 이들은 스타의 콘텐츠를 능동적으로 ‘즐긴’다. 성희롱 발언을 하거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른 스타에게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거나, 노래 가사 등 반여성인권적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에 시정을 요구하는 일은 이제 특별하지도 않다. 주목할 점은 연예인 팬 문화 중 가장 ‘비이성적’으로 여겨지던, 스타의 기쁨을 기대하며 선물을 보내는 ‘조공’ 문화의 변신이다. 이들은 더 한 발짝 나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스타에게 페미니즘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이들은 스타를 사랑하는 방식과 내용을 직접 선택·기획하고 이를 위한 ‘즐거운’ 소비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성희롱 발언 이후 팬들의 요구에 따라 사과문을 작성하고, 

선물 받은 페미니즘 책을 인증한 배우 김윤석. 



아이돌 ‘오마이걸’ 팬의 페미니즘 서적 서포트 모금 프로젝트



 

내가 입는 패션이 여성의 패션이다


 


‘로리타 패션’은 서양 동화 주인공의 옷처럼 프릴과 레이스, 리본 등의 장식품이 달린 드레스를 입는 패션을 뜻한다. 언뜻 여성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패션을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로리타 여성주의자모임 <로리타 펀치>는 “로리타 패션은 여성이 주도적으로 만들고 소비하며, 여성 주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로리타 펀치>는 “로리타 패션은 세상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패션이 아니”며 당사자인 여성의 말에 주목하지 않고 가부장적인 남성의 시선으로 문화를 해석하는 것을 비판했다. <로리타 펀치>는 활동의 모토를 “로리타를 입고 뭐든지 한다 정도”라고 밝히며 여성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자신이 세운 기준을 떳떳하게 드러내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투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렇기에 “그런 것들을 더 지지하고, 더 재밌고, 더 즐겁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지속가능한 로리타’를 위해 여성공동행동 집회에 참여하거나 정기 소모임을 열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로리타 옷을 입는 의미에 대해,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나가고 있는 것에 대해 로리타를 입고 살아가는 여성들에 대해 정기적인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2060년 페미니스트 나가신다!

 

전국디바협회 로고



"지금 세상을 살고 있는 송하나들과 미래의 송하나가 마음 놓고 게임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행동"합니다.[각주:3]

 

2016년 11월 26일, 박근혜 (前)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에서 유쾌한 패러디로 화제에 올랐던 깃발들 중 <전국디바협회>의 깃발이 있었다. 2060년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 <오버워치>의 캐릭터 중 하나인 디바(송하나)는 천재 프로게이머이자 거대한 로봇을 조종하는 여성 영웅이다. <오버워치>를 이용하는 여성 게이머를 중심으로 구성된 <전국디바협회(이하 전디협)>는 “한국이 지금과 같이 성차별적인 국가라면 오버워치의 배경이 되는 2060년에는 디바와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일은 불가능 할 것”이라며, 성평등한 2060년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게임_내_성폭력’ 이슈를 공론화하는 발화점이 되었으며, 게임을 제작한 디렉터 제프리 캐플런이 게임 콘텐츠에 대한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재해석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전국디바협회에서 제작한 Feminism For Future Female 포스터

 


전디협은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집회와 행진에 참여하거나, <페미니즘 도서 가이드북> 제작을 위한 독서모임을 격주로 진행하고 있다. 또 이들은 페미니즘 굿즈 스토어와 같은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현재 가장 중심적인 활동은 본 원고 작성자의 마음에 불을 지른 전디협배 오버워치 여성게이머대회 <여자 나가신다!>이다. 게이머뿐만 아니라 모든 스태프를 여성으로 기획하고 있으며, 2017년 4~5월 중 예선이 진행될 예정이다. 현재 대회 참여 인원파악을 위한 가신청을 받고 있으며, 신청은 forfuturefemale@gmail.com 으로 <팀명>, 팀원의 <닉네임#배틀태그>, <티어(게임 내 등급)>를 간단하게 적어서 보내면 된다.


  1. 여성가족부 「2016년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 [본문으로]
  2. 2015년 5월 말 메르스 사태가 심각해진 어느 날 홍콩에 여행을 간 두 여성이 메르스 의심환자로 진단받았음에도 당국의 격리를 거부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인터넷 게시판은 두 여성을 비난하는 게시글로 넘쳐났다. 그러나 이것이 의사소통의 오해에서 비롯된 와전된 소식이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그 동안 여성혐오적 악성댓글에 시달려왔던 여론의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디시인사이드 게시판인 ‘메르스 갤러리’에 그 동안의 여성혐오 발언을 남성 대상으로 미러링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남자도 신사처럼, 조신하게 미래의 배우자를 위해 동정을 지켜야 한다.” 같은 과거의 여성혐오발언에 대한 패러디 말이다. [본문으로]
  3. 출처 전국디바협회 트위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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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

어른들이 빚은 '모범 아동'의 세상, 뽀로로

 

갱 한국여성의전화 회원

 



뽀로로

'뽀롱뽀롱 뽀로로' (출처 : 타임트리)



이제 벚꽃 피는 봄이 다가오는데, 내 입가에 착 달라붙은 건 벚꽃엔딩이 아니라 뽀로로송이다. 길을 가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하며 흥얼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제 20개월이 되어가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바로 <뽀롱뽀롱 뽀로로(이하 뽀로로)> 때문이다. 딴에는 여러 만화를 접하게 하고 싶어서 <겨울왕국>도 틀어주고 <메리다와 마법의 숲>도 보여줬지만, 아이는 아직 장편 만화의 긴 호흡보다 짧게 끊어지는 에피소드형 만화 시리즈를 좋아한다.

 

아이 때문에 옆에서 따라 <뽀로로>를 보게 된 지 두 달째, 처음에는 아이가 좋아하니 유료 시즌까지 결제해서 보여줬지만, 옆에서 함께 볼수록 여러 의문이 보글보글 솟아났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래도 기존의 차별적인 성역할을 답습하는 캐릭터 설정이다. 주인공인 뽀로로는 남성인 데다가 파란색이고, 시즌1부터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루피는 완전히 분홍색이다. 특히 루피공주 놀이를 좋아하고, 운동 신경이 매우 둔하며, 요리를 좋아한다. 신나게 놀고 나면 친구들은 저녁에 루피의 집에 모여 앉아 루피가 만든 샌드위치, 파이 등을 먹으며 즐거워한다. ‘뽀로로는 늘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고, 1등에 대한 경쟁심이 강한 데에 반해 루피는 한결같이 왕자님이 찾아오기를 꿈꾸며 남성 캐릭터들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제작 기법은 최신식 3D인데, 캐릭터의 성역할은 성경보다도 고전적(?)이어서 아무래도 비판을 많이 받았는지, 시즌3에서 패티라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가 추가됐다. 운동을 못하고 요리만 잘하는 루피에 비해 패티는 운동을 잘하고 요리는 정말로 못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루피패티는 지붕이 새거나 물건이 부서지는 등의 일이 생기면 늘 남성 캐릭터들에게 수리를 부탁하고, 다른 친구들이 위험에 빠질 때 먼저 나서지 않는다. ‘패티는 다른 남성 캐릭터들에 비해 용감하다는 설정이지만, 모험에 나서거나 위험한 장난을 할 때만 용감함이 발휘된다. 간헐적으로 루피만 요리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친구들이 루피의 요리를 도와주고, ‘패티도 다른 친구들을 날렵한 몸동작으로 도와주는 일이 종종 생기지만, 기본적으로 캐릭터 설정을 뒤흔들지 않는 한 <뽀로로> 내의 근원적인 성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고전적인 여성성을 차용하여 여성 캐릭터들을 비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성 캐릭터도 인간 군상의 다양함을 무시하여 억압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도 우려스러운 건 <뽀로로>의 캐릭터들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스토리텔링이다. 기본적으로 <뽀로로> 세계는 친구 우월주의라고 할 만큼 친구와의 관계를 최우선의 가치로 배치한다. 이 때문에 사건의 인과와는 무관하게, ‘친구들과 화해했으니문제가 쉽게 해결되어 버리는 에피소드가 많다. 예컨대 고릴라 에피소드가 있는데, 뽀로로와 친구들이 고릴라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 차려진 음식을 먹어버린다. 이에 화가 난 고릴라가 음식을 먹은 대신 누군가 한 명 남아서 일을 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누가 남을 것인지 선정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친구보다 자신이 남아 일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고릴라가 감동하여 모두를 풀어준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과정이 다소 뜬금없고 고릴라가 감동하는 포인트가 전혀 이어지지 않아 황당했던 에피소드였다.

 

세계의 가치관에 순응하고, 이를 깨지 않으려는 <뽀로로> 캐릭터들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에디는 자신의 발명품을 깨뜨린 뽀로로와 크롱을 너무 빨리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고(뽀로로와 크롱조차 이 갑작스러운 전개 때문에 어리둥절해 한다.) 친구들의 억측으로 억울한 상황에 내몰렸다가도 친구들이 다시 미안해한마디만 하면 곧 웃는 얼굴로 괜찮아하고 대답한다. 발명품이 깨져서 속상하거나 오해가 생겨 억울했던 것과 같이,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 분명 있을 텐데도 이 감정을 살펴보고 풀어내는 과정은 과감히 생략된다. 그보다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정언명령만이 <뽀로로> 캐릭터들의 전반을 지배한다.

 

혹자는 유아용 만화에 뭘 그런 거까지 바라느냐고 타박할 수 있겠지만, 유아 그림책과 비교해봤을 때 유아 만화의 컨텐츠 발전 속도는 굉장히 느린 편이다. 유아 그림책은 이미 똥이나 방귀와 같은 생리적 현상을 자연스럽고 즐거운 과정으로 탐구하게 하지만, <뽀로로>에서 방귀는 더럽고 냄새 나며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으로 인식된다. 화가 나는 과정이나 화가 다시 풀어지는 과정들을 집중적으로 세밀하게 그려내는 유아 그림책들에 비해, <뽀로로>는 그 과정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빨리 해소되어야 하는 일로 스토리텔링한다.

 

<뽀로로>가 그려내는 세계는 아름답고 즐겁지 않다.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다 뜯어보고 나면, 이들의 일상은 괴롭고 고단해 보인다. <겨울왕국>이나 <메리다와 마법의 숲>처럼 기존의 세계관에 도전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투쟁하는 주인공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캐릭터 하나하나의 내면과 감정을 소중하게 여겨주었으면 한다. 문제가 해결되거나 봉합되지 않아도, 굳이 친구와 초스피드로화해하지 않아도, 고민하는 과정과 폭풍우 치는 감정의 결을 탐색할 수 있는 <뽀로로>라면, 그나마 전 시즌 유료 결제한 과거의 나를 덜 미워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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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

'아내’들에게 ‘스토킹’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유미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





정답은 모두 X입니다. 얼마나 맞추셨는지 궁금한데요. 한국 사회에서 이 범죄는 때로는 스토킹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데이트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지속적 괴롭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최근 보도된 것만 해도 스토킹 피해 여성에게 수백 회의 메시지를 보내며 괴롭히고 회사에 찾아가 소란을 피운 사건, 결국 살인에 이른 사건까지 뉴스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범죄 유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실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중 일부는 현재 경범죄 처벌법으로 신고할 수 있지만, 고작 범칙금 8만원에 불과한 처벌은 아무런 제지 효과가 없습니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스토킹 범죄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어, 사실상 피해자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게 현실입니다.


정부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협의체를 꾸리겠다고 했지만, 제대로 된 법이 아니라면 여타의 여성폭력 문제처럼 도리어 스토킹 범죄를 ‘용인하는’ 결과밖에는 안 될 것입니다.


가정폭력·성폭력 등 여성에 대한 폭력문제를 상담하고 정책감시 및 제안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여성의전화는 2000년대 초반부터 스토킹 범죄에 대해 이야기해왔고, 2013년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한국여성의전화는 우리 사회에서 스토킹 범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할지에 대해 제안하고자 합니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겠다”

라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은 관용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 결코 그저 관용어가 아니다. 여성들은 친밀한 관계였던 남성의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피하고, 그중 누군가는 남편 혹은 전남편으로부터 쫓긴다. 수십 통의 협박 전화와 문자가 끊임없이 걸려오고, 전송된다. 여성들은 집과 직장 앞에, 또 피신한 곳을 추적해 그 앞에 나타나는 가해자들을 맞닥뜨린다. “네가 도망치더라도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겠다”는, 남편 혹은 전남편을 말이다.



‘아내’들에게 ‘스토킹’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남편의 폭력은 일상 속에 엉겨 붙어 있었다.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은 일상 자체를 떼어냈다. 가해남편을 피해 다른 곳에 숨고, 경찰에 폭력을 신고하며, 이혼을 시도했다. 그러나 ‘감히’ (자신의) 가정을 떠나려하는 여성들에게, 가해자의 ‘스토킹’이 이어졌다. 



A씨는 남편의 폭력을 경찰에 고소하고 집을 나와 피신했지만, 남편은 A씨가 피신해 있는 곳으로 찾아와선 행패를 부리며 A씨를 위협했다. A씨의 생활 반경은 급격히 축소됐다. 피신해 있는 곳에서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었다. 밖으로 나서면 남편이 위해를 가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자유로운 외출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이 됐다. 


B씨는 오랜 기간 남편의 폭력 속에 있다가 별거했으나, B씨와 B씨 어머니에 대한 남편의 폭력과 협박은 계속됐다. 더구나 B씨 어머니의 직장에도 남편이 나타나는 등의 스토킹이 이어졌다. B씨와 B씨 어머니, 자녀들 모두 가해자가 거주지나 직장에 찾아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일상은 이제 예전과 같지 않았다.      



삶의 모습은 예전과 달라졌다. 여성들은 가해자의 반복되는 스토킹 행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신변의 안전이 최우선 문제가 됐다. 가해자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오늘 또 나타날지도 몰랐다. 길을 나서면 사방이 두려웠다. 여성들은 더 이상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가해자로부터 몸을 숨겼다. 일상엔 불안감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무참한 사회


그러나, 남편의 스토킹 행위는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이 됐다.


더군다나, 아내를 찾아가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위협하는 가해남편의 행위는 ‘가족’이기 때문에 스토킹으로 명명조차 되지 못했고, 그래서 더욱더 드러나기 힘들었다. 그러니 해결해야 할 문제로 주요하게 얘기되지도 못했다. 또한 가해자의 스토킹 행위를 신고한다 해도, 직접적인 폭력 피해가 발생하거나 충분한 증거가 있어야만 ‘가정폭력 사건으로라도’ 처리될 수 있었다.


관련 해외연구에 따르면, 가정폭력 피해자의 반 이상이 배우자에 의한 스토킹 피해를 경험하며, 폭력 피해를 입거나 살해당한 피해자의 약 90%는 폭력을 가하는 배우자로부터 스토킹 피해를 입었다. 가정폭력과 스토킹, 살해위협・살해는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법원은 가정폭력으로 인한 이혼과정에 있는 여성들에게 부부상담명령을 내리고, 가해자에게 자녀들을 주기적으로 볼 수 있는 면접교섭권을 주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혼재판 과정 중 변론이나 조정 기일이 잡히면 가해남편을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두려운 여성들에게, 이는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C씨는 남편의 폭력에서 피신했으나, 가해자는 자녀들이 비밀전학한 학교를 알아내 모습을 나타냈다. C씨는 또 다시 피신했다. 이혼소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법원에서 가해자가 자녀를 만날 수 있도록 면접교섭권을 주었다.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과도 같은 나날을 지나온 C씨의 맥락은 고려되지 않았다. 살아남는 건 C씨의 몫이었다.  


가정은 ‘여성’들이 깨뜨려선 안 됐다. 여성들은 ‘아내’이자 ‘어머니’이며, 집에 있(어야 하)는 ‘집사람’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집을 나간 ‘집사람’을 쫓았다. ‘자식’을 찾았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처자식’을 찾는 건 당연한 ‘권리’였다. 이혼 법정에선 눈물을 흘렸다. 가정을 지키고 싶다고 호소했다. 법원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남편이 안쓰러웠다. 손찌검 정도는 ‘처자식이 맞을 만한 짓을 했으면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부상담을 해보라 시켰다. 부모 자식 간은 천륜인데 자녀를 봐야하지 않겠냐며 면접교섭권을 내줬다. 



여성과 자녀들은 몸이 떨리고, 치가 떨렸다.



폭력을 가하는 남편은 일차적 문제였다. 여성들의 폭력 경험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알아도 모르는 척 하는 사회는 무참했다. 



‘아내’에 대한 스토킹은 더 많이 드러나야 한다


가해남편은 여성의 일상에 가장 가깝게 밀착돼 있던 자였다. 그래서 여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가해자는 직장, 가족관계 등 여성의 각종 개인정보는 물론이고, 여성이 어떤 부분에서 취약한지도 알았다. 가해자는 이러한 점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교묘하고 집요하게 여성을 찾아내고, 협박하며, 위협했다. 


가해자는 이혼하면 친정 식구들을 죽이겠다고도 했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폭력에서 벗어나기를 주저했다. 폭력에서 피신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망설였다. 이미 가해자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에게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도 두렵지만, 주변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건 더더욱 두렵고 끔찍한 것이었다.   


스토킹범죄로 인한 광범위한 피해 실태와 그 심각성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확산되면서, 스토킹처벌법 제정에 대한 사회적 여론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 2013년~2016년 상반기 상담통계 집계결과에 의하면, 스토킹 가해자의 평균 97%는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중 (전)애인이 69.1%, (전)배우자 7.9%(배우자에 의한 스토킹 피해가 잘 드러나지 않는 문제를 고려했을 때 제한적인 수치임) 등 스토킹 피해의 대부분이 친밀한 관계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에 의해 발생했다. 


스토킹범죄 처벌 및 방지를 위한 정책마련과 법 제정 과정에서 이러한 스토킹범죄의 특성을 반드시 주요하게 반영하여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족’이기 때문에 드러나지 못한, ‘가족’이기 때문에 용인하거나 묵과된 가정폭력 가해자의 스토킹 또한 ‘스토킹범죄’로서 처벌될 수 있어야 하며, 데이트 상대자, 배우자, 동거인 등 신뢰관계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에 대해 스토킹범죄를 행한 경우엔 가중해 처벌하도록 하는 법조항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더 많이 드러나야 한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아내’에 대한 스토킹이 ‘스토킹’으로 이름 붙여지고, 인권을 침해하는 사회적 범죄로서 처벌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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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

어떤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면 말고'식 고소하나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무고죄 적용, 성폭력 신고를 좌절시키는 가장 큰 장애물


재재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



[한국여성의전화 20160906 화요논평 카드뉴스]

최근 유명 연예인들의 성폭력혐의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고, 피의자들이 고소한 여성들을 무고로 역고소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언론은 "000, 000, 000 누명, '아님 말고' 무고사회", "연예계는 '무고 공화국'", "판치는 무고...무고한 사람 명예 짓밟다" 등의 제목을 단 기사들을 쏟아내며, 성폭력 무고사범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성폭력은 허위신고가 많은 범죄라는 우리 사회의 아주 오래된 광범위한 믿음 속에 성폭력 무고는 일명 '꽃뱀사건'으로 통용된다. 최근 몇 년간 친고죄 폐지 및 성폭력 처벌 강화 흐름은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분명한 처벌로 이어지기보다는 '억울한 남성 피해자'가 증가할 것이라며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무고사범 단속으로 환원되고 있다.

   


성폭력 신고율 10% 미만, 피해자 중 '경찰에 도움 요청'한 비율은 1.1%


성폭력은 허위신고가 많다는 믿음은 도대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영국 검찰청 보고서에 따르면 강간신고의 0.6%만이 허위신고로 나타났으며, 강간에 관한 허위신고가 만연하다는 대중의 인식이 허위라고 지적했다(한국에는 성폭력 무고에 관한 공식집계 자료조차 없다).


전 국민 성폭력예방교육 의무화 시대, 성폭력은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이며 내가 '동의하지 않은 성적행위는 성폭력'이라고 배운다. 그리고 피해자는 이러한 상식과 믿음을 가지고 법에 호소하지만, 그 상식과 믿음은 부서지기 일쑤다.


한국의 법 현실에서 강간죄가 성립되려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하게 곤란하게 하는' 폭행과 협박이 동반되어야 하며, 준강간의 경우 완전히 만취한 경우와 같은 심신상실, 항거불능의 상태를 요구한다. 또한 기본적으로 증거수집이 어려운 성폭력 사건은, 그 수사에 있어 피해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을 피해자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다. 특히 사건과 무관한 성 이력이나 고소전력, 피의자와의 관계나 합의여부, 피해자의 외모나 나이, 직업 및 사회경제적 지위, 말투나 행동양식 등을 근거로 피해자의 고소의도와 피해 사실 자체를 의심하고 판단하는 수사기관의 관행은 심각한 문제이다.


나는 성폭력은 범죄이고 신고하면 된다고 배워서 신고를 했는데, 가해자가 처벌은커녕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성폭력을 당한 것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나는 이제 내 가족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성폭력을 당했더라도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법은 가해자의 편이고 나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원한 성폭력 무고사건 당사자의 말


  



성폭력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무고죄로 기소되어 처벌받게 될 때의 그 고통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고는 큰 죄이다. 큰 죄인만큼 무고죄 적용은 상당히 엄격해야 하며, 사안이 허위라는 것에 보다 적극적인 증명이 필요하다. 성폭력이 아니라는, 즉 서로간의 적극적 동의(affirmative consent)하에 이루어진 성행위라는 입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한국사회의 성폭력 무고 기소와 처벌은 우리 사회의 법이 말하는 '객관적'인 증거와 철저한 수사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에 기반을 두어 이루어지고 있는가. 성폭력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 성차별적 젠더 규범에 근거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무고죄 적용은 성폭력 신고를 좌절시키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를 반증하듯이 성폭력 가해자는 증거부족 등을 빌미 삼아 무고죄로 고소하겠다고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법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활용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한 말하기를 가로막고 범죄를 은폐시키는 무분별한 성폭력 무고 적용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성폭력 무고에 대한 인식과 실재, 전면적인 점검과 성찰 그리고 변화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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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여성인권영화제 10회 기념 포럼의 정민아 영화평론가 발제문입니다.


영화의 폭력 이미지: 고통의 카메라, 외설적 카메라


정민아 영화평론가




1. 흥행 영화 키워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영화』 78호에서는 2012년 이후 흥행영화 키워드로 ‘사회성’, ‘애국’, ‘부성애’를 들고 있다(www.kofic.co.kr). 몇 년간 부성애, 사회성, 애국 코드에 덧붙여 복고 코드가 영화시장에서 통하는 키워드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명량>, <국제시장>, <부산행>, <터널>, <암살>, <밀정> 등에서 보듯이, 각각의 키워드는 독립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서로 엮인다. 이러한 영화들의 흥행은 사회 안정성의 위협, 국가 시스템에 대한 의심, 가족 해체의 두려움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들 영화에서 여성의 자리는 많지 않다. 대개 여성들은 한 평범한 남성이 위기의 순간에 대오각성하고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서사를 위해 단순하게 소비되고 만다. 위기에 빠진 아내와 딸이거나, 동료일지라도 보조적 인물로 그려지고, 혹은 약한 희생자이어서 남자 주인공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한국영화 제작 경향은 이렇듯 한 성별에 일방적으로 초점이 맞춰지고 남성 서사 위주로 영화가 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는 한국영화산업의 현재가 남성 제작자에 의해 주도되는 이유뿐만 아니라 실은 관객 취향과도 관계가 깊다. 다시 말해, 여성 서사 영화는 흥행을 끌기 어렵고, 액션, 스릴러 장르를 위주로 하는 남성 서사 영화에 더 많은 관객이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는 디지털 시대 이후 스펙터클이 강조되는 스케일이 큰 영화의 선호, 남성 스타 위주로의 산업 재편, 경제 위기 이후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 등 몇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필자는 여기에 ‘걸크러시’라는 키워드를 더하고 싶다. ‘여성이 여성에게 반한다’는 의미의 걸크러시는 2015년 이후 여성 영화배우, 랩 가수, TV 연예인을 대상으로 널리 사용되는 대중적인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칼럼니스트인 마리사 히긴스의 경우, 잡지 『xoJane』에서 걸크러시라는 단어 사용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전개한다. 그녀에 따르면, 한 여성의 다른 여성에 대한 감정에서 보이는 내면의 동성애적 성향을 인정하지 못해서 걸크러시라는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단어는 동성애자들을 심리적으로 더욱 고립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고스트 버스터즈> 스틸컷 사진 출처 : mydaily.co.kr



지난해와 올해 걸크러시를 보여주는 영화들의 등장이 흥미롭다. 지구가 완전히 파괴된 후 여성영웅의 등장을 그린 고강도 여성 액션 블록버스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조타수 역할을 했다. <매드맥스>의 성공 이후 걸크러시 영화들이 줄줄이 시장에서 성공했는데, 여성 첩보 액션 코미디 <스파이>, 루크 스카이워커의 딸이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스타워즈>, 젠더 역할 뒤집기를 보여준 액션 코미디 <고스트 버스터즈>, 어머니를 마음속의 등불로 삼고 일어서는 여자 성장담 <와일드>, 여성 퀴어영화 <캐롤>, 참정권 투쟁을 그린 시대극 <서프러제트>,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녀와 아씨의 사랑을 그린 <아가씨> 등이 있다.  


20-30대 젊은 여성과 젊은 성소수자 수용자들은 여혐·남혐 논쟁, 온라인 젠더 논쟁을 거치며 페미니즘 리뉴트를 경험하고 있다. 이들은 대중문화의 주류 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는 젠더 편향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수용자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대중문화 소비 활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2. 또 하나의 키워드 ‘성폭력’ 


걸크러시라는 긍정적 키워드와 함께 또 다른 키워드 ‘성폭력’이 최근 부쩍 눈에 띤다. <매드맥스>, <스포트라이트>, <룸>, <내부자들>, <귀향>, <곡성>, <아가씨> 등의 영화에서는 여성 성폭력이나 아동 성폭력이 중요한 영화적 소재로 쓰인다. 걸크러시 현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성폭력 소재 영화들에서 성폭력의 재현은 이전과 달라지고 있는가 하면,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스틸컷 사진 출처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매드맥스>에서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지구에 새로운 폭군이 등장하여 생식능력이 있는 젊은 여자들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끊임없이 임신하게 한다. <스포트라이트>는 미국 가톨릭 신부들의 아동 성폭력을 파헤치는 기자들의 활약을 다루는 실화영화이며, <룸>은 7년 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성노예로 착취당하다가 필사의 힘으로 탈출한 한 여성의 실화를 다룬다. 이 영화들은 성폭력이 서사의 중심 사건이지만 성폭력 묘사는 거의 배제된다. 성폭력 장면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후 인물들이 이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가 서사의 중심이다. (예: <룸>의 성폭력 장면)   

영화에 이야기가 도입되기 시작하던 초기 시대부터 영화는 “남자와 여자와 총”(D.W. 그리피스)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폭력은 영화의 필수 성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르영화가 생겨나기 시작한 100여 동안의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발달과 관객 의식의 변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이 영화의 폭력 묘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면 한국영화로 들어와 보자. 영화의 폭력 이미지 묘사는 동시대 사회의 젠더 감수성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시각 스펙터클이 중요한 요소인 영화는 선정성으로 시장에 즉각적으로 호소하려는 속성이 있어 폭력 이미지를 더 과잉되게 그려내곤 한다. 이러한 영화들은 일명 익스플로테이션(exploitation) 영화라고 불린다.   


한국 장르영화의 성장과 함께 폭력 재현이 과잉되게 남발되고 있는 현재, 폭력 이미지 재현에서 윤리성, 제의성, 방어기제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미디어의 폭력 이미지 묘사는 위험하고, 모방범죄 등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표현을 법률로써 제재해야 한다는 것이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다. 폭력이 도덕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이미지 재현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쁜 것은 폭력 이미지를 물신화해 포르노그래피식의 쾌락을 얻게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폭력 장면을 예술적으로 그렸다고 지지를 받는 경우, ‘폭력 미학’, ‘헤모글로빈의 시인, ’폭력의 피카소‘ 등과 같은 별칭을 얻곤 하는데, 여기에는 폭력 장면을 보는 철학적 의미가 있다. 영화의 폭력을 이해하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제의론은 영화의 폭력을 인간이 지닌 디오니소스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제의로 간주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전쟁과 광기로 터져 나올 폭력 충동이 영화로 인해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적응론은 속도감, 과잉 자극이 특징인 근대 사회에서 영화는 “대중적 정신 이상에 대해 정신적 예방 접종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발터 벤야민,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는 주장과 관련이 있다. 영화의 폭력 이미지는 현실의 폭력 에너지가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방어기제론은 예로부터 조각난 신체에 매혹된 사람이 자아의 통일성을 위해 타자를 조각내려는 충동이라는 본성을 영화나 시각문화를 통해 정화한다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이론은 정치 리더들의 암살과 베트남 전쟁 등 폭력의 시대에 과격해진 할리우드의 스크린 폭력이나, IMF 시기의 조폭영화, 시민에 대한 폭압이 가해진 보수주의 정권기의 스릴러 영화의 번성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폭력영화 마니아 중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게 사실이다. 폭력 이미지에 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폭력 이미지 이면에 놓인 정치적 메커니즘이나 사회적, 젠더적 폭력 구조에 눈을 돌려야 하지만 화려한 폭력성은 이를 방해하곤 한다. 주관적 폭력의 직접성으로부터 눈을 돌려 “객관적 구조적 폭력을 응시”(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해야 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밀양> 공식 스틸컷

이창동 감독은 <밀양>을 찍은 후 한 대담(《씨네21》, 602호, 2007. 5)에서 “영화가 그렇게 윤리적인 매체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영화가 관객의 영혼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윤리적 화두를 던진다. 공포영화에서 클리셰가 된 장면이 있는데, 연쇄살인마가 여성 희생자를 쫓을 때, 카메라는 여성을 보는 살인마의 시점과 놀란 여성의 시점을 오간다. 관객인 우리는 두 시점을 번갈아 점유하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살인마가 여인을 끔찍하게 살해할 때, 완수의 쾌감을 느끼는가, 아니면 고통을 느끼는가. 복수의 시점이 균형을 잡아 줄 수 있을까. 무의식에 자리한 파괴적 충동을 살려내는 순간은 아닌가. 여기에서 영화의 폭력에 탐닉하는 폭력성의 포르노그래피라는 문제가 생겨난다. 


파퓰러 페미니즘의 확산과 여성주의를 둘러싼 사회의 인식 변화와 함께 영화계 내부에도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주류영화에서 남성 서사의 장르영화가 많지만 여성 캐릭터 표현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 장면 연출에서 여성관객을 의식하는 점이 보인다. CGV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상반기 여성관객이 61%라고 하는 점(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 78호)에서 볼 때에도 여성관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 <곡성>의 성폭력 묘사 장면) 


2000년대에 나온 조폭영화에서까지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강간 장면은 장르 컨벤션이었다. 조폭 사이의 신체적 폭력처럼 여성에 대한 강간도 일반적 폭력 장면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러한 문제들이 많이 시정되고 있는 지금,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에서 나타난다. 여성 중심 서사의 성폭력 묘사 사례를 보자. <귀향>에서의 성폭력 장면이다. 


이 장면은 역사 속 고통스러운 순간을 현재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 꼼꼼하게 연출되었다. 일본군 ‘위안부’가 처한 가장 잔인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꽤 오랫동안 이 장면을 봐야지만 관객이 위안부 피해자의 감정에 이입하고 그들을 애도할 수 있을지 질문할 차례다. 고통스러운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모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창작자가 강제한다. 이러한 꼼꼼한 묘사는 성폭력을 스펙터클화하고 피해자를 성적 묘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순결을 잃은 소녀’ 서사는 소비적 감상주의로 인해 구조적 폭력을 보기 힘들게 한다. 사악한 일본군의 얼굴과 멍든 조선 처녀의 얼굴의 대비는 폭력 이미지 뒤에 숨은 사회의 구조적 폭력, 즉 군국주의 가부장제 국가가 여성으로 젠더화된 식민지를 집단 강간했다는, 역사적 맥락 및 국가 시스템을 지워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성 피해자의 수난 장면을 꼼꼼하게 재현하는 것을 통해 불행한 타자를 이상화하는 태도는 기만적이다. 이는 자아의 무능력을 은폐하려는 시도이다. 좌파, 우파, 남녀노소 관객을 아우르며 <귀향>은 흥행에서 성공했지만 주관적 폭력으로부터 객관적 구조적 폭력을 응시하도록 하는 영화서사 구조의 결핍으로 인해 영화는 단순하게 소비되고 말았다. 윤리적 착각이라는 면에서 영화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진다. 영화를 보러가는 것이 마치 행동하는 시민이 된 것 같은 착각 말이다. 개인의 죄책감과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상의 인식의 확장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영화는 선동적 프로파간다에 그치고 만다. 


3. 젠더 스와프의 가능성     

 

브로맨스 영화의 전성기, 아재 예능의 전성시대다. TV 예능 버라이어티의 멀티 MC 체제에서 성공한 여성 MC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재’, ‘아빠’가 예능의 흥행 키워드가 되었다. 돌보는 아빠, 요리하는 남자, 놀고 꾸미는 아재 사이에 낀 여성은 욕 받이 비호감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여자 연예인은 진짜 사나이가 되어야 하고, 예체능에서는 남자와 함께 몸으로 대결해야 하며, 여자 개그맨은 철부지 남자를 이끄는 가모장이 되어야 한다. 


브로맨스 영화에서 여성은 아픈 아내(<아수라>, <신세계>), 마담(<범죄와의 전쟁>, <타짜>), 희생양(<내부자들>, <아저씨>), 덜 성숙한 동료(<소수의견>, <감기>)이다. 역사는 룸살롱에서 이루어지고, 접대부와의 동영상이 협박의 만능키로 등장한다. 딸은 울고 있고, 아내와의 감정적, 육체적 교류는 거의 없다.   


이미지 출처 : 일간스포츠 - 중앙일보이미지 출처 : 메트로



여기에 소수의 여성 중심 서사 영화가 있었다. <차이나타운>은 갱단 두목을 여자로, 그리고 그의 뒤를 잇는 차세대 리더 역시 여자로 설정했다. 어린 여성 갱은 순결무구한 또래 남자로 인해 비정한 갱스터 세계의 속성을 깨닫게 되는데, 이 영화의 서사구조와 캐릭터는 기존 남성 중심 갱스터 영화에서 성별만 바꿔놓은 것이다. <아가씨>의 경우 레즈비언 무비의 시장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영화이지만, 펨-펨 레즈비언 커플은 충무로 남성 감독의 시선에서 쾌락적으로 그려진다. 영화의 아름다운 레즈비언 커플은 남성 시선에서 볼 때 덜 위협적이어서 수용에 별 문제가 없다. 여성감독이 만든 <비밀은 없다>는 사회의 여혐 현상을 은밀하게 투영하는 대담한 성 정치학 텍스트이지만 관객의 악평에 시달리며 처참한 성적을 남기고 금세 극장가에서 사라졌다. 씁쓸한 결과로 아직 갈 길이 멀게 만 느껴진다.   


일방적으로 하나의 젠더 재현이 휩쓰는 한국영화계 현실에서 다른 재현과 다른 감각을 펼치는 할리우드의 젠더 스와프 현상을 지켜봐 할 것이다. <매드맥스>, <고스트 버스터즈>, <스타워즈> 등 여성 액션 주인공 영화에 이어 ‘엑스맨’을 여성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는 계획은 확실하게 성사되고 있고, 007의 새로운 본드로 여자배우도 후보에 올릴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세계 영화계의 경향이 이러할진대 우리 영화계도 관객의 선택이라는 이유를 들어 브로맨스 영화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재현과 다른 감각과 다른 시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관객의 영리한 관람 행동이 중요하다. 


4. 여성인권영화제 출품작 경향과 그 외






데이트 폭력 문제, 성폭력 이후의 트라우마, 동성애 등을 다룬 단편영화들이 최근 많이 출품되고 있다. 대중 페미니즘의 확산이 그 이유인지, 몇 년 전만해도 왕따 문제, 실업 문제, 사회생활 문제, 가족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많았는데, 조금씩 경행이 변화되고 있는 것이 체감된다.  


폭력 문제, 폭력 이미지는 대중적으로 소비되거나 설득되기 쉬운 문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객관적 구조적 폭력을 응시하지 못할 때의 폭력 이미지는 익스플로테이션이 되고 만다. 사건 그 자체의 비극성에 집착하며 개인의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애도의 행위가 아니며 표면의 전시일 뿐이다. 또한 폭력 이미지 그 자체의 탐닉적 묘사, 혹은 폭력의 순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은 위험하다. 영화에서 폭력 이미지는 어떻게 조직되는가의 문제와 관련을 맺어야 한다. 


세상은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곳이다. 폭력은 세상에 늘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 폭력의 작가들이 필요하다. 문제는 쾌락인지 고통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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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혼 법제화, 나와 세상을 받아들일 용기

다큐멘터리 <사회학자와 곰돌이>


최호연 페미디아


감독(오른쪽)과 통화하는 사회학자 이엔 테리(왼쪽) / 사회학자와 곰돌이(SOCIOLOGIST AND POOH, 2015)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해 현명한 결론을 내릴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당연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갓 스무 살이 된 2년 전의 난 "동성 결혼 법제화까지는 지지하지만, 동성 부부의 자녀 입양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 정리가 안 됐어" 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어쩐지 남성 양육자와 여성 양육자의 돌봄을 골고루 받아야만 아이가 건강하게 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굽히기 싫었고, 동성 부부의 자녀 입양에마저 동의하는 '너무 멀리 나간 사람'으로 보이기 싫다는 이유 모를 마음도 있었다. 약자의 인권이나 정치적 존재로서의 내 삶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본 적 없었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한 흑역사다. 비슷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아마 나 말고도 많겠지. 


이러한 우리를 위로하는 듯, 사회학자 <이렌 테리>는 영화의 막바지에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은 자기들의 생각이 변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걸 싫어해. 그건 본인이 과거에는 틀렸고 지금은 맞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꼴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생각의 변화는 '틀림에서 옳음으로의 과정'이 아니야.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언제나 '틀린'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어. 세상은 계속 변하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의 이면을 말하다 <사회학자와 곰돌이>


<사회학자와 곰돌이>는 2012년 9월부터 2013년 5월까지, 프랑스에서 진행된 동성혼 법제화와 관련된 논의의 진행에 대한 영화다. 감독은 사회학자 이렌 테리와의 대화를 통해 지금껏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실은 얼마만큼의 투쟁과 변화를 거치며 만들어졌는지, 의심의 여지 없이 무언가가 '당연하다'는 믿음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틀어막혀 왔는지를 보여준다. 


고용주의 아이를 갖게 되어 더럽다는 소리를 들으며 주인집에서 쫓겨난 이렌의 증조할머니, 아빠 없는 아이라는 불명예를 씻어내고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결혼을 택한 이렌의 할머니, 2차 세계대전 후 연인과 결혼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살아간 이렌의 어머니, 그리고 결혼 제도 자체에는 회의적이었지만 파리로 발령을 받기 위해 연인과 시청에서 간략하게 결혼식을 올린 이렌 본인. 네 세대를 거치며 결혼 제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요소들도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동성 간의 결혼 또한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시대가 왔다.


"성소수자들은 왜 하필 지금에서야 결혼할 권리를 요구하나요?"라는 감독의 질문에 이렌은 답한다. 오래전 성소수자들은 자기의 성적 지향을 숨기고 이성과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서 겉보기에 '정상'으로 여겨지는 삶을 살아냈다고. 결혼 제도밖에서 배우자 몰래 동성 애인을 만나는 이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다 베이비 붐 세대의 성소수자들이 이성 배우자와 가정을 만드는 이중생활을 택하길 거부하고 벽장 속에서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식을 기르며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하는 성소수자들도 여전히 있었다고. 여자와 남자가 만나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편적인 모델로 내세우는 이성애 중심적 사회는 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성소수자들을 침묵시켜 왔다. 그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지켜내고 주장해온 동성애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고, 이제야 비로소 대중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동성혼 법제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프랑스에 필요한 건 동성애자가 아니라 아기들이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 가정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등의 구호를 내걸고 시위를 한다. 성소수자들을 존중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거라며,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보편적 본보기로 여겨질 순 없다고 말하면서 본인은 호모포비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미 동성 커플에 의해 길러지고 있는 아이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 건 맞지만, 소수의 그들을 위해 법 전체를 갈아엎을 필요는 없다고, 가정이 튼튼하지 못하면 사회도 튼튼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들과 동성 부부의 입양에 쉽게 찬성할 수 없다고 말하던 2년 전의 나는 대체 뭘 지켜내고 싶었던 걸까. 누구를 위한 주장이었을까. 몇 년 후, 몇십 년 후 우리는 그때 지켜내고 싶어 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어떤 생각을 할까. 부끄러움을 느낄까, 아니면 결국에는 지켜내지 못한 무언가를 계속해서 아쉬워할까. 




혹자는 아이를 기르고 가정을 꾸리겠다는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 자체가 사회적 정상성의 구조에 순응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정상적인 본보기로 여겨지는 삶을 누구는 마음 편히 누리지만 다른 누구는 손쉽게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차별의 증거인데, 이미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사회 모든 정상성의 구조에 맞서 싸우기를 요구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동성혼 법제화가 동성애자 이외의 다른 성소수자들을 차별하는 정상성을 재생산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네 명 다섯 명의 사람들이 부부의 연을 맺고 싶어 한다면? 양육자와 피양육자들의 조합이 아닌, 다른 형태의 관계로 가족을 구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에 따르는 무게를 나누어 짊어져야 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건 세상에서 온전한 1인분의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상성의 모델을 거부하고 시위하는 이들만의 몫일까. 


결국, 2013년 봄, 프랑스 의회에서 찬성표 331개와 반대표 225개를 얻고 동성혼이 법제화된다. 이 이후로도 특정 집단에 붙는 비정상이라는 꼬리표를 조금이라도 지우고자 노력하려는 목소리는 계속 나올 것이다. 무언가가 '당연하다' 혹은 '옳다'는 지금 나의 믿음이 사실은 누군가를 억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깨달음을 받아들일 용기를 우리는 갖고 있는가.





* 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 페미디아는, 여성과 여성주의, 여성운동에 관련된 외신을 번역하고, 국내/외 연구를 소개하며, 여성주의적 시선의 비평을 싣는 온라인 여성주의 매체입니다. 최호연은 페미디아 연구소개팀에서 편집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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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에는 성별이 없다

다큐멘터리 <성평등을 코딩하라>


갱 만화평론가, 프로그래머




첫 사회생활을 IT 회사에서 시작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꾸준히 '개발'을 해왔다. 일보다 인원이 부족하여 개발과 관리 직무를 오갔으나, 관리 직무를 수행할 때라도 자잘한 개발 일들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이직으로 인해 전 직장의 선배들과 송별회를 할 때의 일이다. 거나하게 취한 우리는 '개발자의 경력 종착점은 치킨집 아니면 프랜차이즈'라며 자조 섞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자 동석자 중 한 명이었던 팀장이 자신은 퇴직 후 IT회사를 창업하겠다며, 어두워진 분위기를 가로지르고 자신의 포부를 밝히기 시작했다. 


하필 취한 내가 그것을 흘려 듣지 않고 '그럼 저도 입사하겠습니다'고 외친 게 화근이었다. 아주 재미난 유머를 들었다는 듯 팀장은 한바탕 크게 웃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개발을 할 줄 아냐? 넌 와서 경리 해라.


그 말은 들은 후, 불현듯 급격한 두통이 몰려 왔다. 알코올 때문만은 아니었다. 업무상 엮이지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그는 내 직속 팀장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개발했다고 보고한 시스템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그는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해 왔던 걸까.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고, 이 물음표는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뿌리내렸다. 그후부터는 꽤 재미있게 해오던 개발도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스티븐 잡스, 마크주커버그, 일론 머스크…. '실리콘 밸리에서 조차 남성의 이름만이 빼곡한데 하물며 나 따위가 뭐라고' 하는 자책만이 가득 찼다. 



전문성을 증명해야 하는 여성, 쉽게 받아들여지는 남성


<성평등을 코딩하라!>의 오프닝에 실리콘 밸리의 거물 남성들의 얼굴이 영상을 가득 채운 것처럼, 우리나라의 IT 역시 그랬다. IT 콘퍼런스에는 90~100%의 비율로 남성 스피커가 압도적으로 많고, 대다수 회사에서 CTO 역시 남성이 차지하고 있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는 IT 업계에서 여자 노동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로, 여자에게 불공평한 현실뿐 아니라 현재까지 여자들이 IT에서 일궈 낸 성과들도 밝혀낸다. <성평등을 코딩하라!>에 따르면, 최초의 프로그래머조차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여전히 IT 업계의 이방인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여자 아이들이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이공 계열 능력을 함양할 수 없게 하는 교육 풍토의 문제가 존재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위시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언제나 남성만이 프로그래머로 등장하는 설정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모 타이어 업체의 광고엔 '컴퓨터 고장 나면 오빠'라는 문구와 함께 여자가 컴퓨터를 남성에게 맡기는 장면이 그려진다. 여자는 전자·전기·컴퓨터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존재로 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매체들은 여성과 기술이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라는 이미지를 심어낸다. 


더 심각한 건 이러한 시각이 IT 업계 바깥쪽만을 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IT 업계의일선에서 뛰고 있는 여러 여성 노동자들을 향해서도 이러한 편견은 이례 없이 작동한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를 보며 가장 공감이 갔던 장면은 깃헙(github, 프로그래머라면 전 세계 누구나 아는 서비스다. 서로 개발한 코드를 공유하고, 수정하며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수 있다)에서 일했다던 여성의 인터뷰였다. 


그녀는 회사 동료들과 토론이라도 할 때면 언제나 자신의 전문성을 또다시 증명해야 하는 벽에 가로막혔는데, 이건 나 역시 현장에서 너무나도 많이 접했던 일들이었다. 나야 연차가 낮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전문성이 없어서그랬을 수 있지만, 나보다 훨씬 오래 근무한 10년 차, 15년 차 여자 선배들 역시 그러한 대우를 받았다. 


똑같이 기술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도, 여자 선배의 말은 마땅한 근거 없이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반면 남자 선배의 말은 너무나 쉽게 수용됐다. 남자 선배가 틀린 경우도 많았지만, 이슈가 발생하면  'Brogrammer'(Brother + Programmer의 합성어)라는 말마따나 남자 개발자들끼리 모여 웅성거리면서 처리해버렸다. 기술 동향 같은 것도 여자에게는 쉽사리 오픈하지 않고, 남성들끼리만 은밀히 공유하곤 했다. 분명히 이 태도들에 악의는 없었지만, 그기저에는 '여자는 기술에 관심이 없다'(심지어 같은 IT 종사자인데도 말이다!)는 견고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자 개발자에게 남은 길이라곤 남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인재가 되거나, 차별에 무심한 채 자족하는 것뿐이다. 전자든 후자든 고달프고 외롭기는 매한가지다. 얼마 전에 만난 여자 후배는 어제도 새벽까지 야근했다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여자 개발자들은 야근 안 한다는 편견을 깨고 싶어요. 그래서 오기로라도 전 매일 야근해요. 남자 개발자들 다 퇴근해도 전 꿋꿋이 남아요. 


그녀는 여자라는 편견을 깨고 싶어 했지만, 그 기준은 언제나 남성이었고 편견에 대한 판단 역시 남성이 내리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혹독해져야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깊이 우울해졌다.






실력과 여성을 조합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물론 나 역시 이러한 시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남성들에게 인정받아야만 '진짜 개발자'가 되는 것처럼 언제나 'Brogrammer'들의 근처에 기웃거렸다. "나 정말 기술에 관심 많다고요!" 하면서 업무 외의 개발을 무리하게 소화하려 하기도 했다. 


하나같이 남성을 향한 인정 투쟁이었지만, 그 끝에는 '네가 개발을 할 줄 아냐?'는 맥 빠지는 질문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 허무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었을 때여서 그랬는지, <성평등을 코딩하라!>는 더욱 반갑고 위로가 되는 필름이었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는 여성과 기술의 관계가 결코 이질적이지 않음을 다시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 문제를 위해 투쟁하려는 여성들이이만큼이나 있다며 IT 업계에 여성들이 꽂아낸 깃발들을 펄럭인다.


아직도 '능력'과 '여자'는 상치되는 개념처럼 존재한다. 이건 비단 IT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것이다. 심지어 어떤 여자는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가 아니'라는 취급까지 받기도 한다(최근 <진짜사나이>에 출연한 이시영이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은 아이즈의 칼럼을 참조). 


때로는 여성성을 포기하고 명예 남성화돼야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실력도 있고 여성성도 갖춘 데다가 적당히 남성을 배려하기까지 하는 초-슈퍼우먼(<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처럼, 대중 매체는 여자는 유능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하는 이미지를 그려낸다.<배드 걸 굿 걸(수잔 J 더글러스, 글항아리 출판사)> 에 따르면 이는 성차별주의의 진화된 모습이다)을 바라기도 한다. 


나는 '실력'과 '여성'을 작위적으로 조합하려는 이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여성도 한 사람의 노동자이고 한 명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언제까지 외쳐야 할까. 내가 회사와 계약한 건 '노동력'이지 결코 나의 '여성성'이 아닌 것이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를 보고 난 후, 나는 확신에 찼다. 디버깅해야 하는 건 팀장의 머릿속이지, 나의 성과물이 아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네가 개발은 할 줄 아냐'라는 그의 말에 이제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하려고한다. 



물론이지, 난 IT 전문가야! 여자인 게 뭐, So 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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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

김포공항 사태에 대한 분노, 

여성노동의 현실 바꾸는 시작점 되어야


지원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가벼운 차림보단 양손 가득 짐과 캐리어를 동반한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김포공항의 1층. 로비 한 가운데에는 한국공항공사 소속인 김포, 김해, 제주 공항의 높은 평가 순위를 자랑하는 원기둥 형 전광판이 비치되어 있다. 그러나 공항운영의 ‘효율성’ 평가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이들은 여성노동자의 시각에서 보았을 땐 결코 떳떳하지 못하다. 최근 김포공항의 청소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인권유린의 실태가 폭로되면서, 이들의 원청업체인 한국공항공사가 구설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지속적인 성추행 문제 제기… ‘공항 마피아’가 문제일까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이 지난 12일 파업결의 대회를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면서, 이들이 겪는 고충이 하루가 다르게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국내선, 국제선, 화물청사 등 김포공항 내 모든 시설의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데, 연간 7만 명의 승객이 이용하는 규모에 비해 청소노동자의 수는 150여 명에 불과하다. 웬만한 학교 운동장보다 넓은 공항 한 층에서 청소노동자들이 카트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어느 청소노동자의 말에 따르면, 층별로 배치된 노동자는 2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해마다 늘어나는 승객 수에 비해 일하는 사람의 수는 정해져 있으니 고강도·장시간 노동은 기본이다. 또한, 시간당 8,200원의 시중 용역단가와 상여급 400% 지급을 규정한 정부 지침이 무색하게, 이들은 최저 시급과 175%에 그친 상여급을 받고 있었다.


논란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용역업체 관리자들에 의한 상습적인 성추행 실태이다. 파업결의 대회에서 손경희 지부장은 공항청소노동자들이 용역업체 관리자들로부터 상습적으로 ‘추행과 술접대 강요’를 받아왔다고 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그에 따라 정당한 보상조차 이뤄지지 않는 체계, 이에 여성에 대한 폭력까지 더해진 절박한 상황에서 그들은 자연스레 ‘인권’을 외치게 되었다.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으로 한국공항공사의 ‘낙하산 인사’가 지목되고 있다. 한국공항공사의 퇴직자들이 낙하산 인사를 통해 공항의 주차, 청소 업무를 관리하는 용역 업체의 간부가 되는 관행 속에서 부당한 대우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정치인, 언론사는 공항 마피아, 소위 ‘공피아’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소리 높여 비판하고, 시민들의 분노 또한 이에 집중되는 듯하다.


여성노동의 얼굴을 비추는 청소노동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이 겪은 고충의 일차적인 가해자인 ‘공피아’와 원청업체인 공항공사에 대한 분노는 합당하다. 그러나 관심과 분노의 수렴 점은 ‘공항 마피아’에 그칠 것이 아니라, 청소노동으로 대변되는 여성노동의 현실로 모여야 한다. 청소노동자들이 겪는 불안정 고용, 장시간·저임금 노동, 성추행과 같은 비인간적 대우는 근본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여성노동의 문제와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공피아의 척결은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문제 해결의 전부는 아니다.






여성노동은 ‘여성의 임금노동’이란 포괄적인 표현으로 정의되는데,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그 내용이나 성격은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가사·돌봄과 같이, 한 사람과 사회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이 여성의 일로 간주하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가정의 안에서도 밖에서도 이는 여전히 ‘여성노동’의 이름을 하고 있다. 재생산 노동은 집안에서 꾸준히 여성이 해오던 일이고, 많은 부분 시장화된 현재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여성의 몫이다. 그간 여성들이 무급으로 가정의 재생산 영역을 맡아오면서, 청소노동과 같은 여성노동은 여성이 원래 하는 일(앞으로 여성이 맡아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중심적이기보단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일로 취급받는다. 이에 더해, 우리 사회에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을 단순히 남성 배우자의 수입에 대한 보조적인 역할로 간주하는 통념이 자리하고 있다. ‘반찬값 벌기 위해 나온 여성’이라는 왜곡된 시각은 여성을 한 명의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부당한 성별 임금 격차와 저임금을 합리화한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성희롱·성추행 등의 폭력에 노출되기도 한다. 성인 성폭력 피해의 경우 직장 내 고용주 및 상사에 의한 피해가 매우 빈번한데, 고용주와 직원 간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가 2015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 특별히 대처하지 않고 참고 넘어갔다고 응답한 비율은 10명 중 8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중심적인 직장 문화 속에서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불안정한 고용상태를 경험하는 여성노동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맞서는 것은 생존권의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결국, 김포공항 사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노동에 대한 차별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응축된 문제이다. 공항공사의 공피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지만, 이는 공항이 아닌 학교, 마트, 기업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문제이다.


여성노동자들의 현실 바꾸는 시작점 되어야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의 싸움에 야당 의원들, 전국의 여러 사회단체와 시민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아직 앞서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지 못한 다른 용역업체 노동자들이 몰래 응원의 눈짓을 보낼 때도 있다고 한다. 이들의 투쟁이 저마다 다른 곳에서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부당한 ‘갑’의 횡포에 맞서는 속 시원한 투쟁이 될 것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들의 승리는 노동조건의 최저선을 상승 시키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필자는 이번 싸움이 여성노동자들 스스로 직장 내 성차별, 여성노동에 대한 차별을 바꿔가는 투쟁이라 생각한다. 청소노동자들의 투쟁, 사람들의 높은 관심과 지지가 갑질과 낙하산 인사에 대한 분노에 그치지 않고, 여성노동과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하는 시작점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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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

월경의 재조명

 

김채영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마법’이 아니라, 월경

 

인류의 절반은 생애 상당 부분 동안 피를 흘린다. 물론 그 기간이나 규칙성의 정도에는 개인차가 있지만, 여성들은 평균 십삼 세에서 오십 세까지 자궁점막이 출혈과 함께 배출되는 생리현상을 겪는다. 이 평범한 현상은 ‘그날’도, ‘마법에 걸린 것’도 아닌 ‘월경’이다. 월경은 생리현상 전반을 의미하는 ‘생리’라는 순화된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그날’과 ‘마법에 걸렸다’는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왜 우리는 월경이라는 정확한 말을 두고 그날 혹은 마법이라고 해야 할까? 월경과 생리가 그리도 거북한 것일까?

 

월경의 역사

 

지난 7월 인사동에서 생리대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한 공사판 벽면에 생리혈과 붉은 물감이 묻은 생리대와 속옷이 붙고, “임신과 출산은 고귀하지만, 생리는 숨겨야 할 부끄러운 일입니까?”, “나 오늘 넘어져서 손바닥에 피 났어. 나 그거 해. 왜 생리는 생리라고 못하나요?” 등의 문구가 적혔다. 이 퍼포먼스는 큰 관심을 끌며 기사화되었는데, 상당수의 의견이 ‘더럽다, 과격하다, 여자인 나도 더럽게 생각하는 생리대를 왜 붙이느냐’ 등이었다. 생리혈에 대한 반감, 월경의 터부시가 명백히 표면화된 것이었다.


출처:m.mt.co.kr출처:www.womennews.co.kr




 

금기로서의 월경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 고대 로마 자연학자 플리니는 월경혈을 ‘죽음에 이르는 독극물’이라고 생각하였고, 호주의 일부 선주민 부족은 월경혈이 남자를 죽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알래스카의 콜로쉬인들은 초경을 하는 소녀가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여 일 년 동안 오두막에서 혼자 지내게 하였다. 이런 터부시의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생리를 더럽고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과학을 통해 월경이 무엇인지 규명이 된 오늘날에도 인식은 그대로이다.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생리대를 건네받을 때 혹 남들이 볼까 비밀스럽게 행동하고,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사면 점원은 이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는다. 우리는 생리를 숨겨야 하는 수치스러운 일로, 생리혈은 더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강요받아 온 것이다.

 

월경은 숨겨야 하는 대상인 동시에 여성을 보다 열등한 성으로 만드는 수단이었다. ‘히스테리’는 '자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hysteria)에서 유래하였는데, 과거 정신장애가 여성에게 자주 일어나는 증상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여성이 기분이 나쁘면 생리 중이라는 편견과 그 맥을 같이하는데, 생리 중인 여성은 비논리적이고 비정상적으로 감정 기복이 있다는 사회적 통념은 오늘날에도 만연하다. 월경전증후군으로 여성의 감정이 진단되면서 월경은 질병으로, 여성의 감정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월경은 보여서는 안 되는 금기이자 여성을 보다 열등하게 만드는 현상으로 정의되어 왔고, 또한 정의되고 있다.

 

#생리대를붙이자 캠페인

 

지난 5월 저소득층 가정의 여학생이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이나 휴지를 사용한다는 소식이 큰 쟁점이 되었다. 생리대를 할 수 없어 일주일 내내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 눈치를 보며 보건실에서 생리대를 받아 써야 하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필수품인 생리대의 가격을 인하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6월에는 광주 광산구의회 정례회에서 저소득층 지원 물품에 생리대를 추가하자는 내용의 건의안에 새누리당 박상용 의원이 "위생대, 그러면 대충 다 알아들을 것이다, 본회의장에서 생리대라는 것은 좀 적절치 못한 그런 발언이지 않으냐 그런 생각이 든다"라는 생리대 혐오 발언이 논란이 되었다. 7월에는 재난구호 물품에서 생리대가 제외되었는데, “생리대는 활용도가 낮은 데다 활용 연령대도 제한적이다. 제품 선택 등 개인 취향의 문제가 있고 오래 보관할 경우 변질 가능성이 있어 제외했다”라는 것이 그 연유였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가 생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주면서 #생리대를붙이자 캠페인을 촉발하였다. 이 캠페인으로 생리대 가격 인하를 주장하고 생리에 대한 무지함과 혐오를 꼬집는 인사동 생리대 퍼포먼스가 전개되었다.

 

출처:https://twitter.com/g__susan

우리나라의 생리대는 상대적으로 비싸다. 한국소비자원 참가격에 의하면, 한국 생리대의 개당 가격은 331원으로 일본, 프랑스. 덴마크, 미국, 캐나다 5개국의 평균 가격인 187.6원보다 높다. 또한, 소비자물가지수를 고려해볼 때 생리대 가격이 물가보다 빨리 올라 소비자들이 면세 효과를 체감하기 어렵다. 물론 다양한 종류의 생리대가 있고, 구매 경로마다 가격차가 있으므로 정확한 비교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 생리대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주장에 인용되는 통계는 이마트의 노브랜드 생리대를 기준으로 하거나, 한국 팬티라이너와 외국 생리대를 비교하는 등의 오류가 있어 신뢰하기 힘들다.

 

또한, 생필품인 생리대에 대한 국가 차원의 인식이 부족하다. 면도기는 필수품이지만 생리대는 기호품이고, ‘생리’가 거북하니 ‘위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발상은 젠더 감수성이 모자란 국가 기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자연스레 사회 일반의 생리에 대한 상식 부재와 혐오에 대한 문제로 퍼졌는데, 생리대 가격 인하 주장이 일자 “생리대는 하루 두 개면 충분하지 않나”, “생리를 참았다가 집에서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와 같은 상식 밖의 의견들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생리대를붙이자 캠페인은 생리대 가격 인하와 인식 개선의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와 함께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났다. 저소득층 여학생에게 생리대를 지원하기 위한 크라우드 펀딩, 서울시와 성남시의 생리대 지원, ‘생리대 만드는 청년’의 저가 생리대 보급 프로젝트까지 실질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다방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개선이 없다면, 이는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고, 모든 여성이 경제적 부담 없이 생리대를 사용하며, 생리휴가를 쓰면서 필요한 휴식을 취하는 사회는, 월경을 불편하고 거북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로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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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




  역사에는 전쟁이 있었고, 전쟁에는 여성이 있었다. 여성의 몸은 강력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가부장제와 결합하며 ‘전리품’ 또는 ‘성노예’의 형태로 활용되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성노예’나 베트남전쟁의 ‘성노예’, 한국전쟁 이후의 ‘양공주’, 그리고 기지촌의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섹슈얼리티의 결합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민족주의적 질서 속에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들이 강제든 아니든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에 분노한 것이다. 민족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에서, 여성의 고결함과 정숙은 민족주의적 자부심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여성과 전쟁, 반복되는 역사②

애국주의와 기지촌


김채영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1992년 10월 28일 동두천에서 윤금이라 불린 미군 상대 성 판매 여성이 미국인 케네스 마클에 의해 살해되었다. 전국의 사회운동단체들은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정부의 철저한 수사와 처벌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1994년 마클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 사건은 ‘민족적 수치’로 여겨졌던 기지촌 성 판매 여성의 죽음에 온 국민이 분노했다는 점에서 인권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라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비판의 초점이 한미관계에 맞추어져 정작 기지촌 성 판매 여성의 현실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2014년 6월 25일 살아있는 전직 기지촌 위안부 122명이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국가가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했음에도 기지촌을 특정 지역으로 지정하여 성매매를 조장하였고, 성병 검진과 치료를 강요하였으며 ‘애국교육’까지 실시하였다고 밝혔다. 여과 없이 증언되고 있는 당시 정부의 기지촌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은 전쟁 속에서 여성의 몸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국가가 이를 어떻게 활용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안보와 달러를 가져온 애국자들


한국 전쟁 이후, 휴전 상태에 들어섰지만 사실상 전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는 주한미군의 군사력에 의지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이들을 위해 군산 아메리카 타운을 건설하고 매매춘을 만드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거기에 닉슨독트린으로 일부 주한미군이 철수를 단행하자, 박정희 정부는 추가 철수를 막기 위해 대대적인 기지촌 정비를 공식적으로 실시하였다. 전장의 병사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되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기 위해 안전한 성을 공급한다는 기지촌 정화운동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깨끗한 성’을 보급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매주 강제로 성병 검진을 하였다.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면 견디기 고통스러운 페니실린 주사를 맞고 3.4일간 ‘몽키하우스’라고 불린 보건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의정부 기지촌 성매매에 종사했던 여성은 ‘페니실린을 맞으면 한쪽 다리가 찢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고 거의 걸을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검사결과가 어떻게든 음성으로 나오길 바라면서 약국에서 항생제 주사약을 구입하여 스스로 주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페니실린 과다투여로 쇼크사하는 여성들이 속출했지만, 정작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보건사회부의 기록에 따르면 1956년부터 1957년 총 성병 검진횟수 43만~49만 중 경기도가 반에 해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경기도의 기지촌을 제외하면 대부분 내국인 상대 성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었다. 미군의 수는 한국 남성 인구의 1%에 불과했음에도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에 대한 성병 검진이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기지촌 여성들은 또한 마지막 검진일이 표기된 검진 카드를 소지하고 다녀야 했는데, 단속되었을 때 카드가 없으면 보건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공무원들은 그녀들에게 “애국하는 것이니 자랑스러워하라”라고 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기지촌을 미군 주둔을 위한 수단으로뿐 아니라 외화를 벌어올 기회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지촌의 경제 위력은 대단했는데, 1964년 외화수입 1억 달러 중 미군 전용 홀에서 벌어들인 돈은 970만 달러에 달했다. 그들은 ‘원자재 없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전사’였지만, 포주의 빚에 시달리고, 마약에 빠지고, 폭력에 시달렸다.


섹스동맹과 국가포주제


군대가 있는 곳에는 매매춘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지촌은 부도덕한 여성과 미군 병사 사이의 사적인 거래가 아닌, 한미 양국의 긴밀한 협력의 산물이었다. 병사들의 안전한 섹스와 스트레스 해소를 원한 미국과 주한미군의 주둔과 외화벌이를 원했던 한국 정부가 기지촌 정화 운동을 펼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의 본질에는 섹스동맹이 있었으며, 이는 국가 포주제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미군기지의 기지촌은 평택과 군산에만 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기지촌 여성들이 담보하는 국가안보에 의지하고 그들이 번 돈에 기생하였기에, 나라 전체가 기지촌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었다. 여성들은 단순히 성욕 해소의 수단을 넘어, 국가 간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자본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흔히 전시체제에서 여성은 소녀, 어머니, 창녀라는 이미지로 묘사되지만, 이 ‘창녀’는 타락한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적으로 생산된 여성이었다. 기지촌은 전시체제에서 여성이 국가와 민족에 의해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후 한국문학에서 기지촌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성 서술자들에 의해 ‘우리와 이질적인 미군들만을 상대하는, 성적으로 문란한 노동 계급’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을 기지촌으로 이끈 것은 전쟁으로 인한 빈곤과 더 나은 교육을 받아야 하는 남동생과 달러와 안보를 확보해야 하는 국가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기지촌의 여성들은 오늘날까지 페니실린과 마약으로 인한 부작용에 시달리면서, 부도덕하고 문란한 ‘양공주’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재작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122명 중 한 명인 만수화(가명) 씨는 코리아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도 가끔 잘 모르겠어요. 무엇을 위해서 왜 살았는가, 이런 거요. 그냥 참으면서 세월이 흘러간 거죠. 꿈이나 목적, 이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 가장 크게 잃은 건 시간 같아요. 그 시간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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