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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여성과 제모 ③] "너 그렇게 하면 남자들이 싫어해"

by kwhotline 2017. 11. 7.


[ 여성과 제모 ③ ]

"너 그렇게 하면 남자들이 싫어해"


이린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성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을 풀어내는 토크쇼에서 여성의 제모를 다룬 적이 있다. 겨드랑이, 다리털 제모 등으로 한 번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해본 출연자들은 매우 공감한 주제였지만,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느냐’며 이해하기 어려워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쉽게 말한다. 자기가 원해서 하는 제모가 왜 그렇게 문제냐고, 어떻게 여성 억압까지 될 수 있냐고. 하지만 과연 여성의 털이 여성 개인만의 문제였던 적이 있을까? 누군가에겐 선택이지만 여성에겐 그렇지 않은 제모 이야기, 그저 ‘보기 좋다’거나 선호의 문제를 넘어 여성의 제모가 갖는 사회적 의미를 더 깊게 파고들어보자.


 민소매를 입어야겠다고 생각한 날, 당연한 듯이 털을 밀고 있는데 문득, 제모를 하지 않는 생활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구글에 ‘제모’를 검색하니 제모용품, 제모 전문 샵 등 광고가 가득 나온다. 광고 말고 좀 더 개인적인 경험담을 찾기 위해 ‘제모 안 하는 여자’로 검색어를 바꿔 본다. 다양한 결과가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여성이 주체가 되는 글은 거의 없다.(‘제모를 안 하면 어떤 느낌일까요?’라든지) ‘여자친구가 너무 자기관리를 안 해요’, ‘제모 안 한 여자 만나느니 배 나온 여자와 사귀겠다’, ‘제모 안 한 여성은 게으르고 지저분하다는 인상 줘’ 등, 제모를 안 한 여성이 남성에게 어떠한 인상을 주는지에 대한 글만 가득하다. 순간 ‘제모를 안 하면 어떨까’하던 생각이 움츠러든다. 역시 나는 살던 대로 살아야 하나 보다.



남성의 시선, 대상화되는 여성


 제모를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논할 때 남성의 시선을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남성의 시선’이란 페미니즘 연구에서 오랫동안 다뤄진 부분이다. 서구 철학에서 시각 권력은 대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나비를 관찰하는 것이 결국에는 해부하고 죽이는 데까지 이르듯이 말이다. 인간 사회에서 이러한 시각 권력을 가진 사람은 남성이고, 시각의 대상은 여성이다.


관찰의 대상인 여성은 ‘신체 없는 기관’으로서 소비된다. 신체 없는 기관이란 신체의 일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상품화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미디어에서 여성이 출연할 때 카메라의 시선이 다리를 훑는 것, 광고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입술이나 가슴 등 특정 부위가 강조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 예시가 될 수 있다. 이 ‘신체 없는 기관’의 극단적인 예시도 있다. 여성의 성기를 본뜬 남성용 자위기구를 살펴보면, 여성의 가슴이나 발에 질이 재현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이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남성에게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기관으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내 마음 속 또 다른 시선


 남성의 시선이 남성들뿐만 아니라, 대중 매체와 주변 사람들을 통해 계속 학습되기 때문에 여성들은 스스로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을 바라볼 때 내가 얼마나 편한지,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는지보다 ‘남성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먼저 염두에 두게 되는 것이다. ‘제모를 하지 않는 여성’이 여성성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과 큰 관련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도 ‘제모를 하지 않으면 땀이 차나요?’, ‘제모를 하지 않으면 따가운가요?’ 등을 묻지 않는다. ‘제모 안 하는 여자친구 어떻게 생각하나요?’ 같은 질문은 발에 채일 듯 많은데도 말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제모를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위가 변화하는 현상 역시도 남성 선호의 변화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음부를 제모하는 ‘브라질리언 왁싱’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서양에서는 브라질리언 왁싱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이 여성들의 심리적 장벽을 낮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남성 선호가 달라진 것과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1~20년 전까지만 해도 음부에 털이 없는 여성은 기괴하게 여겨졌다.심지어는 ‘음부에 털이 없는 여성과 섹스하면 한동안 재수가 없다’ 등의 말이 남성들 사이에 돌았다고 한다. 여성 화장실에서도 쉽게 ‘털 없어서 고민이면 무모증 치료하세요’ 등의 스티커를 볼 수 있었다.



한 공중화장실에 붙어 있던 여성 체모시술 광고 스티커



 하지만 서양 여성들의 모습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더 나아가 하나의 미적 기준으로 자리잡으면서 남성들 역시도 음부에 털이 없는 여성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여성의 아름다움을 남성 시선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제모 형태도 남성의 선호를 철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평가로 가득 찬 일상


 남성 시선은 여성이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언어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여성에 대한 신체적 억압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대중을 상대로 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은 항상 외모에 대한 평가에 노출된다. 남성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모에 대한 지적을 크게 받지 않지만, 여성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일일이 신경을 써야 한다. 어떤 여성에게든 ‘오늘은 화장이 이상하다’와 같은 평가가 이어진다. 대중을 상대로 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직장을 다니거나 학교 생활을 하는 여성들도 동료나 친구들에게 이러한 말을 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쉽게 하는 평가에 주로 작용하는 건 ‘남성이 여성을 볼 때의 미적 기준’이다. 이 사실이 더 극명하게 드러날 때는, ‘너 그렇게 하면 남자들이 싫어해’ 같은 말을 들어야 할 때다.


 남성이 여성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고, 여성 역시도 그러한 시선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여성 스스로 자신의 신체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 SNS에서는 ‘남자친구가 없으니 제모를 안 해도 돼서 편하다’는 유머가 쉽게 공감을 받는다. 이는 여성이 남성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성은 사실 제모를 할지 안 할지를 정하는 게 아니라, 제모를 안 하면 견뎌야 할 온갖 시선과 비난을 어떻게 할지, 아니면 그냥 제모를 하고 다닐지를 정해야 하는 것이다. 제모는 여성의 선택이다. 하지만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존과 다른 선택을 하기 위해선 큰 ‘용기’가 필요한 상황에서, 결국 많은 여성들은 그냥 불편함과 비용을 감수하고 제모하는 길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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