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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후기·인터뷰

인내하지 않을 자유 - 아내폭력 생존자 수기집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서평

by kwhotline 2017. 11. 1.


인내하지 않을 자유


아내폭력 생존자 수기집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서평




예원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누군가를 만나는 동안 인내하는 데에 익숙했던 때가 있었다. 인내의 이유는 다양했다. 학생이었던 나와 다르게 상대는 회사에 다녔으니까 피곤했을 거라거나, 내가 지나치게 유난스러운 거라든지, 아니면 남자들은 원래 애 같으니까 어르고 달래야 한다는 등의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이 이유들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사실 같은 방향이었다. 나만 참으면 우리 관계가 무사할 거라는 것. 그래서 2시간도 넘게 말을 안 하고 휴대폰만 보고 있어도, 싸움 중간에 혼자 가버려도 원망하지 못하고 말을 꺼낸 나를 자책했다. 상대가 결국은 자기 마음대로만 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로부터 한참이 걸렸다.


 우리 사회는 유독 여성에게 인내하는 것을 가르치는 듯하다. 이른바 포용의 미덕이다. 사회에는 여성이 남성을 ‘이해해’주어야만 하는 담론이 차고 넘친다. ‘남자는 개 아니면 애’이기 때문에, 밖에서 일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또는 원래 단순하기 때문에 등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흔한 핑계들로 여성들이 인내하며 살게 만든다.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인내로 수렴한다. 그 결과가 어떻나. 인내하지 못한 여성은 갈등을 일으킨 주범이 된다. ‘인내의 덫’이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속에는 피해 여성들이 아내 폭력으로부터 탈출하기까지, 이 ‘인내의 덫’에 끊임없이 방해받는 모습이 여과 없이 그려져 있다. 인내하는 이유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다. 가족이든 경찰이든, 주변 사람들은 그녀보다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해서 깨질 가정을 더 걱정한다. 폭력이 시작된 순간 이미 가정은 부서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는다. 결국, 그녀들은 아내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인내를 강요해 온 사회 구조의 피해자이기도 한 것이다.




내 아이들을 나처럼 아빠 없이 키우고 싶지 않았다. 나만 참으면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중략) 나를 세뇌시켜야 했다. ‘나는 괜찮아.’ – 107p


남편은 동서가 보는 앞에서도 내 뺨을 때렸다. 동서는 남편에게 때리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나에게는 “조금만 더 잘하라”고, “여자가 조금 더 신경 쓰면 괜찮을 거다”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108p 


시어머니는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며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자기 아들의 폭력성을 시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226p





 그리고 ‘인내의 덫’은 사실 아내 폭력에 대한 사회의 방관이다. 이 책의 서술에는 그 방관의 민낯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쉼터에 오기 전, 크고 작은 구조 요청을 할 때마다 그녀들이 듣는 이야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너무나 게으르며 무관심하다. 이는 책의 제목이 왜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라고 지어졌는지를, 혹은 지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탈출 이후에도, 사회가 폭력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생존자들에게 ‘왜 참고 살았냐’는 또 다른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는 점은 애석한 일이다.





 고소장을 접수한 나에게 담당 경찰은 범인을 협박하듯 말했다. 

“이혼할 때 유리하게 하려고 고소하는 것 다 아는데 끝까지 갈 것 아니면 지금 접수 취소해요. 경찰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일로 피곤하게 하느냐구요.” – 71p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112 단축번호를 눌렀다 꺼버렸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조금 후에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얼른 받아보니 안내원이 112에 신고하셨느냐며 장난전화 아니냐고 물었다. 너무 황당했다. 남편이받았다면 나는 신고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쉼터에 와서 나와 같은 상황으로 한 여자가 남편에게 살해되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83p


 가정폭력이 뭔지, 누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어디서 상담을 받아야 하는지, 누구 하나 말해주는 이 없었다. 모든 고통을 혼자서 감당해내야 했다. – 144p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살아남았다. 수기가 끝날 때마다 덧붙여진 ‘탈출 그 이후’ 인터뷰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이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는 것이다. 이제 그 어떠한 사회의 덫도 그녀들을 방해할 수 없게 된 이유다. 그들은 아마 다른 누군가를 위해 더 이상 ‘인내하지 않을 자유’를 얻은 것이리라.


 그리고 그녀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도 ‘인내하지 않을 자유’를 얻으라는 용기를 건넨다. 한쪽만이 인내해서 유지되는 관계는 그 자체로 무사(無事)한 관계가 아니다. 그녀들은 앞으로도 그 어떤 것보다 ‘나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고, 또 다른 여성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아내 폭력 피해자들의 수기집이 아니다. 자유를 얻은 스스로에 대한 응원이자 인내하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계몽이며, 동시에 인내하도록 만들고 있는 사회에 대한 경고다. 




“책 한 권이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한 권을 후원해주시면, 전국 67개 쉼터에 입소하고 계신 670여 명의 가정폭력 생존자에게 전달합니다. 한 권의 책으로 생존자를 응원해주세요. *신청하기 : https://goo.gl/8foz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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