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에 용기를 더해서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6기 이윤희




어느새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의 1주기가 되었다. 사실 어느 새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삶과 주변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단어조차도 익숙하지 않았던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주변과 분노를 나눴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은 강남역 번화가에서 한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사건이다. 그리고 남은 여성들은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 지 1년이다.





젠더폭력에 대한 이해 없이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해결될 수 없다

1주기를 기하여 한국여성의전화와 50여 개의 여성․인권․시민단체는 5월 17일 정오에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피해 여성을 추모하고 더 많은 말하기와 행동으로 더 많은 변화를 만들어 갈 것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참가자들은 마스크를 쓰고 현수막을 들었으며 순서대로 발언하는 시간을 가졌다. 총 9명의 발언자들은 젠더 불평등이 해소되어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여성단체 뿐만이 아니라 민주사회와 시민사회를 위한 단체들에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시민사회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김미순 상임대표는 정부가 사건을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으로 한계 짓고, 대책으로 공중 화장실 앞의 폐쇄회로나 화장실 안에 비상벨을 설치하는 정책을 내놓은 태도는 여성혐오와 젠더폭력에 대한 고민 없는 결과라고 규탄하였다. 그리고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정미례 대표는 지속가능한 사회는 젠더 폭력이 종식된 사회임을 강조하며, 그러한 사회로의 변화를 촉구하였다.


기자회견의 참가자들은 일 년 전 전국에 붙었던 포스트잇을 형상화한 현수막을 들었다. 그리고 기자회견이 1시간 정도 이어진 후에는 신촌과 홍대로 이동하여 다시 한번 더 포스트잇을 붙이는 퍼포먼스를 시민들과 함께 진행하였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1년 전에 분노와 두려움을 포스트잇을 통해 쏟아냈던 것처럼, 1년 후에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변하질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변화를 요구하는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저녁 7시에는 서울 추모 문화제에 참여하여 신논현역에서 강남역으로 이제는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는 의미의 행진을 이어나갔다. 


1년 전의 나와 1년 후의 나, 우리

이날 기자회견을 취재기자로서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켜보는 것보다도 참가하는 것이 더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고 현수막을 들어 참가자들 사이에 섰다. 생각해보니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 올라가서 거리를 바라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날씨는 매우 화창했고 차들은 쌩하니 지나갔다. 행인들은 호기심 있게 바라보거나 무심하게 지나쳤다. 큰 카메라들과 많은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그러한 장면을 바라보니, 1년이라는 시간뿐만이 아니라 강남역에서 지금 여기 광화문까지 오게 된 사건들이 떠올랐다.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으로 내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은 것은 강남역 현장에 가서 들었던 말들이다. 우연히 그때쯤에 강남에서 술자리를 가질 일이 있었고, 다 함께 강남역 10번 출구로 가보자는 말이 나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부터 출구 벽에 빼곡하게 붙은 포스트잇이 보였다. 벌써 마음이 울렁거렸다. 가까이 다가가서 글을 읽으니 울렁거렸던 마음은 착잡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변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더 참혹한 마음이 들게 한 것은 주위 사람들 다 들으란 듯이 떠들고 있던 한 남성이었다. 그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흘겨보듯 서 있으면서 계속해서 옆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그에게서는 간간이 ‘이건 정말 아니지 않아?’, ‘과한 일이야’라는 말들이 들려왔다. 또 어떤 커플은 팔짱을 끼고 와서는 웃으면서 괜한 일이라는 듯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런 일들은 많았다. 친구가 헬스 트레이너에게 ‘회원님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남자에게 잘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에서는 서로 ‘저는 예쁘니까 이제 일찍 다녀야겠어요.’ 라며 농담을 나눴다. 누군가는 정말 어이없다는 투로 ‘사람 하나 죽은 건데 여성 혐오 범죄라고 한다’고 말했다.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했지만, 주변의 반응에 혼란스러운 나는 뭐가 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여성이 살해당했다. 그리고 강남역에, 그 화장실에 가지 않아서 살해당하지 않은 여성들이 모였다. 어두운 밤 길이나 외진 곳이 아니어도 살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두려워했다. 그리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러한 두려움과 분노를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두려움에도 추모를 위해 모인 여성들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 모욕했으며, 어떤 이는 인형 탈을 쓰고 나와서 모두 사이좋게 지내자며 여성들의 고통을 무시했다. 지금도 그때도 나는 타인의 고통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드는 태도가 제일 비열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일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처럼 여기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해서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가장 비열한 태도다.





용기가 되어준 모두, 이제는 스스로 용기를 내어

잠재적 아군이라는 말이 요즘에 종종 쓰인다. 페미니스트들이 친절하고 자상한 말투로 말하지 않고 거칠게 말해서 페미니즘의 편이 될 수 있는 ‘잠재적 아군’을 잃었다는 식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이 말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나는 정말로 그들의 아군이었다. ‘된장녀’나 ‘김치녀’가 아니라 ‘개념녀’가 되고자 노력했다. 항상 자기검열을 했고 그것이 왜 불편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남역 사건 이후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그만뒀다.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무가치하며 무의미한지를 안다. 그것을 알게 해준 것은 서로의 용기가 되어준 모두다. 모두의 덕분에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들을 모두 깨부술 수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게 얘기하지 않는다고 투덜대지만, 나의 친절은 그들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 아니다. 내 친절은 나와 여성들, 존재 자체가 지워지려는 시도를 당하고 있는 성 소수자와 단지 성별을 이유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1년 동안 용기를 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 시작은 슬픔과 두려움이었지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용기다. 이제 나는 더 많은 용기를 내고 싶다. 여기까지 이끌어 준 여성들과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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