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번의 봄


손명희 한국여성의전화 공동대표





 겨울은 손 흔들어 보낼 겨를도 없이 훌쩍 가버리고, 봄은 벌써 온 천지에 자리를 펴고 있다.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팔을 벌려 온 몸으로 봄을 맞아들이고, 가지 끝마다 작은 망울을 맺는다. 한국여성의전화는 폭력으로 위기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인생의 봄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 하는 ‘쉼터’를 서른 해 전에 개소하였다.


 지난 3월 14일에는 쉼터를 거쳐간 이들의 수기집인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출판기념 저자와의 만남이 있었다. 이들이 여성의전화와 처음 만났을 때엔 머리카락이 함부로 잘려져 있었고, 얼굴과 온 몸이 피멍으로 얼룩져 있기도 하였으며, 코브라 수도꼭지에 맞은 상처자리가 뱀이 묶였던 자국처럼 되어있기도 했다. 사냥총 개머리판으로 맞아 앉아 있을 수도, 누워있을 수도 없어서 엎드린 채로 상담을 받고 밥을 먹어야 했던 생존자도 있었다.

 

 전화 상담 중, 상황이 너무나 긴급해 즉시 입소를 권했던 30대 피해자가 있었다. 몇 시간 후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60대 여성이 상담실에 들어섰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으니, 입소를 권해서 찾아왔단다. 이름을 듣고서야 그녀가 바로 전화 상담을 했던 이임을 알았다. 그녀는 옷차림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며, 자신은 늘 시어머니가 주는 옷을 입어야 했단다. 자기 나이에 어울리는 옷을 입었다가는 남편의 폭력의 구실이 되어 매일 시달려야만 했다고 했다. 그녀는 쉼터에 있는 내내 각선미가 드러나는 청바지만 입었다.


 그러나 그들이 쉼터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상담을 통해 임파워링되어 퇴소할 때의 모습은, 생존자를 넘어선 진정한 거인, 슈퍼우먼처럼 당당했다. 쉼터에서 함께 한 자매들과 상담자의 지지 안에서 얻은,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깨달음. 그리고 새롭게 발견한 그들 속에 숨어있는 힘. 모두 그들이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가 되었다. 이번 저자와의 만남에서 글쓴이들 모두, ‘쉼터’에서 자신을 곧추 세우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성장했던 시간을 따뜻하게 추억했다.


 한국여성의전화의 여성운동이 이론을 넘어서 공감과 치유를 통한 페미니즘의 완성을 지향할 수 있는 바탕은 ‘쉼터’였다. 여성주의 상담은 내담자들의 문제를 경청함을 넘어, 여성을 폭력으로부터 구조하고 지원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 과정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인권운동의 역사가 되었다.


 폭력으로부터 용기 있게 탈출했거나 구조된 이들의 “곁에” 함께 한 한국여성의전화 쉼터 30년. 준비 없이 소낙비를 만난 길동무와 우산을 함께 쓰면 두 사람 모두 어깨가 비에 젖게 되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함께”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그처럼 쉼터는 생존자와 함께 걷는 ‘곁에 지기’였다.


 이제 쉼터 30주년 앞에서 우리는 소낙비를 피해 숨을 고르고 새 날을 준비한다. 그래서 저 앞에 무지개가 펼쳐진 길을 함께 갈 수 있길 소망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것과 같이, 앞으로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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