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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후기·인터뷰

생존자를 넘어 행복한 사람으로

by kwhotline 2017. 4. 4.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출간기념 저자와의 만남


한국여성의전화 기자단 이윤희


3월 14일 오후 7시,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창비 카페에서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간담회가 있었다. 2013년에 생존자의 분명한 목소리를 통해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과 제도를 변화시키고자 기획되었던 책은 2017년에 출간이 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저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또한, 이 자리는 한국 최초의 쉼터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쉼터라는 말조차도 없던 1987년에 시작된 쉼터는 아내폭력의 생존자들에게 휴식처이자 스스로에 대해 다시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편안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행사장은 50여 명 정도의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참석자들로 가득 찼다. 본격적인 저자와의 만남에 앞서 참석자들은 쉼터의 30주년을 기념하는 영상물을 시청하고 이를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석자들은 화면으로 준비된 케이크의 초를 불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어지는 축사에서 고미경은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여성운동의 가장 큰 스승은 쉼터에서 만난 분들이었다는 말씀과 함께 새로운 길에 앞으로도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드렸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활동했던 정춘숙 의원과 여러 사람의 축사가 이어졌으며, 마지막으로 이 책의 기획위원이었던 김현 시인의 축사가 진행되었다. 책이 가지는 힘과 오늘 출간된 이 책이 앞으로 많은 여성을 돕고 살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축사가 끝나자 참석자들은 큰 박수로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했다.




저자들은 아내폭력에서 벗어나고자 쉼터의 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자신을 치유하고 북돋는 용기의 시간을 가졌다. 쉼터의 도움과 자신의 용기로 폭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제는 또 다른 용기로 본인의 경험을 말과 글로 나눠주게 된 것이다. 편안하지만 약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등장한 저자들은 밝은 모습으로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때때로 고통스러운 기억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에 덩달아 지켜보는 참석자들도 다 함께 크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가득해지기도 했다. 또 화를 내기도 하고 안타까워지기도, 한없이 어이없어지기도 했다. 이 순간들은 글과 이야기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경험이 되었고 이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함께 울고 웃으며 들은 경험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초기에 폭력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것이었다. 생존자들이 신고하더라도 별거 아닌 집안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혼소송에 유리하려고 신고를 하냐는 질문 아닌 질문도 받아야 했다. 폭력의 방관자였던 사회가 뒤늦게라도 조력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2차 가해를 준 격이다. 가능한 한 조속하게 가해자에 대한 확실한 처벌과 피해자를 위한 분명한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정폭력의 경험이 전혀 없는 경우가 가능할까. 2010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53.8%가 가정폭력을 경험한다. 폭력이라는 소용돌이가 평안한 나의 삶과는 멀어 보일지 몰라도 우리 중 누구도 가정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발생장소가 가정이 된다면 그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우리에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어렸을 때 분명 이것이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아버지와 나 사이의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위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기억들이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웃으며 추억으로 얘기할 때도 잦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폭력이 아니게 될까? 상대가 자신 맘대로 되지 않아서 사랑한다는 핑계로 신체적으로 억압하며 정신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도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변명이며 자기 위안일 뿐이다. 이제라도 우리 사회는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아내에 대한 폭력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다른 이유보다도 고통 받는 이웃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고통은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언제든지 우리를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책의 서문처럼 사소함의 담론을 넘어 아내폭력에 대해 더 많은 차원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페미니즘의 도전’의 한 구절처럼 이제는 아버지의 검은 잉크를 엎어버리고 어머니의 젖이라는 흰색 잉크로 어머니에 대해 다시 써내려가야 한다.




이 시간은 나에게 생각보다 큰 사건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가다가, 책상에 앉아 있다가 행사장이 종종 생각났고 그렇게 되면 하고 있던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별일 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사회 한쪽에서는 커다란 고통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프기만 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들과 동시에 폭력의 기억을 잊을 만큼 그 고통에서 벗어난 생존자들의 웃음이 생각났고 함께 웃음을 터트리던 기억 또한 생각났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는 한 분의 마지막 한마디가 깊게 남았다. 


“나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고 싶지 않다. 폭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에게는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있고 그렇기에 나는 행복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나는 생존자의 이 용기 있는 한마디가 계속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피해자의 얼굴로 그들을 보려 했던 태도를 크게 반성한다. 이제는 그들이 피해자도 생존자도 아닌 행복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더해서 고통 받는 모든 여성이 생존자를 넘어 행복한 사람으로 남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책이 여성들이 행복한 사람으로 남게 하는데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행복한 사람들의 용기에 존경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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