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에는 성별이 없다

다큐멘터리 <성평등을 코딩하라>


갱 만화평론가, 프로그래머




첫 사회생활을 IT 회사에서 시작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꾸준히 '개발'을 해왔다. 일보다 인원이 부족하여 개발과 관리 직무를 오갔으나, 관리 직무를 수행할 때라도 자잘한 개발 일들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이직으로 인해 전 직장의 선배들과 송별회를 할 때의 일이다. 거나하게 취한 우리는 '개발자의 경력 종착점은 치킨집 아니면 프랜차이즈'라며 자조 섞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자 동석자 중 한 명이었던 팀장이 자신은 퇴직 후 IT회사를 창업하겠다며, 어두워진 분위기를 가로지르고 자신의 포부를 밝히기 시작했다. 


하필 취한 내가 그것을 흘려 듣지 않고 '그럼 저도 입사하겠습니다'고 외친 게 화근이었다. 아주 재미난 유머를 들었다는 듯 팀장은 한바탕 크게 웃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개발을 할 줄 아냐? 넌 와서 경리 해라.


그 말은 들은 후, 불현듯 급격한 두통이 몰려 왔다. 알코올 때문만은 아니었다. 업무상 엮이지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그는 내 직속 팀장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개발했다고 보고한 시스템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그는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해 왔던 걸까.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고, 이 물음표는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뿌리내렸다. 그후부터는 꽤 재미있게 해오던 개발도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스티븐 잡스, 마크주커버그, 일론 머스크…. '실리콘 밸리에서 조차 남성의 이름만이 빼곡한데 하물며 나 따위가 뭐라고' 하는 자책만이 가득 찼다. 



전문성을 증명해야 하는 여성, 쉽게 받아들여지는 남성


<성평등을 코딩하라!>의 오프닝에 실리콘 밸리의 거물 남성들의 얼굴이 영상을 가득 채운 것처럼, 우리나라의 IT 역시 그랬다. IT 콘퍼런스에는 90~100%의 비율로 남성 스피커가 압도적으로 많고, 대다수 회사에서 CTO 역시 남성이 차지하고 있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는 IT 업계에서 여자 노동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로, 여자에게 불공평한 현실뿐 아니라 현재까지 여자들이 IT에서 일궈 낸 성과들도 밝혀낸다. <성평등을 코딩하라!>에 따르면, 최초의 프로그래머조차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여전히 IT 업계의 이방인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여자 아이들이 수학이나 과학과 같은 이공 계열 능력을 함양할 수 없게 하는 교육 풍토의 문제가 존재한다. 드라마나 영화를 위시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언제나 남성만이 프로그래머로 등장하는 설정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모 타이어 업체의 광고엔 '컴퓨터 고장 나면 오빠'라는 문구와 함께 여자가 컴퓨터를 남성에게 맡기는 장면이 그려진다. 여자는 전자·전기·컴퓨터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존재로 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매체들은 여성과 기술이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라는 이미지를 심어낸다. 


더 심각한 건 이러한 시각이 IT 업계 바깥쪽만을 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IT 업계의일선에서 뛰고 있는 여러 여성 노동자들을 향해서도 이러한 편견은 이례 없이 작동한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를 보며 가장 공감이 갔던 장면은 깃헙(github, 프로그래머라면 전 세계 누구나 아는 서비스다. 서로 개발한 코드를 공유하고, 수정하며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수 있다)에서 일했다던 여성의 인터뷰였다. 


그녀는 회사 동료들과 토론이라도 할 때면 언제나 자신의 전문성을 또다시 증명해야 하는 벽에 가로막혔는데, 이건 나 역시 현장에서 너무나도 많이 접했던 일들이었다. 나야 연차가 낮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전문성이 없어서그랬을 수 있지만, 나보다 훨씬 오래 근무한 10년 차, 15년 차 여자 선배들 역시 그러한 대우를 받았다. 


똑같이 기술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도, 여자 선배의 말은 마땅한 근거 없이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반면 남자 선배의 말은 너무나 쉽게 수용됐다. 남자 선배가 틀린 경우도 많았지만, 이슈가 발생하면  'Brogrammer'(Brother + Programmer의 합성어)라는 말마따나 남자 개발자들끼리 모여 웅성거리면서 처리해버렸다. 기술 동향 같은 것도 여자에게는 쉽사리 오픈하지 않고, 남성들끼리만 은밀히 공유하곤 했다. 분명히 이 태도들에 악의는 없었지만, 그기저에는 '여자는 기술에 관심이 없다'(심지어 같은 IT 종사자인데도 말이다!)는 견고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자 개발자에게 남은 길이라곤 남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인재가 되거나, 차별에 무심한 채 자족하는 것뿐이다. 전자든 후자든 고달프고 외롭기는 매한가지다. 얼마 전에 만난 여자 후배는 어제도 새벽까지 야근했다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여자 개발자들은 야근 안 한다는 편견을 깨고 싶어요. 그래서 오기로라도 전 매일 야근해요. 남자 개발자들 다 퇴근해도 전 꿋꿋이 남아요. 


그녀는 여자라는 편견을 깨고 싶어 했지만, 그 기준은 언제나 남성이었고 편견에 대한 판단 역시 남성이 내리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혹독해져야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깊이 우울해졌다.






실력과 여성을 조합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물론 나 역시 이러한 시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남성들에게 인정받아야만 '진짜 개발자'가 되는 것처럼 언제나 'Brogrammer'들의 근처에 기웃거렸다. "나 정말 기술에 관심 많다고요!" 하면서 업무 외의 개발을 무리하게 소화하려 하기도 했다. 


하나같이 남성을 향한 인정 투쟁이었지만, 그 끝에는 '네가 개발을 할 줄 아냐?'는 맥 빠지는 질문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 허무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었을 때여서 그랬는지, <성평등을 코딩하라!>는 더욱 반갑고 위로가 되는 필름이었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는 여성과 기술의 관계가 결코 이질적이지 않음을 다시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 문제를 위해 투쟁하려는 여성들이이만큼이나 있다며 IT 업계에 여성들이 꽂아낸 깃발들을 펄럭인다.


아직도 '능력'과 '여자'는 상치되는 개념처럼 존재한다. 이건 비단 IT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것이다. 심지어 어떤 여자는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가 아니'라는 취급까지 받기도 한다(최근 <진짜사나이>에 출연한 이시영이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은 아이즈의 칼럼을 참조). 


때로는 여성성을 포기하고 명예 남성화돼야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실력도 있고 여성성도 갖춘 데다가 적당히 남성을 배려하기까지 하는 초-슈퍼우먼(<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처럼, 대중 매체는 여자는 유능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하는 이미지를 그려낸다.<배드 걸 굿 걸(수잔 J 더글러스, 글항아리 출판사)> 에 따르면 이는 성차별주의의 진화된 모습이다)을 바라기도 한다. 


나는 '실력'과 '여성'을 작위적으로 조합하려는 이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여성도 한 사람의 노동자이고 한 명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언제까지 외쳐야 할까. 내가 회사와 계약한 건 '노동력'이지 결코 나의 '여성성'이 아닌 것이다.


<성평등을 코딩하라!>를 보고 난 후, 나는 확신에 찼다. 디버깅해야 하는 건 팀장의 머릿속이지, 나의 성과물이 아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네가 개발은 할 줄 아냐'라는 그의 말에 이제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하려고한다. 



물론이지, 난 IT 전문가야! 여자인 게 뭐, So 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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