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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일상

‘첫 출근기’ 마음 비껴 길을 내어주다

by kwhotline 2016. 5. 4.

‘첫 출근기’

마음 비껴 길을 내어주다


혜경 교육조직국


지금 같아선 도무지 생기지 않을 용기로 서울에 오게 된지 7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나는 소중한 친구를 얻었고 자발적으로 직장을 잃었다. 돌이켜 보면 나와는 잘 맞지 않았던 ‘다 잘 될 거야’를 위로삼아 애를 썼지만 결국 울 할매가 즐겨 썼던 뭇 현인들의 말.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지 않음’에 폭격되고 말았다. ‘쫄아든 마음’이라는 대가와 함께, 원치 않은 현인의 말을 강제 체화하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조각상으로 빚은 후 그 조각상을 깊이 사랑하자 조각상이 실제로 생명을 얻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 이야기처럼, 나는 어떤 일에든지 의미를 먼저 부여하고 그 의미대로 내가 변화되길 바랐었다. 그러나 합리적이지 못한 기대와 과대포장 된 신뢰로 인해 스스로에게 꽤나 피곤함을 주곤 했었다. ‘어떻게 살고 싶나’, ‘생의 끝자락은 어떠한 모습으로 남겨지길 원하는 가’ 질문에 대한 구현은 스스로에게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구속하는 족쇄였다. 





 

‘마음 비껴 길을 내어주다, 혜경’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오후 4시가 되는 날이 반복 되면 마치 하루를 인터셉트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잉여로운 인간놀이는 비교적 잘 맞았지만 간간히 지루하기도 했었다.  

언젠가 나의 생활 패턴을 지켜보던 친구가 지금은 좀 어때? 라며 말을 꺼냈다. 나는 무엇보다 해결되지 못한 과거의 조각이 걱정 되었다. 조각은 나를 괴롭혔고 무기력을 선물해 주었기 때문이다. 해결되기를 바랐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저 주어진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은 조각을 떨쳐내는 노력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도 마음도 들여다보지 않는 날들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돌아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잉여의 시간은 나름 혜경회복장치로써 제 역할을 한 것 같다. 해질 시간 노을로 발갛게 물든 하늘처럼 언제부터인가 쉼이 주는 위로가 마음에 번진 것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당시 꼭 맞는 처방이었고 약효가 들었던 것은 확실하다. 


2016년 1월. 야매(?) 진단과 처방이 남발했던 잉여로움을 발판으로 독박골 생활을 시작하고 있다. 독박골 생활 3개월 차,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철과 버스를 오고가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를 한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날고 기는 여성들이 상주하는 여성단체에 내가 속했다는 것과 내가 어떤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는 욕망(?)과 꾸밈의 욕구(?!)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스스로 존중받기를, 그대로 내어주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독박골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겪은 일화가 생각난다. 그날은 오랫동안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해왔던 활동가를 떠나보내던 날이었다. 배관이 터질 정도로 추웠던 그날, 결국 지하에 있는 연구실은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순간, 짐을 싸고 있던 활동가의 선두로 모든 활동가들이 양말을 벗고 준비된 작업화(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건물마저 헤어짐을 슬퍼한다며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물을 퍼 담으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보통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일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있는 이도 마무리를 짓는 이도 모두 뼛속까지 ‘앞으로도 여전히 독박골 일원’이 되는 진귀한 광경이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독박골의 생활의 더욱, 썩– 마음에 들게 되었다. 





나를 지킴으로써 너를 지키고 너를 지킴으로써 나를 지키는 우리는 운명공동체


나는 여성인권에 대해 간간히 주변에서 들었을 뿐 많은 고민이나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독박골로 오기까지 망설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의식하는 것을 병처럼 여기는 사회에 대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길을 찾아보았고 많은 의미에서 실패를 경험해 보았다. 


젠더 감수성이 건조한 나는 요즘 종종 ‘내 안에 너 있다.’를 경험한다. 전이라면 의식하지 못했을 가부장적인 생각과 행동, 차별적인 시선과 언어의 폭력성이 언제든 튀어나올 준비 자세가 희미하게 감지가 된다. 


당연하게 받아들였기에 얻게 된 생각과 습관을 나는 독박골에서 직면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이곳은 나를 지킴으로써 너를 지키고 너를 지킴으로써 나를 지키는 운명공동체가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서로가 지켜지는데 기여하는 이곳을 시작으로 여성들이 당당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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