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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by kwhotline 2016. 4. 20.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한국여성의전화 6기 기자단 홍보미

                                                  

    

최근, 데이트 폭력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운동권 출신 여성이 같은 운동권의 남성에게 당해왔던 폭력을 SNS상에 고백했던 일은 SNS의 파급력에 힘입어 널리 알려졌으며, 온라인상에서 ‘진보 마초’라는 조롱기 섞인 유행어를 양산해 냈다. 또한, 아이돌 출신 연기자 K씨가 연인을 폭행한 사건으로 소송에 휘말렸던 일은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 오랫동안 이슈가 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전(前) 청와대 경호원 출신 남자친구에게 지속적으로 데이트 폭력을 당해왔던 여성이 그로 인한 괴로움을 토로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채 숨진 사건이 보도되었다. 물론 언론이 집중적으로 보도한 사건들은 대다수가 ‘운동권’, ‘아이돌’, ‘청와대 경호원’ 등 자극적인 키워드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지만, 데이트 폭력에 대한 언론의 이례적인 주목은 ‘데이트 폭력’이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명칭이 널리 인식된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경찰청이 발표한 데이트 폭력 현황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은 2009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전체 범죄의 2%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피해자의 90% 이상은 여성이다. 지난 5년간 폭행, 살인, 강간 등을 포함한 데이트 폭력이 연간 7,000여 건에 달했고, 재범률은 76.5%라는 높은 수치를 보였다. 또한, 2016년 2월 데이트 폭력 집중 신고 기간 접수된 신고에 따르면 전체 가해자 중 전과자는 58.9%에 달했다. 경찰은 연이은 언론보도와 속출하는 피해에 경미한 사안에도 바로 수사에 착수할 것을 강조하고, 데이트 폭력 집중 신고 기간을 운영하는 등 보다 본격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데이트 폭력 예방을 위해 ‘클레어법’ 이라는 새로운 법안을 도입하는 것 또한 고려되었는데, 이는 영국에 거주하던 클레어 우드라는 여자가 전과자 애인으로부터 살해당했던 사건을 계기로 마련된 영국의 ‘클레어법’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법안은 애인의 전과를 조회할 수 있게 하여 피해를 예방하고자 하는 취지를 지녔으며 데이트 폭력의 재범률이 높다는 점, 가해자 중 전과자의 비율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생활 침해의 문제와 범죄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관계의 범주 설정에 관한 문제, 그 실행 방식과 절차의 문제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애정 문제가 얽혀 있는 경우가 대다수인 데이트 폭력의 특성상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폭력을 폭력이라고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상황에서 좋은 법이 마련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앞서 언급했듯이, 데이트 폭력은 일반적인 폭력과는 다른, 까다로운 특성을 보이고 있다. 데이트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에는 애정은 물론 주변인들과의 관계 등이 복잡하여 얽혀 있기 마련이다. 이때 피해자는 폭력 뒤에 오는 애정 공세로 인해 폭력 자체를 인식하기 어려워하기도 하며, 사회에서 자신이 속한 자리, 혹은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담보로 한 협박으로 인해 폭력을 인지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기도 한다.


필자의 지인 A는 2년 가까이 교내 커플로 지내며, 지속해서 데이트 폭력을 당해왔다. 연애 초반에는 SNS나 통신을 통제, 차단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 A의 외출과 동선을 직접 감시하고, 때로는 감금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는 A의 주변인인 필자에게까지도 뻗쳐, 대화 몇 마디 나누어 본 적도 없는 A의 남자친구로부터 더는 A와 만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조신하지 못한’ 사생활에 대한 훈계를 듣기도 했다. 심지어 그가 말했던 필자의 사생활이라 함은 빼앗은 A의 휴대전화에서 훔쳐본 문자와 SNS 등을 토대로 상상력을 첨가하여 자의적으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그들과 연락을 끊은 지 몇 달 후, A는 심혈을 기울여 소위 ‘안전이별’을 이루어냈고, 오랜만에 재회한 필자에게 그때의 일을 사과하며 당시에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본인뿐 아니라 필자까지도 ‘죽일까 봐’ 무서워 오랜 시간을 들여 안전 이별을 하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A의 전 애인은 전과자가 아니었음은 물론 교내의 많은 이들에게 얌전한 모범생으로 통하는, 겉보기에는 멀쩡한 20대 청년이었다. 


A의 경우뿐만 아니라 필자의 주변에 정서적, 물리적으로 데이트 폭력을 겪고 있던 이들 대다수는 피해를 겪는 와중에도 그런 껄끄러운 문제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 중 몇몇은 “남자친구를 욕하는 것은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거나 다름없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가벼운 수준의 폭력 정도는 “사랑을 기반으로 한 다소 과격한 집착” 정도로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가해자의 상당수는 폭력을 휘두를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피해자 외의 다른 이들에게는 상냥하고 상식적인 ‘보통 사람’이었기에 피해자들은 섣불리 피해 사실을 알리기 어려워하기도 했다. 이처럼 필자 주변의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들은 그들이 직접 피해를 고발하기도, 주변에 도움을 청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 때가 많았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음을


남과 북의 화합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제작된 <이제 만나러 갑니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지난 3월 27일 방송에서 남, 북의 서로 다른 방식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다루었다. 북한 출신의 한 여성 출연자는 북한 특유의 ‘밀당’이 없고 솔직한 연애 방식에 관해 이야기 하던 중 충격적인 경험을 토로했다. 자신에게 고백을 한 남자를 거절하자, 곧바로 주먹으로 얼굴을 맞았다는 것이다. 뒤이어 다른 출연자 또한 비슷한 경험을 고백했다. 북한의 출연자들은 그러한 경험에 공감하며 그런 식의 폭력과 스토킹은 북한의 연애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했다. 출연자 중 한 명인 북한 출신 영화감독은 북한에서는 ‘존중’이라는 개념보다는 ‘존경’이 우선시 되며, 이때 존경의 구조는 최상부에 당과 수령이 있고, 그 아래에는 남자, 가장 아래에는 여자가 있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데이트 폭력의 주요 원인으로 여성 인권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구조를 꼽은 것이다.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다이애나 러셀에 따르면 “폭력은 지배자의 권력이 피지배자에 의해서 위협당한다고 느낄 때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자가 이용하는 강제력”이다.  폭력의 이러한 본질은 데이트 폭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2007년에 한국가족복지학회지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남자들은 여자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을 때 폭력을 허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언제나 여성의 위에 있을 것만 같았던 자신의 권력이 위협 받을 때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사회화된 남성은 가부장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을 통제하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쓴다. 마찬가지로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사회화된 여성은 이를 예민하게 인식하거나 적극적으로 방어하기 어려워한다. 실제로 2004년에 대한여성건강학회지에 게재된 연구에서는 전통적인 성 역할 태도를 지닌 이들이 데이트 폭력에 더 관용적이며, 가해자가 될 가능성도 높다고 분석했다.


가부장적인 사회 안에서 통용되는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 즉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성욕을 지녔다는 ‘남성다움’이라는 망상,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더욱 소극적인 성욕으로 대표되는 ‘여성다움’에 대한 환상은 데이트 폭력이라는 현상을 부추기며, 이 폭력이라는 수단은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하는 구성원들을, 특히 여성들을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처절하게 통제한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한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보다 예민해지고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연인과 나는 종속 관계가 아니라 두 명의 독립적인 주체로 이루어진 관계이다. 지금 불같이 사랑하더라도 연인과 나는 운명공동체가 아니라 언제든 남이 될 수 있는 사이이며,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아프다면 홀로 남을 상대에 대한 염려는 잠시 미루어 둬도 좋다. 요컨대 우리 모두 가사가 말하듯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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