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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성명·논평

눈치게임 중 가장 무서운 것

by kwhotline 2016. 4. 12.

독박골에서

눈치게임 중 가장 무서운 것

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눈치게임이라는 게 있다. 가령, 다섯 명이 있다 치자. 그 중에 누군가가 1을 부른다. 그 다음에 누군가 2를 부른다. 이런 식으로 서로 눈치를 보며 숫자를 부르다 보면, 마지막 숫자를 부를 수밖에 없게 되는 사람이 생긴다. 그러면 게임 끝! , 게임 도중 누군가 동시에 같은 숫자를 불렀다면? 역시 게임은 끝난다. 그야말로 눈치 없는 인간이 아웃되는 게임이다.


이번 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정당과 후보들은 아마 눈치게임 같은 걸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올해 한국여성의전화는 20대 총선을 맞아 입법과제 중심으로 정책을 정리하여 각 정당에 제안하고, 후보자들에게 각 정책에 대해 찬반을 물었다. 선거에서는 정책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생각, 그리고 선거 시기에 성평등과 여성폭력에 대한 정책 요구를 환기하겠다는 생각으로 진행한 일이었다. 지역구 후보자는 총 938. 질의회신에 대한 충실성을 담보하기엔 너무 많았다. 여성의전화 본부가 있는 서울과 25개 지부가 위치한 지역으로 지역을 한정했다. 질의서에 대한 답변율은 29.6%. 엄청 바쁘다고 하는 선거운동 기간이었음을 고려하면 높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것이 성평등과 여성폭력 의제에 대한 낮은 관심을 보여주는 수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무응답 이유를 들어보면, 그 이유가 그야말로 눈치게임 저리가라다. 실상, 어떤 질문엔 답변하기 곤란하기 하다는 것이 무응답의 이유였기 때문이다. 좋은 말로는 신중히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답변할 수 없다는 거고, 날 것 그대로 보자면 찬성하고 싶어도 그것에 반대하는 유권자들이 있기 때문에 찬성으로 말할 수 없고, 반대하고 싶어도 찬성하는 유권자들이 있기 때문에 반대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형호제 못 해 한 맺힌 홍길동도 울고 갈 판이다.

 

그런데 그 어떤 곤란한질문이란 이런 거다. 성별, 나이, 장애, 성적 지향, 출신국가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말자는 차별금지법 제정, 피해당사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일 일본군위안부 협의”, 법원 처분 전에 검찰단계에서 가정폭력 가해자들에게 상담을 조건으로 기소유예 해주는 (그리고 그 실효성이 아직도 불확실한) 상담조건부 기소유예제 폐지, 여성만을 처벌하며, 사회경제적 사유의 임신중단 허용하지 않는 낙태죄 폐지 등이다. 2주기를 맞는 세월호 문제도 드러내어 이야기하는 하는 후보도 찾기 힘들다.

 

옳다, 그르다, 찬성한다, 반대한다를 말하지 않는, 혹은 말 할 수 없는 사회.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후보가 되고, 득표를 할 수 있는 사회. 그러나 의견 없음은 침묵이고, 침묵은 묵인이다.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다며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사이에, 우리 사회의 인권은 아무도 모르게 후퇴하거나 사라지는 건 아닐까라는 우려는 과한 것일까.

 

이런 뜻으로 읊었던 것은 아닐 것 같지만, 한명희는 <가장 무서운 것>이라는 시에서 형체가 없으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천천히 움직이는 것 그런 것들은 모두 무섭다고 했다. 우리는 정책질의서라는 형태로 아주 부드럽게 질문을 던졌다. 눈치게임 중, 응답은 실종됐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때로 천천히 움직여 왔을지라도 멈춘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부드럽게 천천히 움직여왔지만, 멈춘 적이 없었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어쩌면 변화, 어쩌면 희망 같은 것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총선이 코앞이다. 멈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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