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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활동/후기·인터뷰

[기고] 심리학 에세이 『오래된 연장통』에 대한 단상

by kwhotline 2016. 2. 24.

심리학 에세이 

오래된 연장통에 대한 단상

 

Jane| 한국여성의전화 회원



이 글은 2014년 뜨거운 8월에 진행한 여성주의 집중 아카데미 "뜨거운 시선"에 참여하면서

전에 읽었던 진화 심리학 에세이 오래된 연장통(2010)을 읽고 느꼈던 단상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여성주의 집중 아카데미에 참가해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책임연구원인 하정옥 선생님의 <'두 개의 성'과 성차에 대한 과학적 신념>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들으며 진화론이 얼마나 가부장적인 사고에 오염돼 있는지 생각하며, 지난 2월에 오래된 연장통을 읽으면서 전중환 교수의 "헤픈 여자" 언급에서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된 연장통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우리 생활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을 약간은 가볍고도 흥미롭게 설명하는 에세이다. '헤픈 여자' 가설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동성애에도 유전적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중환 교수가 쓴 말이다. 문제는 어떤 여성의 특성을 기술할 때 '헤프다'는 단어를 썼다는 점이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성 인식은 여성 대상 성 폭력을 사회 문제로 보는 것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아주 심각하며, 그냥 단순히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는 남성과 여성의 짝짓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중환 교수는 동성애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에드워드 밀러(Edward Miller)'친절한 남자 가설(nice-guy hypothesis)'을 소개한다. 우리가 극단적으로 남성성을 지닌 남성이나 극단적으로 여성성을 지닌 여성을 매력적으로 보지 않듯, 약간은 중성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을 더 선호한다는 내용은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대다수 이성애자는 번식상의 이점으로 번식 성공도를 높이기 위해 상대 성의 특성에 해당하는 유전자들을 적당히 지니기도 한단다. 그런데, 극소수의 남성이나 여성이 이러한 유전자들을 너무 많이 물려받으면 동성에게 성적으로 끌리게끔 발달하여 동성애자가 된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번식상의 이점, 즉 매력이 남성의 경우는 여성적인 특성의 하나인 '친절함'이고, 여성의 경우는 남성적인 특성의 하나인, '하룻밤 성관계에 쉽게 응하는 성향'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에드워드 밀러가 그의 논문에 자신의 가설을 설명하면서 전중환 교수가 사용한 "헤픈 여자"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비슷한 단어를 쓰더라도 좀 더 신중한 단어를 선별해서 쓰지 않았을까. 그는 '하룻밤 성관계에 쉽게 응하는 성향'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던가. "헤픈 여자"는 우리나라에서만 특수하게 그리고 아주 쉽게, 심지어 같은 여성들도 별 생각 없이 쓰고 있는 단어이다.

 

'헤프다'라는 단어는 남성 중심주의나 가부장적 시각이 다분히 드러나는, 사회적으로 여성을 폄하하는 표현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헤프다''물건이나 돈 따위를 아끼지 아니하고 함부로 쓰는 버릇' 또는 '말이나 행동 따위를 삼가거나 아끼는 데가 없어 마구 하는 듯하다'는 뜻이다. 예문을 찾아봤더니 사람한테 쓰는 경우는 여성에게만 국한돼 있는데, '허튼 계집''정조가 없이 몸가짐이 헤픈 여자'로 정의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조의 개념은 여성에게만 해당하므로 '헤픈 여자'는 있어도 '헤픈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여성이 남성성의 유전자가 많아 본능에 충실하여 성관계 상대가 많다면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인데, 여기에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자가당착에 빠지는 일이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보면, 아니 여성주의 시각이 아니더라도, 인간에게 사랑은 헤플수록 좋은 것이므로 사랑에 헤픈 여자는 있어도 '헤픈 여자'는 없다. '헤픈 남자'가 없는 것처럼.

 

진화 심리학은 다른 학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본 토대가 될 수는 있지만, 학제간의 협력과 융합 없이는 진화라는 좁은 틀 안에 갇혀 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더구나, 진화 심리학자들이 대부분 남성들이다 보니, 들여다보는 프레임 역시 남성 중심일 수밖에 없어,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가설 자체가 편협하거나 모순을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전중환 교수가 주장하듯, 인류가 유인원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약 700만 년 전에 갈라진 이후 95 퍼센트의 시간을 아프리카의 사바나 초원에서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며 보냈기 때문에, 석기 시대의 적응적 선택을 한 인간의 심리 기제가 지금의 사회생활에서도 무의식으로 또는 자동으로 나타나곤 한다. 여성과 남성의 성차를, 또는 동성애를 포함한 다양한 성의 스펙트럼을 석기시대의 인간의 마음에서 설명하려는 진화론적 관점은 유효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11000년 전 시작된 농경사회나 200년도 채 되지 않은 현대 산업 사회를 꾸려오면서 인간이 유의미한 진화적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차별되는 전전두엽 피질의 대단한 발전과 변화를 너무 과소평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신경과학자들이 변연계 영역(석기시대의 마음)뿐만 아니라 전전두엽 피질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의 본성이 다양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석기 시대에서 좀 더 확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외부 필진이 기고한 글은 한국여성의전화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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