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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 이슈/칼럼

한 대도 허락해선 안 돼요!(1988. 10. 17. <베틀>)

by kwhotline 2013. 10. 8.

 

 *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과거 상담 사례를 통해 여성인권의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시작된 1983년부터 30년을 맞은 2013년까지, 그 동안 한국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혹, 아무 변화도 없는 건 아닐까요?

 

2013년 10월, 지금으로부터 딱 25년 전인 1989년 10월 17일 발행된 『베틀』의 '상담소 소식'을 돌아봅니다.


 

 

 

 

한 대도 허락해선 안 돼요!

남편의 구타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자

 

박형옥(본회 상담부장)

베틀 1989년 10월 17일 발행본 중

 

 

* 베틀』은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행한 소식지의 제호로, 『여성의 눈으로』,『여성, 그 당당한 이름으로』를 거쳐 현재는베틀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Q씨와 만난 것은 지난 삼월이었다. (반듯한 인상이었다고 생각된다.) Q씨가 말한 첫 마디는 “저는 이혼하지 않습니다”였다. 후천성면역결핍증과 흡사한 증세인 구타라는 고칠 수 없는 병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지속될 수밖에 없는 긴장과 공포 분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Q씨는 더 이상 참고는 살 수 없다고 했다.

  

Q씨는 십칠 년 동안 남편에게 구타당한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하였다. 외국에 살 때 남편이 던진 흉기로 생긴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닌다고 했다. “네가…했기 때문에”라는 남편의 말에 길들여진 Q씨는 좀 더 남편에게 순종적이고 헌신하며 인내하면 언젠가는 남편의 구타가 멈추리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너 때문이야”라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누구에게도 남편의 구타를 말할 수 없었고 알려질까 봐 두려웠다고 한다.

 

첫날 Q씨에게 부탁한 말은 “한 대도 남편에게 허락해서는 안 돼요”였다. Q씨는 비상 꾸러미를 준비하고 대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구타 분위기가 느껴지면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 대도 맞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 Q씨의 표정에는 자랑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그의 남편은 가정의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며 자기가 지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항상 Q씨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고 애를 먹였다. 어느 날 아침 Q씨는 운전기사가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의 차에 올라타서 생활비를 내놓으라고 큰 소리 치면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하였다고 한다. 매 맞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때리는 자가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또한 지방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였고 오랜 동안 한 동네에서 산 이웃 자매에게 남편의 구타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위기상황에 놓였을 때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남편과 집에서 하지 못 하는 대화는 직장에 전화하거나 직장 근처에 찾아가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때로 몸이 불편하면 출근하는 남편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워서 신문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사소한 일부터 점점 자신의 주장을 확대시켜 나갔다. 당황한 남편은 시집식구를 불러들이고 시어머니를 집에 머물게 하면서 Q씨를 협박하고서 조이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남편에게 매 맞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리만큼 내부 갈등이 컸었고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무너지면 매 맞는 노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포기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반년이 넘게 계속 상담하는 가운데 두 번의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구타 사태가 일어났다. 한 번은 시집식구들과의 협박과 언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때는 이웃 자매들이 달려와서 도와주었다. 또 한 번은 어린 아들이 경찰을 데리고 와서 “아저씨가 우리 집에서 나가시면 엄마는 맞아 죽어요”하면서 두 팔로 막고 못 나가게 하여 구타를 멈추게 했다고 한다.

 

Q씨는 고백한다, 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돕는 이웃자매가 있다는 사실이 힘을 주었고 ‘베틀여성’모임에 참여하며 계속 상담을 한 것이 자신의 삶에 변화와 무한한 가능성을 주었다고.

 

구타자와 이혼을 하든 함께 살든 결정은 내담자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Q씨의 고백처럼 여성중심상담을 하는 이곳에서 계속하여 면접상담을 하게 될 때 자신의 삶에 변화가 오게 되고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게 되며 이웃의 아픔을 당하는 자매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열려질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예나 지금이나, Q씨의 남편처럼 가정폭력가해자들은 “살림을 못해서”, “열 받게 해서” 등의 이유로 피해자를 탓하며 폭력을 행사합니다. 또한 1988년 3월에 만난 Q씨의 상황과 최근에 본회를 찾아온 가정폭력피해자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순종적이고 헌신하며 인내하면 언젠가는 남편의 구타가 멈추리라”라는 Q씨의 생각처럼 대다수의 가정폭력피해자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가정폭력상황을 참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89년도에는 가정폭력피해자들이 가정폭력 대처방법 등에 대한 정보제공을 받을 곳도 적었으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정폭력관련 제도와 법이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제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폭력상담소가 전국에 228개(2013년 5월 기준)나 운영되고 있으며, 가정폭력 관련 제도 및 법 등 가정폭력피해자를 위한 사회적 제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정폭력피해자들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가정폭력을 “사소한 문제”, “개인적인 문제”, “남의 집 가정사” 등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변화되지 않아서입니다. 또한 가정폭력이 사회적 범죄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가정폭력가해자에게 아주 가벼운 처분을 하거나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가정폭력이 여성에 대한 차별의 극단적인 표현이며, 심각한 인권 침해이고, 여성의 생명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회적 범죄행위라고 인식할 때 가정폭력을 대처하는 가정폭력피해자 및 가해자들의 행동이 달라질 것입니다.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 최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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