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춘숙(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내가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여성운동을 시작한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셈이다. 의욕이 앞섰던 서른 살에 여성의전화에 들어와 이제 ‘나이 듦의 여유와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기는 쉰 살이 되었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때로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듯 한 여성에 대한 폭력 현실에 좌절하기도 하고, 때로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여성의전화 활동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지난 20년, 매일 매일이 숨 막힐 듯 바쁜 중에도 유쾌한 질주의 시간이었다.
바쁘지 않으면 여성의전화가 아닌 것 같았다.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랄 만큼 일이 많았다. 특히 1994년부터 1998년까지의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운동’ 기간은 수많은 토론과 몇 날 몇 일의 밤샘에도,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기쁨과 가정폭력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로 임신 중의 몸으로도 힘든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내달렸던 시간들이었다.
여성의전화는 정말 놀라운 조직이다. 상담, 회의, 강의, 집회, 토론회, 바자회, 일일호프, 영화제, 출판기념회... 이 많은 일들을 우리가 다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될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우리가 하려고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가끔 사람들이 ‘어떻게 그 긴 시간을, 한결 같은 열정으로 계속해 왔는가’를 묻곤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러 요소들이 내가 여성의전화에서 오랫동안 일하게 해 준 것 같다.
나는 지난 20년간 여성의전화에서 끊임없이 성장 해 왔다. 사람들을 ‘성장’시키는 것은 여성의전화의 특징이다. 여성의전화를 만난 모든 사람들이 늘 하는 얘기가 ‘여성의전화를 만나서 성장했고 그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성의전화에서 나는 나의 콤플렉스들을 해결했고, 편견을 교정시킬 수 있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갖게 되었던, 당시 운동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노동운동 중심성, 주변과 중심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여성의전화에 와서 벗었다.
‘개인적은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여성주의 원리는 ‘여성’이라는 존재로서의 ‘나’를 돌아보게 했고, ‘나’와 ‘여성’의 가치와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알게 해 주었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활동은 귀하고 소중하며, 어느 위치에서, 누구의 관점으로, 무엇을 바라보는가가, 주변과 중심을 가를 뿐 그 위치는 언제나 바뀔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성의전화에서 활동하면서 ‘여성주의’라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평등을 몸으로 실천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 같은 불평등한 여성 현실에 대한 분노, 나와 여성의전화를 믿고 자신의 어려운 이야기들을 해준 수천명의 내담자들, 이 불평등하고,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바꾸고야 말겠다는 소명의식과 책임감들이 오늘까지 나의 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요소들인 것 같다.
여성의전화의 ‘현장성’은 나를 매일 각성시킨다. 잠들지 말라고, 타협하지 말라고, 회유되지 말라고, 전남 순천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내담자의 눈물이,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나와 한길을 가는 그때의 소년 소녀들의 모습이, 때로 지치고, 때로 힘들어도 여성의전화의 활동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나의 ‘힘’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다. 늘 격려와 지지로 함께 해 주었던 여성의전화의 동지들, 언제나 나의 최대의 지원자였던 가족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나의 활동이 가능했다.
그동안 함께 해준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 귀한 소식지에 나의 간단치 않은 20년을 쓸 수 있게 해준 후배들에게 감사하며, 이제 20년을 신나게 일한 활동가로서 앞으로 후배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는 선배가 되고 싶다. 2013년 한국여성의전화는 30주년을 맞는다. 지나온 30년 보다 더 멋지고 더 훌륭한 30년을 보낼 한국여성의전화가 되길 기원하며, 나도 그 길에 함께 할 것을 약속한다. 모두들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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